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 초기, 당시의 시장에 모여든 서민들. 누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할꼬?

2009년 9월 이라는 시점에서 아멘넷을 드나드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해준 그들에게도 누군가가 복음을 전달해 주었을 것이고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달된  뿌리를  찾아가는 귀한 여행을 같이 시작하기를 원한다.

1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소래 교회와 서상륜,서경조 형제

소래교회를 세운 장본인은 서상륜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장수를 하던 사람이었다. 순조롭게 매약행상을 하던 그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 것은 30세 되던 1878년이었다. 만주에서 인삼을 팔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소식을 듣고 고향친구 몇명이 달려와 그를 현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로스 선교사(John Ross)다. 또 그곳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킨타이어 선교사(John MacIntyre)의 끈질긴 전도도 받게 된다.

당시 서상륜의 병세는 매우 위독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로스 선교사는 ’서상륜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그는 결국 병이 완치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다. 여러달 동안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로 완쾌되자, 그는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그는 당장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현재 우리가 로스역(譯)성경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서상륜을 비롯한 여러 한국인 신자들의 힘이 합쳐져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1904년 국내에 입국한 와그너 선교사(Ellasue Wagner)도 로스역 성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로스 번역이라는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서씨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지 않은가? 로스 목사가 어려운 한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가졌을 것 같지 않다. 합리적 결론은 ’로스 번역’은 이들 한국 청년들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1883년 그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조선왕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기독교가 인정된 것은 후에 의료선교사 알렌이 고종의 시의가 되고 나서부터다. 하지만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채 탈출한 그는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의 본래 이름은 ’솔샘’이었다고 한다. 소나무와 샘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솔샘의 한문표기는 松泉(송천), 후에 일본인들에 의해 송천이 솔내(松川)가 되고, 다시 음운현상에 의해 ’소래’로 바뀐 것이다. 소래는 결코 번화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평화로우면서도 농사를 지을 물이 풍부해 곡식이 잘 열리는 풍요로운 고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래에 터전을 마련한 서상륜은 곧 만주의 로스에게 연락해 성경 6,000권을 선편(船便)으로 전해 받고,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나섰다. 얼마 안있어 20명의 세례지망자가 생겼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들이 기도할 장소였다.

일반적으로 소래교회의 시작은 산간 구석에 세워진 초라한 초가집에서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리 관청의 눈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마을이지만, 국금(國禁)에 속하는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남의 눈을 피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세는 이미 바뀌어 버렸다. 기독교는 급속히 전파됐다. 고종은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알렌(H. N. Allen)은 고종이 기독교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조선 땅에 최초로 내한 한(1884년 4월 5일) 정식 선교사로 기록된다. 1896년 7월 25일에는 한국교회가 고종탄신 기념 경축예배를 드릴 정도였다.

이 무렵 소래교회의 교세는 신도가 약 80여명으로, 58세대가 사는 소래에서 50세대 정도가 기독교를 믿게된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더 큰 예배당이 필요했다. 이미 마을주민 90% 이상이 기독교인이 된 소래에서 이제 예배당 증축은 마을 전체의 문제였다. 마을 공동회가 모인 자리에서 교회건축 문제가 제기됐다. 마을 유지가 선산의 소나무를 베어 건축목재로 제공했으며, 마을 사람들도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헌금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서상륜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그의 동생 서경조다. 서경조는 후에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중 한사람이 되는 인물이다.

소래교회 소식을 접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서상륜과 마을사람들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후에 소래 교인들이 교회의 역사를 남기고자 작성했던 대구면지(大救面誌)에 당시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무렵 언더우드 목사는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경비 일부를 부담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이 말을 들은 서상륜 형제는 지극히 고마운 일이나 우리가 우리 교회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므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노라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외국인이나 어느 선교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힘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기록은 계속된다. 도움을 거절당한 언더우드는 돕고싶어도 돕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미국에서 큰 양등(洋燈)을 다섯개 사다가 교회에 기증하는 것’으로 달래야 했고, 소래 교인들은 ‘그가 기증한 양등을 남녀방에 각각 두 개씩 걸고, 한 개는 강대상 위에 두어 아주 밝은 등불 밑에서 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해서 소래교회는 마침내 1895년 7월 8일, 8칸 기와집으로 거듭나게 됐으며, 그리고 약 1년뒤, 소래교회는 다시 16칸 32평으로 증축 상량했다.

즉 한국 민족은 선교사가 들어 오기 이전에 복음이 자생됐고 최초의 교회도 선교사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초가 마을.


▲초가집 여관에서 출발하는 선교사 일행.


▲시장 저자 거리에서 행상중인 아동들의 남루한 모습.


▲1894년 서립후 중축된 소래 교회 모습 , 한국 교회의 요람이라 일컷는다


▲소래 교회의 서상륜 장로와 가족들 , 동생인 서경조목사( 한국 최초의 목사중 1인)


▲소래 교회의 김씨(이름은 모름) 여전도사와 가족 , 이 김여전도사는 후에 중화동 교회에도 연관이 있음.

2.  남한 최초의 교회인 백령도 중화동 교회

육지에서는 1883년 서상륜이 100권의 성서를 지니고 조선으로 잠입한 것이 최초로 기록된듯하나 사실 우리 민족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보다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며 그 현장은 서해 백령도이다.

중국측에서 튀어나온 산동 반도로 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백령도는 그 거리가 불과 오백 리 (200 Km) 미만에 위치하여 과거로 부터 중국을 통한 서역의 문물과 선교의 물결이 쉽게 다다른 곳이었다.

기록상의 최초 인물은 1816년 9월에 백령도에 도착했으며 " 조선 서해 탐사기"를 기록한 리라호 함장인 바실 홀과 이떄 동행했던 영국 해군 대위 클리포드이다.

클리포드는 후에 해군 선교회를 만들기도 했던 독실한 신자였으며 이떄 그는 선물과 성경 , 전도 용지등을 수레에 끌고 다니며 기회를 엿보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추신 ;  글의 용량이 길어 다음회에 백령도의 복음 전파 과정과 남한 최초 교회인 중화동 교회의 설립 과정을 이어서 올릴것을 약속합니다.

출처: 아멘넷, 정리: 누지문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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