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Apostasy)에 관한 단상
이단경계 2011. 9. 20. 11:57배교(背敎)에 관한 단상(1)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개혁신보, 출처: 양무리 마을
배교는 진리에 반하는 가장 전형적인 종교 운동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석한 목회자요, 뛰어난 칼빈주의 신학자로 평가되는 존 오웬(John Owen)는 “복음으로부터의 배교”(원제, Apostasy from the Gospel, 한국어 번역 「왜 그들은 복음을 배반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로마 가톨릭이라는 당대의 보편 교회가 추구했던 은밀하면서도 전격적인 배교 현상을 매우 통찰력 있는 성경 언어와 신학 논리로 정확하게 규명한 바 있다.
오웬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신들의 배도를 정당화 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성령께서 사도들의 입술을 통해 예언한 배도의 네 가지 기본적인 경고들 - (1) 어그러진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목사와 교사들 중에서 일어날 것 (2) 양떼를 아끼지 않는 흉악한 이리들이 교회에 들어올 것 (3)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 듣는 일을 싫어하여 진리로부터 돌아설 것 (4) 배도 현상은 가견(可見) 교회 전체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 - 이 자신의 시대 속에서 불의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하지만 교회 역사를 정직하게 대하는 성도는 그의 지적이 그 시대만을 향한 거룩한 슬픔이 아니었음을 안다. 배교는 교회 역사가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교회 안에 상시적으로 발생하였던 일이다. 사탄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진리를 거짓 것으로 속이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가장 유구하고 전형적인 진리에 반(反)하는 종교 운동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 드러난 배교의 실체와 음모
배교의 역사성과 지속성, 그리고 현실성에 대해 성경만큼 적확하게 언급하는 기록은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기억해 보라.
어느 민족보다도 확실한 구원의 은혜를 몸소 경험한 백성이었음에도 그들의 전체 역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한 반역과 배역으로 점철되어 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였던 다윗과 솔로몬의 왕정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배교는 그치지 않았다. 유대 왕국의 몇몇 선한 왕들과 느헤미야 때에 나타난 일시적인 신앙 부흥 운동을 제외한다면, 구약 시대는 곧 끊임없이 연속된 배교의 역사로 기억될만하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는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 사역은 겉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이는 듯 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거하시자 모두 떠나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순간에는 그의 열 두 명의 제자들마저 자신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포기한 뭇 사람들과 함께 배교의 행렬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믿음에 관한 이런 형태의 배교는 마지막 때에 나타날 가장 일반적인 종교 현상이 되리라고 하신 주님의 예언은 그 분의 부활이후 수 세기에 걸쳐 전개된 초대교회의 현장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는 진리에 관한 한 순전한 교회 모델이라기보다는, 음험한 목적을 갖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 선생(목사)과 그들이 전파하는 다른 복음(교리)의 위력 앞에서 명목뿐인 교회가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도들은 초대 교회의 배교라는 참담한 신앙적 현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저주와 경계와 비판의 날을 세워 진리로부터 등을 돌리는 신앙의 무모함과 위험성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곧이어 진리의 편에 선 정통 교부들과 초대 변증가들의 생명을 건 순교 정신과 활기찬 논증 덕택에 배교의 큰 흐름이 잠시 주춤하는 듯 보였지만,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변형을 거듭한 배교의 물줄기는 세상으로부터의 이해와 동정, 비신앙적인 세력으로부터의 원조와 협력, 그리고 세속적인 사상으로부터의 지지와 호소와 한데 어울려 중세와 근세를 거치면서 범접하기 무서운 거대한 탁류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정통 신학과 교리를 포기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 거친 배교의 물살에 몸을 내던지고 있다. 이처럼 배교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 걸쳐 항상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숨길 수 없는 교회의 영적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배교는 절대로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부분 복음과 부분 진리로 위장한 거짓 목회자나 거짓 성도에 의해 주도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꺼번에 절대 진리를 무너뜨리려 하는 대신, 주로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진리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허무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교는 구약 시대에는 이교도 사상과 영합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활동 당시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에 의해, 사도 시대에는 거짓 선생과 거짓 형제라 이름 하는 이들과 초대 교회 때는 영지주의와 같은 기독교 이단 그룹에 의해, 중세에는 교황을 위시한 로마 카톨릭 교역자들에 의해, 그리고 근세와 현대에는 자유주의와 은사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입으로 복음을 말하지만 순수 복음과는 상관없는 가르침을 펼치는 복음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과 그들의종교적 허세에 현혹된 성도들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분별하기 쉽지 않다. 이들은 보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으며, 외적으로는 경건과 학문적 배경이 견고하며, 신앙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노력이 남다른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때로는 보통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인격적이며, 그들의 말은 호소력과 설득력을 겸비하고 있으며, 사고와 논리역시 이성과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들”(마 7:15)이다. 이들은 성경을 방편삼아 성경을 속이는 자들이요, 진리의 명료함을 왜곡하는 자들이요, 참된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허무는 자들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진실한 성도에게 분명 배교는 기독교 신앙에 가장 강력한 적(敵)인 동시에 진리 사수를 위해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임을 잊지 말자(*).
