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만한 부활
찰스 스펄전 목사 2013. 4. 9. 11:37믿을만한 부활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이 세상을 떠난 우리 교우들의 영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드리신 잊지 못할 그 기도대로, 그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있음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적게 알지만, 그들이 안식을 누리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복되도다, 죄와, 근심, 고통이 이제는 없으며, 그들의 구세주와 더불어 안식하도다." 우리의 주된 고통은 그들의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육체를 어둡고 쓸쓸한 무덤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들이 부패하여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으며, 육체의 겉모습들이 썩어져 없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손과 발들, 그리고 아름다운 그들의 온갖 모양들이 분해되어 먼지가 되고, 해체되어 철저히 황폐되는 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눈물 없이 무덤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셨던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음을 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교우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슬픕니다. 우리는 무덤을 조금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카타콤과 그 지하 납골당을 기뻐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지금도 계속 슬프게 여기지만, 그렇게 죽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히 9:27)라는 무서운 파문이 우리 인류에게 이미 떨어 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형벌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벌인 죽음을 즐거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교리는 그 슬픔의 원인을 없애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근심하며 고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영혼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과 염려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불멸에 관하여 믿음을 갖게 될 때 의로운 영들은 불멸하리라. 믿음으로 모든 두려움과 떨림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부활에 관하여서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되면 육체에 관한 허무한 모든 슬픔도 지워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관상 파멸된 것 같이 보이는 육체가 다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육체가 전멸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지 속에 뉘여 둔 그 육체는 잠시 동안 잠자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이 땅에서는 알려지지도 않은 속성들을 덧입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깨어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전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육체를 벗어난 영들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혈과 육을 지니고 있는 남녀들을 택하였습니다. 택한 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히 보다 아름다운 부분인 영혼에 대한 애정뿐 만 아니라, 우리가 열등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부분인 육체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책에 택한 자들의 모든 지체들이 헤아린 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모든 뼈들을 계수하시며, 그들의 머리털까지도 모두 세십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완전한 육체를 입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성과 인간의 영혼을 결합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성과 영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인성, 혈과 육을 좋아하신다는 증거를 얻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의 대속 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혼 모두를 완벽하게 대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은 부분적인 속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되 우리의 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에 대해서도 그러하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벌레가 육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고, 무덤의 감옥으로부터 대속하셨기 때문에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육체와 영 전부가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크리스천은 단순히 영으로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그의 하늘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바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 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지금까지 계속 성령의 전이 되어왔던 몸이 종국에 파멸되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몸은 광야에 세워졌던 장막처럼 무너질 것 입니다. 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무너뜨린 것입니다. 아니면 같은 기능을 가진 다른 장막을 일으켜 세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장막은 없어지겠지만 그 뒤에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만일 구세주께서 자기 백성들의 몸을 무덤 속에 남겨두신다면, 그것은 죄와 사단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구세주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만을 석방하셨다면, 사단의 모든 일들을 파멸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 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백성들의 뼈 하나도 아니 뼈 한 조각도 납골당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사망은 단 하나의 승리의 트로피도 보여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감옥에 들어있는 인간으로부터 끌어 모은 모든 전리품들이 철저히 약탈당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만유 중에 뛰어나실 것이며, 물질세계까지 다스리실 것입니다. 