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창조

성령론 2017. 8. 18. 21:41

제2장 성령과 창조 / 에드윈 H. 파머


성령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항상 실제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욕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의 위대함을 인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증진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이루도록 하려면 오직 성령을 그 모든 행하심에 있어서 분명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이 성령은 누구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혼미(昏迷)할 때, 우리는 성령을 완전히 영화롭게 할 수 없으며, 우리 안에서의 그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의 역사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역사를 신도들의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흔히 우리의 좁은 생각에서, 구원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로 생각함으로 인해 인간의 죄, 영원한 정죄 및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필요성, 이렇게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게 그칠 때,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주로 인간 중심이어서 거의 구원이나, 기도, 성경 읽기, 안식일과 기도회에 관한 일들에만 관심을 두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입장을 취한다면 자연히 인간과 자신의 신앙 체험의 관점에서 성령을 생각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 성령의 행하심도 그것에 국한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인간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시적하였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다. 성경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영원에서 영원까지 또한 주일과 주일 사이 엿새에까지도 그를 등장시킨다. 그는 인생의 어느 한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만물 위에, 절대적으로 만물 위에 곧 우주 안에서 절대적인 통치자이다. 이에 따라 성령의 역사도 유독 성화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는 세상의 창조와 섭리, 계시, 성육, 대속, 성화, 그리고 심판 날까지의 사건들에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참여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성령의 중생과 성화에서의 역사에만 우리 생각을 국한시키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그것은 성령의 성화의 사역만을 논구(論究)함이 아니요, 그의 전반적인 역사를 논구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창조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의 역사(役事)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의 각 위는 독자적인 기능과 역사를 수행하신다. 예를 들면, 창조에 관해서는 아들이나 성령이 아니고 주로 아버지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외치심으로 스스로를 아버지와 구별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성화나 우리 안에서의 구원의 사역에 관하여 생각할 때는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주로 성령을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신자 안에 거하시는 분이다. 사실상 이러한 구별을 소홀히 한 때문에 어떤 이는 근심 걱정을 가지고 위로받기 위하여 보혜사이신 성령께 갈 줄을 모르고 아버지나 아들을 찾아간다. 동시에 삼위를 분리해서 생각지 않아야 되는 데도 일리가 있다. 우리는 주로 아버지를 창조주로 생각하지만 삼위의 근본적, 필연적 일체성 때문에 역시 아들과 성령께서도 창조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아들임은 자명하나 어느 의미로는 아버지도 거기 함께 계셨다고 할 수 있으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예수께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는 분이 성령이심을 주장함도 충분히 성경적이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에게 관하여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 14:23)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사실들은 삼위께서 각기 구별되시면서 또한 셋이 하나인 근본적인 일체성이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단순한 이유로 참(to be true)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특히 창조에 관한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삼위 간의 근본적인 통일성의 균형을, 우리가 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 균형을 우리 눈앞에 항상 유지해 둬야 한다. 우리는 삼위께서 각기 온전히 홀로 행동할 수 있는 듯이 분리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단지 성경대로 그 각각의 특성과 사역을 살펴볼 수는 있겠다. 대체로 성경은, 삼위일체의 역사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르름을 보여 준다. 아버지는 창안하시고, 아들은 집행하시고, 성령은 완수하신다. 예를 들면- 구속(救贖)의 경우,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요 3:16) 분은 하나님이시다. 에베소서 1:3-5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성경은, 선택의 사랑은 아들이나 성령으로부터가 아니고 "아버지께로부터"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구속을 이루신 분은 아들이시다.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고 아들이었다. 이와 같이 구속은 "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구속을 성도들의 생명에 적용하고 완수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구속은 "성령에 이르러" 완성된다. 그래서 구속의 사역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구속에서 보는 바와 같은 구별을 창조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창조된 우주도 아버지로부터,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성경은 삼위일체의 각 위께서 창조의 역사에 동일한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셨음을 가리킨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고전 8:6)라 했다. 만물의 존재가 아버지 "에게서"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아"인 점에 주목할지니 아버지는 만물의 근원이요, 아들은 이 재료를 사용하여 세상을 구성하였음을 뜻한다. 로마서 11:36엔 비슷한 모양으로 세 개의 다른 전치사를 사용하여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하였고, 히브리서 1:1-2도 같은 조(調)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1장과 골로새 1장에도 세상은 "아들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창조되었음을 말했다. 이 외에 성경은,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완성시키시는 분임을 언급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저서 [성령]에서, 우주 창조를 왕국 건축에 비유하여 왕은 궁전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고 청부인은 실지로 건물 짓는 일을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즉, 창조에서 아버지는 왕처럼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해 내는 만물의 근원이며, 아들은 그 청부인같이 그 재료로써 구성하시고, 성령은 아들이 성취해 놓은 것에 더 손을 보아, 그 잠세력(潛勢力)을 끌어내고 제 성질에 따라 발전하도록 함으로 완성시키신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이상의 모든 것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삼위 간의 통일성이 그 저변에 있음을 기억하고 각각의 활동을 분리시키지 말아서 어떤 의미로는 삼위 모두가 동시에 구속과 창조에 활동하셨다고 해야 한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적 계시가 허락하는 한에서 우리는 삼위의 역사에 관한 이해와 기술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2.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

 

우리의 사고(思考)를 위한 배경으로서 이만큼 삼위 간의 구별을 가지고서, 우리는 이제 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성경이 더욱 직접적으로 말하는 바를 살피기로 하자. 적어도 이 역사의 다섯 가지 다른 면을 얘기할 수 있다.

