칼빈의 5대교리 세번째 /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좐 칼빈 2014. 11. 18. 01:25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3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i Christo, Soli Deo Gloria" God, "and God alone", is man's highest good! 1.도입 우리는 지난 두 번의 강의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부패와 무능은 자력구원의 길이 근원적으로 차단돼 버린 나머지 외부적 절대타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편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을 통해서만 허물과 죄로 철저히 죽어버린 인간이 다시 구원의 길에 올라 하나님과 깨진 관계를 새롭게 정립시키고 화목과 교통과 교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재창조의 유일한 방식임을 도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교리는 구원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구원의 전제조건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바 창세 전 선택이란 창세 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지적 표명이며 동시에 구원을 위한 사전표식이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은 구원의 사전단계일 뿐 아니라 그 성격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유효하게 발휘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속죄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대신해서 갚아주신다는 속량(贖良)내지는 대속(代贖) 또는 구속(救贖)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때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특정인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속죄교리를 제시하면서 특별히 제한속죄라고 표현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모두 중 일부에게 만 적용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속죄교리는 누구를 위해 속죄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보편적 속죄교리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인간편에서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2.전개 제한속죄 교리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속죄교리의 반동으로 나왔으나 그 근거는 철저히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아울러 제한속죄 교리는 앞에서 언급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내용의 전개상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제한속죄는 차별적으로 일부에게만 베푸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연장선상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 속죄의 필요성 하나님의 선택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 중 일부에게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을 좇아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죄 없다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칭의적 구원의 예비적 조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전 선택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속죄의 범주에서도 제외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죄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서 시행되는 연속적인 구원사역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속죄(贖罪)가 필요한 것일까요. 속죄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금품이나 공로로 지은 죄를 씻음 받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본주의적 접근방식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적 구원사역을 일컫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자력으로는 어떤 선행과 공로의 대가로도 죄의 문제를 탕감 받을 수 없기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의의기준과 가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3:10).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베푸시는 속죄사역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택교리는 구체적 시행에 있어서 그 정당한 실효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속죄의 성격과 방식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통해 속죄의 성격이 요구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로서 자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이는 어떤 형태의 인위적 방식으로도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절대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인간의 선택이 가능했듯이 동일한 원리로 절대적 선과 의의 소유자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속죄를 실현시키기 위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신학적으로 ‘대속적(代贖的) 속죄’라고 일컫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적 타자가 대신 죄의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속죄는 비로소 실현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절대타자에 의한 대속적 희생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전적타락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영적 파산자입니다. 영원히 죄인으로 정죄 될 뿐입니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자력구원은 요원합니다. 아니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죄를 사면하시는 방식은 죄인이 아닌 절대적 타자에 의한 대속의 원리가 요구됩니다. 죄와 불의와 허물이 전혀 없는 절대 타자(他者) 말입니다. 여기서 속죄의 성격 또한 대속적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대두됩니다. 이제 인간의 속죄는 절대타자가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죄 값은 사망 곧 죽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6:23). 구약의 율법의 제사제도하에서 요구되어진 일체의 희생제사 행위는 바로 이런 속죄사건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의 일환입니다(레1-7장, 히9:13). 이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9:22, 레17:11)는 하나님의 속죄의 원리에서 나와진 실천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약제사의 실체(히9:14)로서 절대타자의 필요충분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절대타자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표현합니다(막10:15). 이는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 마리 희생양으로 오신 분(요1:29)임을 언급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예수님이 바로 절대타자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예수님이야 말로 절대 선과 의로우신 분으로서 곧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빌2:5).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말입니다(요1:14, 18). 그러기에 비록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육화(肉化)하셨지만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시고(히4:15), 죄를 모르시며(고후5:21), 죄를 짓지도 않으신 분(벧전2:22)으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신(神)-인(人)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하심으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요,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또한 알고 믿게 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14:9). 성경은 예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 분의 출생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눅1:26-35). 곧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비밀의 경륜 속에서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출생과 전 생애가 앞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하신 바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치시고 이루시는 일에 집중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요17:4).