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그리스도인-제임스 패커

성령론 2017. 3. 5. 23:48

'성령과 그리스도인' / 재임스 패커

 

 

이미 말한 대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 전반을 해석하는 실마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너무나 자주 우리의 결핍과 필요에만 결부시키고,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진리, 곧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이곳에 와 계시며, 그분의 변함없는 주 임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며, 예수님을 온전히 알려 주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게 만든는 진리의 관점에서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기독교 중심으로 보게 되었으니,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견해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사역을 인간 중심으로 보게 된 이유 중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개인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가장 많이 다룬 곳이 서신서이지만, 기기에는 주 예수님과의 사랑이나 예수님과 성도가 누리는 교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다. 반면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반응이 무엇인지 가장 많이 설명하고 예증한 곳이 복음서이지만, 거기에는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선 복음서는 이미 서신서의 교리들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서신서의 수신자들은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이미 친숙한 사람들이었기에,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간략하게만 언급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으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성령께서 새 언약 아래 수행하시는 변함없는 주 임무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음 몇 단락을 통해 보기로 하자.

 

새로운 출생

 

우선,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큰 변화, 즉 예수님이 '새로운 출생' 또는 '거듭남'(요3:3-8; 벧전1:23; 약1:18)이라고 비유하신 이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았다'(요3:6).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세례 요한의 세례나 기독교식 세례, 자연 출산 때의 양수처럼 성령의 내적 사역을 보완하는 외적인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 36장 25절부터 27절 말씀에서 묘사했듯이, 내적인 갱생(更生) 자체가 갖는 깨끗하게 하는 측면을 가리킨다(5절의 물이 성령의 소생시키는 활동의 한 측면만을 보여 준다면 6절에 물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이 과정을 "중생"(딛3:5)과 '새 창조'(고후5:17; 갈6:17)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할 때, 중생한 자의 삶이 변화한다고 설명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입장이다(롬6:3-11; 골2:12-1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믿음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한다. 또 그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흘린 피와 그 피가 보증하는 사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롬4:16-25, 10:8-13; 골2:12; 요3:15-21, 5:24, 6:47, 53-58). 덧붙여서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예수님에게 신뢰와 순종을 직접 표현하게 하시고(고전12:3), 우리를 당신의 몸인 교회의 지체(손발, 장기)로 삼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당신의 능력 안에서 초자연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준다. 이 모든 사실은 정확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새로운 출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뜻은 지나치게 인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그럴 수가 없다) 지나치게 안으로 굽어 있어, 우리의 모든 관심의 초점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믿는 개인에게 쏠려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두 가지 유감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첫째는, 회심할 때 특정한 감정체험(죄에 대한 엄청난 애통, 해답을 찾기 위한 엄청난 고뇌, 넘쳐나는 기쁨)을 해야 한다는 기대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런 기대는 바울, 어거스틴, 루터, 버니언, 웨슬리 같은 사람들의 잘 알려진 회심 이야기나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 기대를 잣대로 삼아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중생을 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한다. 이것은 서글프고 어리석은 일이다.

 