 

(1)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

 

성령의 역사가 무(無)에서 세상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그의 역사는 그 후에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1,2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즉, 무로부터의 우주 창조가 있은 후에야 성령께서 활동하셨음을 말한다. 이는 아버지께서 삼위일체 안에서도 아들과 성령의 "근원과 원천"이시며, 또한 무에서 물질적 우주를 창조하시므로, 그 "근원과 원천"이심을, 그리고 그 후에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여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일정한 질서를 수립하셨음을 뜻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고, 곧 알게 되겠지만 다만 세상에 이미 있던 잠세력(潛勢力)을 끌어내었고, 생명의 씨와 유아(幼芽)를 심었다.

 

(2) 시편 33:6과 욥기 26:13

 

성령의 완성하시는 일을 이번에는 하늘의 단장(丹粧)에 있어서 달리 가리킨다. 시편 저자는 33:6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말한다. 앞 장에서 본 것같이 영은 숨을 뜻하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리어져 나왔다(발생). 그러므로 이 시편의 입 기운은 성령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곧 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시고 성령은 하늘의 만군(萬軍),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지으셨음을 뜻한다. 욥기 26:13은 성령께서 만군을 창조하셨다고 꼭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입김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여기 '단장'은 개역 성경대로임-편집자 주)라고 했으니 '단장하다'는 '곱게 하다', '빛나게 하다', '아름답게 하다'는 뜻이므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하늘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모는 바와 같은 성좌(星座), 은하(銀河), 햇빛을 반사하는 유성(遊星), 여러 가지 별빛, 달의 그 크고 그 빛의 불변함, 그리고 빛나는 햇빛을 아름답게 꾸미었음을 우리는 추론할 수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 1:2이 성령께서 이미 창조된 세상을 완성시켰음을 시사한 것같이 여기에서 성령께서 하늘에 마지막 가필(加筆)을 던져 천체군(天體群)에 가능했던 온 영광과 미(美)를 이끌어 냈음을 엿볼 수 있다.

 

(3) 시 104편[A]

 

이 시편에서는 성령의 창조 활동의 또 다른 면, 곧 새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한 이 아름다운 시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하나님께 돌리며 그가 만물을 통어(通御)하시고 만물은 그에게 의존한다고 선언한다. 들나귀는 하나님이 만드신 샘에서 목을 축이고, 가축은 하나님이 자라게 한 풀을 먹으며, 새들은 하나님이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에 깃들며, 포효하는 사자가 그에게 먹이를 구하며 심지어 바다의 악어까지도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기를 기다린다. 크고 작은 모든 짐승과 생물들이 그들의 생존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이 시인은 2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요, 더 구체적으로는 성령이시니 이 시인은 30절에 이렇게 계속한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모든 동물 곧 잣나무의 황새들, 산의 산양들, 대해의 악어들 및 수많은 어류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성령임을 지시한다.

그래서 성령은 창세기 1장과 욥기 26:13에서 본 바와 일치하게 성령의 창조 활동을 무에서 무엇을 창조하는 방향에서가 아니고, 이미 창조된 것에 생명을 나눠 주는 데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4) 시 104편 [B]

초목까지도 그 생명을 성령에게서 얻음을 암시한다. 방금 인용하였던 30절을 다시 살펴보자.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 끝마디에서 땅을 새롭게 하는 분이 성령이심을 분명히 말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주의 영(성령)이라고 언급된 본 절의 첫마디와 이 끝마디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곧 알게 되겠지만, 그가 사람에게와 또 동물에게 생명을 주시며 또한 대체로 그의 역사가 창안자의 일이 아니라, 완성자로서의 일인 것들로 보아 땅을 새롭게 하는 분도 역시 성령이시라고 추론하여도 안전한 듯하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는, 비록 인간의 타락 후 모든 창조물에 죽음의 씨가 거기 깃들어 있어 초목이나 짐승이나 사람은 결국 다 죽는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성령의 계속적인 창조 활동에 의하여 이 파멸과 죽음의 과정이 제지되고 대신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는 새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명을 줄 뿐 아니라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함으로써 땅을 새롭게 하신다. 생명을 지닌 씨앗은 제철을 따라 자라게 만들어졌으니 겨울의 죽은 것 같음이 지나면 새 생명이 싹터서 땅은 새롭게 된다. 이로 보건대, 초목의 생명까지도 창세 때나 지금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출되고 있다.