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으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죄를 친히 사해주시는 것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고 계심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막2:1-12).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속죄사역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대속적 사역의 절정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성경은 감히 선포합니다(롬8:1). 다시 말해 그 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으며 그 분의 다시 살아나심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우리 또한 의롭다고 칭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롬4:2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으심이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나아가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롬3:24) 그 결과로 주님을 왕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속죄의 효력과 적용의 범위 이제 우리는 본 교리의 핵심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적 속죄사역을 베푸셨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속죄사역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누구를 위해 대속적으로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어주셨단 말인가? 이 주제에 대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보편속죄를 주장합니다. 이는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자신이 믿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해 오는 칼빈주의 자들은 제한속죄를 성경적 바른 교리로 수납해 왔습니다. 이는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가 결국은 창세 전 택자들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제 2 강에서 이미 살펴 본대로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 주권적인 뜻에 따라서 전체 중 일부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속죄의 효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속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 공효는 염소나 송아지의 희생과 같은 저급한 피조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들은 그 가치면에서 그처럼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기에 효력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매년 같은 제사를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한시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속적이지는 못합니다.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은 이를 실체를 향한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물로서의 실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다른 한편 ‘영 단번’으로 드려진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이 전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전담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공효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예수님의 무한하신 가치는 온 인류의 죄를 넉넉히 담당하시기에 족하고도 남습니다. “다 이루셨다”(요19:30)는 십자가상의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드리셨다는 승리의 일성(一聲)입니다. 비록 죽으시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으로서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계시적 발언인 것입니다(히12:2).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안에서 죄인 된 인류는 당당히 구원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새롭고 산’ (히10:20) 생명의 길이 열려진 셈입니다. 온 인류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도말 되기에 족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겨졌습니다(시103:12). 속죄의 공효적 능력의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속죄사역과 관련해서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속죄의 적용과 범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위한 속죄란 말인가 하는 문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를 위해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담당해야만 하셨느냐의 관한 내용 말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결코 전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속죄의 공효는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원하셨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적 능력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범위 내에 들어온 자들을 위해서만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유효하게 미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란 말인가요. 바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들입니다. ‘남은자’(사10:20-22, 롬11:4-5)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사실을 다양한 표현과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마1:21입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천사의 고지(告知)를 인용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하니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의 특성상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나시기 전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사역적 측면을 확인하게 되는 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구약제사의 제물인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모든 인류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만을 담당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실 것임을 지적합니다. 자기 백성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온 인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백성 곧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조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예수님께만 속한 당신의 특별한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죄사역을 위해 오셨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저들의 대속물로 오셨다는 사실의 증언입니다. 눅19:10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서 그 분의 성육신 사건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제한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에로 부르신 후에 직접 하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자가 누구일까요. 온 세상 만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만민 중에 일부를 가리킵니다. 요6:37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가 아니면 예수님께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제한적 의미로 당신의 백성 곧 세상 가운데 잃어버린 특별한 백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 앞으로 나온다는 지적입니다. 양과 목자의 비유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제시되고 있습니다(요10:1-6). 모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만이 나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단의 양무리가 따로 있다는 얘깁니다. 요5:40을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께 오기를 원치 않는 일단의 무리 또한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주님의 양무리가 아닌 연고입니다. 막16:15-16에서 마가는 복음증거와 이에 따른 결과를 얘기하면서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음을 동일하게 지적합니다. 동시에 한 자리에서 같은 복음의 내용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지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제한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실질을 봅니다. 