체험이 어느 한순간에 일어나서(우리 가운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날짜를 기억할 수 있다 해도,  회심의 체험은 하도 가지각색이라 어떠한 표준기대치에도 끼워 맞출 수가 없다. ?문에 그런 기대를 잣대로 사용하면, 종종 결과적으로 지금 거듭난 상태라는 충분한 표시가 있는 많은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다고 제쳐 놓는 반면, 오히려 한때 간증하던 회심시의 체험이 이제는 완전히 닳아 없어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중생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다. 청교도들과 청교도들과 조너선 에드워즈의 말처럼, 그 어떠한 감정 상태나 결과 혹은 개별 체험이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런 입장과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현재의 삶만이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시점에 회심했다는 확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두번째 유감스러운 결과는,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의미를 여는 열쇠가 되시는 분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단순히 우리 자신이 현재 안고 있는 몇 가지 자기중심적인 질문(어떻게 하면 내가 양심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압박받을 때 마음과 정신의 평화는? 행복은? 기쁨은? 삶에 필요한 능력은?)에 답하기 위해 불러 들이는 인물 정도로 치부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에 따르는 요구사항들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심지어 원칙적으로 그것들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드는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서 수확한 작물은, 예수님께 우드하우스(P.G. Wodehouse)의 소설에 등장하는 만능 지브즈(Jeeves) 같은 역할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필요할 때 호출해서 구세주와 보혜사로만 써먹고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여전히 중생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반쪽짜리 메시지에 오도(誤導)되어,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큰 어려움으로부터 막아 주신다고 지레짐작하여 모여들었다. 첫번째 집단은 완전히 믿음에서 떠나가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서 고목(枯木)이 되어 버린다. 두번째 집단은 큰 상처가 남는 좌절을 겪게 된다. 그들은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불행이 닥칠 때 더욱 큰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다음의 증언은 모 기독교 신문에서 임의로 인용한 내용이다. "남편과 저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로 있었는데 2살 6개월 된 아들이 사고로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주님을 위해 살아왔고, 한 영혼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4년을 멍하게 지내며 제 속의 분노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계속 강해지려고 노렸했습니다. 저는 제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정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여기서 고백한 것과 같은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이를 악무는 일 외에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양육은, 결함이 있다기보다 잔인하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대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 기대들은 다만 희망적인 생각에 불과한가. 아니면 외부요인들로부터 생겨났는가? 어쨌든 반드시 지적해야 할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경우 인간 중심이 되어 무슨 영업사원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갖는 혜택은 부풀리고 져야 할 부담은 최소화시켜서 결국 새신자들이 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사고 자체를 고정시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이처럼 지나친 나머지 해롭기 그지없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새 언약 사역과 보조를 맞추는 법을 배우고, 구원자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모범이요 앞으로 오실 심판자이시고, 약하고 가난하며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연인이시며, 친히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면 된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 때에 전형적인 체험을 겪는다는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과거의 회심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현재의 회심한 상태 뿐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의 체험만을 따로 떼어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표시라고 여기는 습관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육신한 하나님께서 찬양과 섬김을 통해 온전히 경배받으셔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주 예수를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도록 대기시킨다 불경한 생각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리차드 백스터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안내하셔서 통과하게 하시는 어두운 방들은 그분께서 친히 통과하셨던 방들보다 결코 어둡지 않다"라고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길은 죽음을 경험한 뒤에 부활을 체험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리라고 기대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징밋빛 환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를 읽되, 특별히 사복음서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안일한 견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를 연구하면서 우리 주님을 계속해서 선명하게 바라보고, 우리 머릿속에 '예수님에 대한 제자도'라는 관계의 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도에 대한 교리가 제일 잘 설명된 곳은 서신서이지만, 제자도의 본질이 가장 생생하게 그려진 곳은 복음서이다.

 

그런데 복음서보다 서신서를 더 좋아하고, 복음서를 졸업하고 서신서로 입문하는 것이 무슨 영적 성장의 표시라도 되는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한데, 이러한 행태는 우리가 주 예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보다 신학적인 개념에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이 아닐까. 무엇보다 우리는 서신서의 신학이야말로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제자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종종 지적했듯이, 복음서는 지상에서 가장 놀라운 책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말한 잘못된 생각들을 모두 바로잡는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소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어떤 진리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는다'(행2:38; 갈3:2)는 진리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기본이다. 이렇게 받은 성령은 "보증" 즉, 신자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표시이다(고후1:22; 엡1:13). 그 이후로 성령은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롬8:11). 다시 말하면 성령은 유숙객과 같아서, 성령이 거하시는 신자의 마음속과 그의 삶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 성령께서는 '은혜롭고 주도적인 손님'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변화의 주도자로 활동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더욱 닮아 '점점 더 큰 영광에'(고후3:18) 이르게 하신다. 여기서 독창적인 주장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통상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바로 성화(聖化)이다. 성화의 길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령을 좇아 행하"(갈5:16)는 길이다. 성화의 길을 간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몸과 마음의 악한 욕심)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본 받는 아홉 가지 목록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허용해 드린다는 뜻이다(22,23). 성화의 삶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겸손, 사랑 그리고 죄를 피하고 의를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는 것(요13:12-15,34,35, 15:12,13; 엡5:1,2; 빌2:5-8; 벧전2:21-25; 히12:1-4)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성화란 당신이 말씀한 대로 행하는 일이라고 계속 정의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요약하신다(막12:29-31; 눅10:25-37). 어쨌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입장을 잘 정리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의 삶이 갖는 체험적 측면(지적.의지적.규율적 측면과 별개로)이 주제가 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생소한 영역으로 옮겨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 지각',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한성,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 등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도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각은, 오늘날보다 과거에 훨씬 더 잘 이해하던 영역이다. 이 분야에서 우리는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지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 무방하리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직접 지각'은 생겨날 수 없으며, 성경적 기준이 없으면 그러한 지각을 식별할 수가 없고, 성경적 신학이 없으면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지각 자체는 돌발적이고 주권적이다.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어서 요구하거나 예측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생겨난다. 통상(여기서는 모든 것이 개인별 맞춤이기 때문에, 이 단어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지각을 주시며, 그것은 그러한 신자에게 성부와 성자가 찾아와 함께 거하고 자신들을 나타내 보이시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요14:18,20-23)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지각('체험'보다는 이렇게 부르는 편이 낫다. 물론 우리가 '체험'이라고 할 때 바로 이러한 직접 지각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제임스 패커의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발췌(93-101p)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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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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