(5) 성령의 창조 역사의 절정(絶頂)

예나 이제나 인간의 창조 역사가 성령의 창조 역사의 절정이다. 엘리후의 말은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물론 기운은 성령의 다른 호칭이니, 이 절은 인간 창조에서 성령의 이름을 두 번 지명하고 있다. 성령의 독특한 창조적 기능은 생명을 주는 것인 듯하며, 그가 반드시 질료(質料)를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흙을 취하여 그 속에 생명의 기식(氣息)을 불어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창세기 2:7의 인간 창조에 관한 기사를 주목하면 흥미롭다. 사람의 창조를 "하나님이...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말로 묘사하여 생기를 불어넣다는 말들을 사용하였는데 전자(생기)는 성령의 이름이요, 후자(불어넣음)는 그를 포함하였다. 욥기 33:4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분은 삼위일체의 제삼위임을 분명히 진술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창세기 2:7도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주시는 분은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분명한 암시를 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람으로서 창조하는 책임을 진 분은 성령이시다. 사람은 단순히 동물이 된 것이 아니요, 산 영혼(생령)이 되었다. 성령은 사람에게 그의 이성적, 도덕적 존재됨을 허락하셨다. 사람이 마음과 의지와 정서를 가지도록 그를 만드신 분이 그분이다. 욥기 32:8은 이것을 일부분 확증한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그리고 인간을 선하고, 정직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분이 또한 성령이시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창조 역사의 다섯 가지 현저한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비록 우리가 삼위일체의 그 일체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되지만, 그러나 각 위(位)에게 성경이 돌리는 독특한 기능을 돌릴 수 있고 또 돌려야 한다. 추운 겨울 밤, 우리가 캄캄한 하늘에 항상 낯익은 북두칠성, 힘센 사냥꾼인 빛나는 오리온 성좌, 또 가냘픈 묘성, 빨간 방랑자 화성이나 북십자성, 허연 은하수를 볼 때는 하늘을 단장시킨 성령을 찬양하자! 봄이 와서 밀이 싹트고 오랑캐꽃 피고, 산딸기나무 꽃이 필 때에는 지면을 새롭게 하시는 이가 성령임을 기억하자. 농어를 잡고 들에 뛰노는 사슴을 볼 때, 또 빨간 대머리의 딱따구리를 지켜볼 때는 시 104:29, 30을 기억하라.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엄마, 아빠로서 내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흥분 속에 듣게 될 때 앞에 언급한 엘리후의 말을 상기하라.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영)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이런 것들은 성령의 활동의 결과이다. 그러니 이들을 인하여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3. 재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

 

여기 또한 빠뜨려서는 안 될 성령의 마지막 창조 활동이 있으니 그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의 그의 재창조의 역사이다. 이는 다음 장들에서 더 충분히 논하겠지만 창조에 관한 성령의 역사의 전반적 묘사를 위하여 여기에 말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성령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또한 그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지식을 주셨으나 인간은 자유 의지의 남용(불순종)으로 그의 본래의 올바른 높은 신분에서 떨어졌다. 그는 영적으로 훼손되고, 흠이 나고, 상하고 찢기고, 필경 죽게 되었다. 그는 참 지식과 거룩한 성향을 상실했다. 성령께서 그를 지어 주신 원래의 형상은 이미 파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 버려두지 아니하셨다. 애당초 인간을 의롭고 거룩하게 만든 그분, 성령으로 하여금 사람을 재창조하셨다. 성령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다(고후 5:17). 그가 사람을 새로 만드시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로 지으셨다. 그가 인간 속에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시고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입은(엡 4:24, 골 3:10) 새 사람을 심음으로써 그를 새롭게 하셨다.

 

성령에 의한 인간의 처음 창조와 이 재창조 사이의 유사성(類似性)을 주목하라. 성령은 아담에게 흠 없는 의를 주셨다. 그와 같이 재창조에 있어서도 성령은 인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아담의 의보다 더 좋다. 아담의 것은 잃어버릴 수 있었고, 실제로 잃어버린 데 비하여, 이것은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 창조에서 성령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거룩하게 만든 것같이 두 번째 창조에서도 성령은 인간을 중생과 성화에 의하여 인격적으로 거룩하게 지으신다.

 

또 주목할 것은 세상의 창조에 있어서, 성령께서 무에서 창조해 내지 않고 혼돈하고, 공허하며, 생명이 없고 정체한 흑암의 땅에 "수면에 운행하심"으로 생명과 질서와 미를 부여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에 있어서도, 죄 많은 인간을 멸하고서 무에서 새 사람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전혀 새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창조에서처럼, 이미 존재하는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것을 취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령한 생명을 나눠 줌으로, 사람의 그 영혼 안에 새 성향을 주어 그로 처음 창조 시와 같이 거룩하고 의롭고 진리로 충만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창조 시에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산 영(생령)이 된 것같이 또한 재창조에서도, 성령께서 그 생기를 그리스도의 교회 위에 불어넣음으로 사람이 영적으로 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성령의 창조의 역사는 영육(靈肉) 양 영역에 걸쳐 포괄적이다. 그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창조 시에 시작해서 인간의 재창조까지 포함하여 오늘까지 계속된다. 이 책의 목적은 성령께서 처음으로, 또는 항상 우리 안에서 의와 거룩함을 새롭게 창조하여 주는 창조주이심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데 있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33-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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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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