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성령론 2017. 6. 22. 23:23

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오전 10시).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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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는 평양대부흥 연구이후 세계부흥운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세계 32군데 부흥현장을 다니며 <세계부흥운동사>를 출간하고 석박사 과정을 위한 강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 교수들은 5년마다 강의 주제를 바꾸는데 박용규 교수의 가슴에는 부흥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부흥운동을 연구하며 깨닫아지는 은혜와 부흥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어 목회자들과의 세미나를 통해 이를 전하고 있다. “부흥을 위해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박용규 교수는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2003년부터 매달 17개 신학교 교수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기도회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동안 조용히 개교회 목회를 하고 있던 뉴욕영락교회 최호섭 목사도 뉴욕과 미주교계의 부흥을 위해 적극 나서며 세미나의 자리를 주선했으며, 박용규 교수와의 8주 연속 부흥에 대한 나눔과 기도모임을 통해 총체적인 난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자고 부탁했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총신하면 칼빈 신학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에 성령에 대해 그렇게 역동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제가 개혁주의 관점에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해 정말 칼빈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개혁주의 전통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3대 칼빈주의자중 한 명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이 총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을 미친 신학이 오늘날 한국의 총신의 신학이라고 알려졌는데 제가 연구해 본 결과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성령론이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는데 너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실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성령론을 보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영원히 나온다"라고 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령론이 제대로 개혁주의 성령론의 핵심을 잘 집어주고 있는데 이 부분들이 개혁주의 영역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부흥운동사를 연구하고 다음에 성경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부흥을 그렇게 살펴보면서 왜 한국교회 안에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부족할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나누는 것이 제 부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 - 사도행전 2:33

 

사도행전 2:33이 사도행전과 부흥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을 주목한다. 물론 행 1:8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성결구절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행 2:33 구절이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베드로가 해석한 것이다. 베드로가 해석하면서 부어주셨다는 것은 오순절 사건을 가르치는 부분이다. 베드로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오순절에 모인 사람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사도행전 2:17-18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에서 “부어 주리니”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2:33 말씀에서 오순절의 사건을 가르쳐 ‘부어 주셨다’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2:33절 ‘부어 주셨다’는 표현은 사도행전 2:17-18 베드로가 한 이야기이고, 베드로는 요엘서 2:28-29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다. 사도행전 2:33 말씀을 깊이 살펴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약속하신 성령"

 

중요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사도행전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을 보면 오순절의 성령을 가르쳐 아버지의 약속으로 표현한다.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이 아버지의 약속이고, 동시에 아들의 약속이고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엘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사도행전 2:33에는 성령을 가르쳐서 약속하신 성령이라고 했는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주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반복적으로 약속하셨다. 성령은 주님이 하신 약속이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이다.

 

2.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표현이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기 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후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다.

 

예수님이 이미 자기가 영광을 받으실 것은 예언하셨다. 높아지심은 주님이 하신 예언의 약속이다. 누가복음 22: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을 보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둘로 나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다. 낮아지심은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이다. 높아지심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예수님이 높아지심이다. 이것을 사도행전 2:33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사건이 있어야 오순절 성령감림의 사건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이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F F 브루스는 사도행전 주석을 통해 “부활후 예수는 지극히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그 성령을 땅위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부어주신다. 그리고 베드로의 모든 청중들이 바로 이러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나타난 외적인 표적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했다. 

 

예수님도 영광을 받아야 성령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7:3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감림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33에 이 표현이 성령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왜 예수님의 부활이후에 있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다.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왕자에 앉히시기 전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것을 연기하신 것"이다.

 

세대주의자와 개혁주의의 차이는 세대주의자들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주장한다. 십계명은 구약에 따르는 것이고 신약에는 은혜의 복음이라고 둘을 구분한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언약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다 구원을 받지만 견해차이가 있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으로 받았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몰랐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이 없다. 유학시절에 공부하면서 투쟁을 했다. 책을 보니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도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통일성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복음이 아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세대주의자들도 동의한다.

 

세대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중생이 없이 구원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중생의 은혜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다윗과 사울의 예를 들어 구약에는 성령이 들어갔다 나왔다고 한다고 말한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구원의 통일성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신약에 있어서는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것이지, 구약에는 성령은 들어갔다나왔다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비 비 워필드의 책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구약도 성령의 역사 없이 구약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신약에도 성령의 역사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과의 성령의 역사가 구원에 있어서 같다면, 오순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성령이 역사하셨다고 하면 오순절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3-1.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부어 주셨다’는 것은 구약에는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구약에 없었던 사건이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성취된 것이다. 부으심의 사건을 요엘서는 'will'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성령이 부으실 것을 미래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견해준다. 사도행전 2:17-18절에도 ‘will’ 즉 미래로 표현한다.

 

그런데 사도행전 2:33을 보면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현재완료이다. 구약에 예언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현재완료형이다.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현재완료형을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마가의 다박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을 이미 시제가 보여주고 있다.

