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물리학과 학생은 냉장고의 부피가 코끼리의 부피보다 작기 때문에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기계공학과 학생은 냉장고를 코끼리보다 큰 것으로 특별제작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식품가공학과 학생은 코끼리를 토막 내어서 조림가공을 해서 부피를 최소화한 다음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육사생도는 냉장고 앞에 코끼리를 세워놓고 명령합니다. “들어 갓!” 

부자청년(또는 부자관원)이 영생을 얻고자 하나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 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19장, 마가복음 10장,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청년이 돌아간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랐던 것처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또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이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돈, 재물이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돈 없는 것, 가난한 것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고 저주와도 같은 것입니다. 돈 때문에 도적질하고 빼앗고 다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돈은 말도 히죽 웃게 만들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3세기 때 중동지역과 이집트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가 흥왕할 때 (7세기에 이슬람이 생기기 전까지 중동지방은 기독교 지역이었습니다) 안토니인지 혹은 안토니우스(Anthony, Antonius)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바로 이 말씀을 듣고 나서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옷 한 벌만 가지고 사막, 광야에서 수도하였습니다. 친구들이 1년에 두 차례씩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음식을 소금과 함께 먹고 포도주도 안 마시고 물만 마셨으며 1년에 한 번 부활절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깎거나 빗지도 않았고 물론 목욕을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기둥에 올라가서 수도하여 ‘기둥성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하였습니다. 가난한 성자들, 맨발의 성자들... 이러한 신앙생활의 행태가 나중 유럽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이라든지, 프란시스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16절을 보면 이 사람이 주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영생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아니 영생이 무슨 선한 일과 맞바꾸는 상품입니까?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것은 돈을 주고 사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죄인은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과나무에서 무엇이 열립니까? 사과가 열립니다. 다른 것이 열릴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서 무엇이 납니까? 죄가 납니다. 다른 것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청년은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아, 주님께서도 율법을,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하셨구나.” 그러나 이것은 잘못 생각입니다. 지금 이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까? 이 청년은 지금 가슴이 허전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양심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아십니다. 이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님을,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이라 한 것같이 악한 인간이 계명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그 악한 본성을 덮는 가식적 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인간은 다 악하다는 것을, 계명으로 고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렇습니다. 영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바로 생명입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온전하려면, 영생을 원한다면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네가 가진 재물을,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비극은 그것이었습니다. 등에 진 재물을 내려놓지 못 해 낙타가 된 것입니다. 그 재물, 그 짐을 내려놓고 영생이신 주님을 따르면 될 것을...... 

그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생명의 주로 믿느냐?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려고 온 하나님인 것을 믿느냐?” 
이 물음에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주님은 이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고백이라면 당신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내려놓아야 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결코 세상 것을 내려놓지 못 하는 낙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되신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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