배교(背敎)에 관한 단상(2)
지난 학기(3월-7월) 동안, 필자가 섬기고 있는 연구회에서는 첫 번째 공개강좌 주제로 기독교 역사를 탐구할 기회를 가졌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의 장구한 교회 역사를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역사적 교훈이 있다.배교는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예나 지금이나 참된 교회와 참된 신앙을 훼손하는 가장 커다란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세대를 비교해 보더라도 이 문제에 관한 한, 현대 교회보다 덜 심각해 하는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믿기 어렵다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전형적인 설교나 서점가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라. 과연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전과 비교하여 신앙고백과 교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영적 분별과 안목을 중요시하며, 진리에 의한 바른 확신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할 자가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탁월한 성경 지식과 경건한 양심을 소유한 진리에 붙잡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의 평가는 이와 반대이다. 그토록 많은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활개치고 거짓 가르침이 유포되고 있지만, 진정 이들을 기독교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일성(一聲)조차 듣기 힘들다.
성경과 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날로 깊어지고, 세상과의 타협과 관용과 축복으로 포장된 안이한 평온주의가 복음의 핵심인양 증거되고 있어도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위기로 여기는 성도들이 많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배교의 현실과 배후 세력
그럼에도 오늘날 배교라는 단어는 교회안에서조차 터부시되고 있다. 배교라는 말을 꺼내는 즉시, 몰인정하고 편협한 신앙인 정도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배교라는 단어는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용어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는 단어이다. 한국어 성경에는 ‘배도’(살후 2:3)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기도 한 이 말은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에서 유래된 것으로 ‘분리, 변절’(departure) 또는 ‘진리로부터 멀어짐’(falling away)을 의미한다. 배교자란 진리를 포기하거나 배반한 자를 가리킨다. 즉 배교란 본질적으로 진리 운동에 반하는 것으로 교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비성경적인 종교 현상이다.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이 같은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증해 준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 (중략) …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14:10-24 중 일부 구절).
이 말씀은 세상 끝에 나타날 일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답변이다. 예수님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교회 안에서 배교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을 기정사실화 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배교 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지목하신 대상이다. 다름 아닌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신약 성경을 통해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수차례 주의할 것을 당부한 거짓 선생들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공략 목표로 삼는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를 미혹한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는 이들의 정체를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들은 교묘한 위장술의 달인이며, 속임의 명수들이다. 교회의 부주의함과 성도의 연약함을 틈타서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다(유 4). 그리고 경건한 사도와 목사로, 교회의 헌신적인 일꾼으로 행세하며, 때로는 지극히 경건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한다(고후 11:13-15). 능숙하게 성경을 다루며 사람들에게 호감과 신뢰를 받는다(갈 1:6). 그들의 입에서는 늘 평강의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심령에 만족을 주는 설교를 쏟아낸다(렘 6:14). 때로는 놀라운 표적과 신비한 기사를 행하여 수많은 동조자들을 모은다(마 24:24).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 존경할만한 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하고 그리스도처럼 높임을 받기도 한다(벧후 2:1).
배후 세력의 음모와 영적 전쟁의 승리 위한 기도
하지만 드러나는 모습이 달라도 이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한 가지이다.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영적 자만과 방탕에 빠지게 하는 일이다. 그로써 교회와 성도가 진리와 무관하거나 혹은 진리에 반대편에 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들이 더욱 위협적이며 위험스러운 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기 때문이다(마 23:27).
이들은 진리를 가지고서 진리의 도를 훼방하며(벧후 2:2), 말씀을 거짓되게 해석하며(딤후 2:17), 허탄한 자랑으로서 육체의 정욕을 추구하며(벧후 2:18),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게 하며(약 1:14),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유 4). 또한 으뜸되기를 좋아하도록 하며(요삼 1:9), 육체의 현저한 일을 행하게 하며(갈 5:19-20),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며(딛 1:16),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킨다(롬 16:17).
우리는 어느 시대의 성도들보다도 이러한 배교의 현실을 더욱 분명하게 목도하고 있다.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진리의 대적자들과 변절자들의 유혹과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들과의 피할 수 없는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권면에 귀를 기울이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빌 1:9-10) 소원하는 사도의 기도가 우리의 영적 현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http://cafe.daum.net/Restorationjesus/JIWC/107
미기총이 배도를 했습니다.
미기총은 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곳입니다.
미기총이 배도를 했다는 것은 미국 교회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고 보시면 될 듯 싶습니다.
제가 설교에서도 누차 말씀드렸듯이 배도 후 휴거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출현이지요.
휴거가 너무나 가깝습니다. 너무나 심각할 정도로 가깝습니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설레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출처: 아멘넷,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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