또 사망과 무덤을 멸하시며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전적으로 구원하셨으며, 전적으로 의롭게 하셨으며, 전적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므로, 우리는 육과 영 전 인성으로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죄짓던 손을 높이 들어서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악한 일들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은 아름다우신 왕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을 귀찮게 여기는 마음이 주님을 영원토록 사랑하게 되며, 지금은 주님을 멸시 하는 영이 주님을 영원토록 기뻐하여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에 크게 반역하며, 영에게 거추장스럽던 이 육체도 그리스도께 목소리와 손과 두뇌와 귀와 눈으로 경의를 바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 곧 양자됨이 성취되는 부활의 때를 기다립니다. 자,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가 믿으며 어느 정도 즐거워하는 것일지 라도, 때때로 불신의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것이 사실일까?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들이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오늘 본문으로 잡은 질문이 특별히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오늘 아침, 저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에게 첫째로, 직면한 어려움을 살펴보도록 요구하겠습니다. 둘째로, 그 어려움을 제거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하는 데에는 한 가지 방법뿐이며, 그것은 대단히 간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진리의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한 두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Ⅰ. 그러면 첫 번째 대지로 직면한 어려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부활을 믿는다는 대담하고 확고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려움들을 표면에 드러내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매 시대마다 오류에 빠진 크리스천들이 회의주의자들과 철학적 사고를 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교리를 더 잘 받아들이게 하려고 부활의 교리와 거기에 따른 진리들을 쉽게 설명하고, 다른 뜻으로 둘러대려는 많은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부활의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면서 그 진리를 말하거나, 죄지은 자의 목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할 때, 그 진리를 받아들여 확신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말하는 자의 말을 듣고 어느 누가 믿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쉬운 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바 교리적 내용들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입증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도 믿지 않는 바를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여김 받을 뿐입니다. 그렇게 자르고 심지를 꺼버리는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을 스스로 잘라버리며, 우리 자신의 팔을 스스로 부러뜨려 버리는 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 속에 넣어둔 몸이 진실로 부활할 것을 믿으며, 그것이 의미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그렇게 말씀 드립니다. 제가 비유를 사용하거나 신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죽은 자들의 몸이 무덤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의 몸에는 장차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을 인정하며, 실제로 즐거워합니다. 지금 몸을 감싸고 있는 부패성을 지닌 요소들과 모든 조잡한 것들은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더욱 고상한 환경에 적합한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는 우리의 영혼이나, 보다 하위의 지적 기능들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우리 본성의 보다 고상한 부분이나 영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렇지만 육체는 동일한 육체일 것을 우리가 압니다. 무덤 속에 넣어둔 동일한 몸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죽는 우리의 몸과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우리의 몸 사이에는 절대적인 동일성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하다고 해서 본질이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구성요소가 계속 동일하다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제한을 두어 말씀 드린다고 해서 앞서 말씀 드린 내용을 번복하거나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20년 전에 입었던 그 동일한 육체에서 살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한 원소도 20년 전의 것은 없다고 듣습니다. 또 그 사실을 의심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유아 때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겪는 우리 육체의 모양의 변화는 대단히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그와 똑같음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의 몸은 우리가 태어날 때의 몸과 동일한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동일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모두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몸은 동일한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할 때의 우리의 몸 은 죽을 때의 우리의 몸과 동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변화된 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변화들이 동일성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부활의 교리를 좀 더 쉽게 믿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이러한 설명을 하였지만, 저는 성경에서, 우리가 무덤에 넣어두었던 모든 뼈들과 살과 신경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대로 몸의 동일성의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며 믿음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믿는 바가 철학적이거나 개연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들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과학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 좋은 대로 과학적인 것을 요구하도록 놔두십시오. 믿음을 요구하는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인간의 과학을 공격하지 않으며,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에 아첨하거나, 그것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들을 사용하며,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고 말할 때는 과학적 인 근거와는 전혀 다른 근거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다 죽음에서 부활할 것을 기대합니다. 문자 그대로 무덤에 묻힌 인간의 몸이 부활할 것을 우리는 견고히 믿습니다.
