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부흥을 위해 ‘비상한 기도’가 필요”
성령론 2017. 6. 22. 23:25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부흥을 위해 ‘비상한 기도’가 필요”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두 차례에 걸쳐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한국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부흥이다. 그런데 최근 40년이 넘도록 부흥이 임한 적이 없다. 그러니 1907년, 1920년, 1932년, 1950-53년, 1973-84년 부흥이후에는 부흥이 없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우리가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부흥을 외치던 사람들이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올인 하는 바람에 영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부흥을 위해 성령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데, 부흥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력을 잃어버린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혜를 받고 부흥을 놓고 기도하자고 하는데 부흥이 임하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교인들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교인들의 생각에 답변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개별적로 개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사도행전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에 보면 성령충만을 다 받았다. 부흥이 임하면 공동체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성령이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기에 성경에 있는 성령의 약속들이 더 깊이 있게 내 삶에 체험되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이다. 성령은 공동체적으로 부흥을 주시기도 하지만 개별적으로 당신들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역할을 성령께서는 동시에 하신다. 두 개가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성령이 부으시면 개별적으로 성령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역동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개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끓임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 하나님과 동행해서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34-36년과 1740-42년 두 번의 부흥의 파장을 경험했다. 어느 날 보니 부흥이 썰물처럼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언약서명서를 받아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서 부흥이 떠나지 않고 오래지속하기를 원해서 그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엄청나게 일어났는데 7월부터는 어떻게 하면 부흥에 대한 조짐이 이렇게 사라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거의 없는 것이 저는 궁금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했다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부흥을 거두어 가신 것처럼 부흥이 사라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고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부흥을 원한다고 해서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부흥이 가장 지속적으로 임했던 때는 1901-1910년으로 부흥의 계절이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 1905년 인도 카스 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908년 중국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 등 이때만큼이나 부흥의 시즌이 지속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연속된 적이 없다.
혹시 이런 부흥들이 조직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당시 공통적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흥을 사모하는 목마름의 기도를 하는 무리들이 그때만큼 일어난 적이 없었다. 성령께서 네트워크를 가지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이 전세계적으로 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는 곳 마다 공동적인 것이 기도이다. 목마른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이다. 목마른 기도의 사모함이 없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7년에 쓴 <겸손한 시도>에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부흥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는 말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상한 기도’, ‘특별한 기도’라고 표현했다. 부흥을 놓고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 기도는 정기적인 집회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부흥만을 놓고 특별하게 시간을 정해서 하는 기도이다. 부흥을 위해 그런 기도가 있어야 한다.
카이스트의 부흥이라고 들어보았는가. 2005년에 생전에 처음 경험한 것이다. 대전 카이스트 집회를 인도하고 함께 기도하자고 9시 반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회개기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새벽 1시까지 진행됐다. 개입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진행될 기도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일 집회가 계속 남아있고 수업도 있는데 여기서 끝내자고 했다. 참된 부흥은 이런 진정한 회개가 가십거리가 아닌 오히려 거룩한 결실을 맺는 것이다. 담당자에게서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사례비를 못 드려 죄송하지만 드리는 것이 결례인 것 같아서 드리지 않았다. 오늘 집회가 교수님에게 선물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너무 멋진 말이다. 생전에 이렇게 멋진 사례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집회를 놓고 기도한 사람이 있었다며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지난 6개월간 집회를 위해 저녁 9시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후에 카이스트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가 없는 부흥은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부흥을 놓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은 하나님이 주권적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지금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1995년 휘튼대학 내에 일어났으며, 2006년 2월에는 에즈베리에서 10월에는 인도 카시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2005년 12월에 카이스트에서 일어났던 것도 작은 부흥이라고 여긴다. 부흥을 옛날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가 직접 부흥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예상하지 않게 은혜를 경험했다. 인도에서 에즈베리에서 부흥의 현장을 직접 보았다. 부흥이 힘차게 일어나고 있을 때 부흥운동을 보는 것이 저로서는 큰 축복이다. 지금도 부흥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부흥을 이야기할 때 조심스럽지만 북한을 이야기하고 싶다. 북한에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3년 전에 14만이라고 한다. 적으면 9만 많으면 18만, 평균 14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14만이라는 숫자가 북한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숫자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AD 30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50년 후에 로마제국 전체에 예수 믿는 사람숫자가 14만이었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일어나고 1910년 한반도 전역에 전체 장로교인의 숫자가 14만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예수 믿는 14만 명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마치 카타쿰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처럼 어둠의 땅 북한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14만 명이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는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북한은 이미 통일될 준비가 되었는데 남한이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있는 14만 명이 북한 전체를 복음화시킬 수 있는 정예요원들이 다 되는 것이다. 오히려 남한이 준비가 안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부흥운동의 목표는 ‘선교’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마다 늘 선교가 일어났다. 오순절 부흥이 일어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서 선교가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제주선교가 시작됐다. 1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북미원주민 선교가, 2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부흥이 늘 일어날 때마다 결과는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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