 

사도행전 2:33에 ‘받았다(has received)’도 현재완료형으로 나온다. 한 번만 받은 것이 아니라 계속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버지께 성령을 계속 받으셔서 계속 부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것이다. 이 부분을 발견하고 나서 사도행전을 보면서 개혁주의 성령론에 대한 바른 정리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베드로가 부어주셨다고 증언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두고 한 표현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사도행전 2:17-18)라고 베드로가 증언한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에 약속되어 있지만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이 부으심은 구약에도 없었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심지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실 때도 성령의 부으심이 없었다.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에야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이 일어난 것이다. 이 부으심은 오순절에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존 칼빈은 "성령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좌에 앉히시기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일을 연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바와 같이 '부어 주리라'는 말로 잘 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어주시는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며, 처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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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되는 증거

 

세미나의 키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부어 주신다’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부어 주시는 것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에게만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약에도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 하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역사 하셨다.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계속된다는 것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사도행전 2:17-18을 보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남종과 여종,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120문도에게만 그 같은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했다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 그것도 말세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120명으로 끝나면 예언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다.

 

F F 브루스가 사도행전 주석에서 말대로 "분명히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을 다 성취시켰다고 불 수 없으며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시작이라는 것은 성취가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어떠냐에 따라 성령을 사모하고 간절히 간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성령의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늘 분문의 "받아서"라는 말과 "부어주리라"는 말의 시제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여기 ‘받아서(receive)’라는 말은 현재 완료형(has received)으로 쓰였다. 쭉 일어난 사건을 말할 때 현재 완료형을 사용한다. 과거 한번 일어난 것이라면 시제를 과거로 사용해야 한다.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도 현재완료이다. 현재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성령의 부으심이 과거에 일어난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는 연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기 때문에 현재완료형을 사용한 것이다.

 

셋째,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약속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립된 사람이 구하면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관계가 정립되었다면 구원받은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을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굉장한 약속이다.

 

넷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에도 나타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을 보면 ‘proceeding’이 진행형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나오는 것이다. 성령을 구하면 구하는 자에게 임하신다는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지원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다.

 

다섯째, 성령의 부으심이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순절 날 일어난 성령의 부어주심의 역사가 사도행전에 다시 나타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하면서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한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은 사도행전의 2장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 사건이다.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과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고 베드로가 증언해 준 것이다.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을 보면 베드로가 마가 다박방과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두 번의 성령의 부으심 사건을 보고 생각났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부으신 사건은 이방선교의 장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취이고,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날까지 이방인들을 국외자로서 자기 백성으로 부터 구별하셨지만 이제 그들을 동일한 사랑 가운데 포옹해주시며 그들을 동일한 영예의 자리에 높여 주셨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구원에 이른 것처럼 이방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이방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준해주시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의 주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사도행전 11:17-18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주시는 사건을 증언하니 더 이상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방선교를 예루살렘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방인에게 부어주신 심벌이다. 앞으로 이 땅에 계속해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성령의 부어주심을 예견하는 것이다.

 

여섯째, 지난 2천년여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의했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 운동, 평양 대부흥운동, 웨일즈 대부흥운동 등 성령의 부으심이 계속되었다. 

 

사도행전 2:33은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이다. 이 부분을 분명히 이해하면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흥을 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곧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한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을 다르게 이해한다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한다면 목양의 현장에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목양의 현장에 성령께서 구원의 역사를 하신 것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4.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간절한 열망

 

조나단 에드워즈는 <겸손한 시도(An Humble Attempt,1747)>에서 ‘성령은 모든 축복중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성령은 축복의 총화’라고 표현했다. 또 "성경은 전반적으로 그 밖의 모든 것들보다 성령을 위해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교회가 말세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과 그것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위해 대단히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말씀한다"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인과 교회는 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지만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을 놓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는 말은 성령의 부으심이 기도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말세’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도행전 2:17에도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나온다. 성령의 부으심은 말세에 일어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는 초림하시고 재림할 때까지 말세라고 한다. 초림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이 땅에 많아 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매우 위대한 무엇을 성취하시려면 에스겔 36장 37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그 일보다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는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 (슥 12:10)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부으시기 전에 간절한 사모하는 기도의 영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무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함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길을 찾았다. 칼빈이 저에게 위대한 도전을 주었다면 칼빈과 현대를 연결해주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한다.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 신학적인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가. 성령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연구를 했겠는가. 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또 성령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으로 누가복음 11:13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을 말씀했다. 

 

성령은 부흥을 주시는 영이시지만 동시에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하시고, 죄를 미워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영이시다. 로마서 8:26에는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악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신다.

 

맺는 말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구분해 주는 사건이다.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은 물론이고 예수님 당시에도 없었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사건이다. 신약교회가 태동된 사건이다. 교회는 성령이 이끄는 교회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120문도에 임했고, 이후에도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F. F. 브루스의 표현대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의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언은 '성령의 부으심'이 바로 부흥이다. 또 이 성령의 부으심,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지 않고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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