이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공효가 그들 중 일부에게만 선별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이라는 제 4 강의를 통해 재차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주신 자들만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구원에로 이끄십니다(요6:39). 여기서 구원에로 이끄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이 결국 잃어버린 자들만을 위해 제한적으로 적용될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속죄사역의 효력은 무한하기에 온 인류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속죄사역의 범위와 대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바 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 곧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이고 양보적으로 적용될 것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13:18입니다. 본 절에서 누가는 이방인들 중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있는 사실을 바울의 전도내용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기쁘신 뜻에 의해 미리 선택된 자들입니다. 선택과 구원은 약속과 성취의 구조와 동일합니다. 다시 말해 선(先) 약속이 전제되지 않으면 후(後) 성취의 내용이 있을 수 없듯이, 선(先) 선택이 있기에 후(後) 구원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행18:10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핍박으로 심히 두려워했으나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을 위로하시면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로 고린도 전도에 열심을 낼 것을 촉구하시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도 ‘내 백성’ 곧 주님의 백성이 따로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련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적용의 측면에서 결과론적으로 접근할 때 결국은 일부의 택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한 제한적 죽음이란 신학적 명제를 유발시킵니다. 따라서 제한속죄란 성경의 여러 말씀을 종합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규명해 본 결과에서 얻어진 당연한 귀결입니다. 단지 견해와 입장이 다른 반대편의 무리를 거부하고 성토하기 위해 취해진 억지발언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일부 성경 구절을 통해 ‘모든 사람(고후5:14-15)’ 이나 ‘세상(요3:16)’을 위해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으며 또한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신 것으로 기록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본(本) 절에만 제한시켜서 지엽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얼마든지 보편속죄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본문을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될 명제는 언제나 주어진 본문을 문맥과, 한 장 전체와, 나아가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 곧 구속사적 경륜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체를 통해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나름대로 코끼리의 모양이 넓은 벽 같다느니, 굵은 통나무 같다느니, 아니면 큰 부채와도 같다는 식의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가 될 위험이 다분히 있습니다. 코끼리의 다리가 마치 통나무 같이 생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마치 통나무 같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석한다면 틀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죽으신 대속적 죽음이며 세상을 위한 죽음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다른 본문을 통해 그리고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 총체적 시각으로 접근해서 본문이 말하는 의미를 명확히 해명해 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보다 확실한 내용을 통해 불확실한 부분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3.결론 우리는 제 2 강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일부의 특정한 사람들에만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차별적이라면 저들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 또한 제한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음이 당연한 논리의 귀결입니다. 더욱이 보다 많은 성경의 본문이 이를 실제로 뒷받침 해주고 있음을 위에서 확인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는 능력면에서 온 인류의 죄를 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분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시기에 말입니다(히9:14). 그러나 적용의 대상과 범위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결코 온 인류를 포함하고 있지 않음이 성경의 솔직한 증언인 사실을 봅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대속적 죽음을 담당하기 위해 속죄 양으로 오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공효가 미치는 대상을 볼진대 당신의 잃어버린 백성들 곧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그 분께 주신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결코 성경은 모든 사람이 최종적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증거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 매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임을 확실히 증거합니다(마25:41).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이 무론대소하고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 유황 불못에 처해지는 광경을 봅니다(계20:11-15). 이들은 결국 유기된 자들 곧 버려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속죄사역이 공효가 이들에게 미치지 않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죄 값으로 심판에 처해지는 것입니다. 영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주님의 속죄의 공효는 제한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만을 선별해서 유효하게 적용시키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만민 중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님의 속죄의 공효를 덧입은 자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생명으로 변환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새사람(엡2:15), 하나님의 권속(엡2:19), 천국시민(빌3:20)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주님의 생명에 함께 지체로 연합돼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어느 칭함보다도 영광스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피로 친히 값을 지불하고 사신 바 된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와 방불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유기체란 말입니다. 몸입니다. 공동체입니다. 이 몸으로서의 교회공동체의 개념을 잃으면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됩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성도의 구원을 보증해 주는 유일한 천상의 기관입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보증의 권한의 열쇠를 오직 교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소위 천국열쇠 말입니다(마16:19). 따라서 복음적 삶을 살아감이 교회를 세워나가는 첩경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며 운반하는 삶의 실질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경주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주님은 바로 세상 속에 남은자들을 위해서만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4-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통해서만 성도의 삶의 의미와 가치는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의 정당한 발휘로 정의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품성으로 닮아 가는 삶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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