하지만 이 소망은 많은 난해한 어려움들로 자연스럽게 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죽은 자의 몸의 대부분은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몸의 대부분은 썩었고 철저히 분해되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몸도 아마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방부처리 되어 석화시켜져 있거나, 미라가 되어 있는 시체들을 볼 때는, 모든 몸들이 그런 식으로 보존되어 있다면, 그들의 부활을 믿기가 더 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대의 대리석 석관을 열어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약간의 갈색 가루 외에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교회 마당에 있는 무덤을 팔 때는 몇 개의 부셔진 뼈 조각만 발견하게 됩니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쓰러져 죽어 간고대의 전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 곳에는 이제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뼈들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녹아서 흙으로 돌아갔고, 어떤 경우에는 나무뿌리와 식물들에 의해서 흡수되어 버렸으며, 또 다른 유기체에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못 믿을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어떤 시체들은 화학물질에 의해서 분해 되었고, 불태워졌으며, 짐승들이 먹기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먹히기도 하였습니다~그런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겠습니까? 한 때 살아있던 유기체로 세워졌던 원소들이 이제는 얼마나 널리 흩어져 버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는 고레스, 한니발, 스키피오, 시저의 몸을 구성하였던 원소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압니까? 한 때는 어떤 사람의 생명을 구성하였던 원소들이 지금은 극과 극이 먼 것처럼 널리 흩어져 있습니다. 원소 하나는 바람에 불려 사하라 사막을 건너가 있고, 다른 하나는 태평양에 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구의 모든 원소들이 윤회하고 있는데, 한 때 어떤 사람의 몸의 중요 부위를 구성하였던 요소가 지금 이 시간에는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바울의 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을 로마로 보냈던 베스도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을 사형에 처하였던 그 폭군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감히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산다는 것이 못 믿을 것 같다 한들 무엇이 이상합니까?
부활의 교리는 모든 사람, 일부 사람이 아니라, 몇 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려움은 증대합니다. 한 때는 죽은 아이를 살렸던 엘리야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한층 쉬울 것입니다. 나인 성 문에서 죽은 청년을 살렸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고, 병들어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하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교리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홍수 이전의 수만의 사람들, 니느웨와 바빌론의 수많은 사람들, 페르샤와 메대의 사람들, 크세르 크세스의 발 앞에 엎드렸던 수백만의 사람들, 알렉산더와 함께 진군하였던 수많은 사람들, 로마인들의 칼 아래 쓰러졌던 셀 수도 없는 수 백만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부활하게 된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중국과 같은 나라들에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6천년 동안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파선과 역병, 지진, 무엇보다도 나쁜 유혈 참사와 전쟁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어느 누구도 영원토록 잠들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때 이 땅에서 숨 쉬며 걸어 다녔던 모든 육체들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 기괴한 일이군",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못 믿을 면이 많은 일이야". 좋습니다. 제가 그 말에 대해서 논쟁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사실에 대한 좀 더 타당한 이유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 몸들이 지금 있는 곳이 얼마나 이상한 장소인지 기억한다면 놀라움은 더욱 커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의 몸은 그들이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갱도 속에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조수와 파도에 밀려 망망대해의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독수리의 눈으로만 알아 볼 수 있는 곳인 길도 없는 먼 사막에 누워있기도 합니다. 또 무너져버린 바위산 밑에 묻혀 있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 어디가 있습니까? 아담의 자손의 먼지가 뒹굴지 않는 곳을 땅 위에서 누가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거리에 불어오는 여름철 바람치고 한때 사람이었던 먼지 알갱이를 휘몰아가지 않는 바람이 있습니까? 바닷가에 밀려와서는 부서지는 파도치고 한 때 사람이었던 물질이 용해되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파도가 있습니까? 그들은 각 나무 아래 누워있고, 그들은 들판을 살찌게 하며, 그들은 실개천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그들은 초장아래 숨어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듯이 흩어졌던 몸들이 분명히 모든 곳으로부터, 모든 곳으로부터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한 것처럼, 우리의 죽은 사람들도 살아나서, 그들의 두 발로 서며, 엄청나게 많은 군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기이하게, 그들은 단번에 부활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크게 두 부류로 부활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크게 두 부류로 부활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5, 6절에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천 년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질 것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장은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확실합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러나 이 천 년의 큰 간격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의인들이 부활할 때 얼마나 많은 무리가 모이겠습니까?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계 7:9). 하나님만이 계수할 수 있는 셀 수도 없는 큰 무리가 갑자기 "티끌과 잠잠한 진흙으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일천 년의 간격은 하나님의 보시기 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곧 끝날 것이고, 다음에는 불의한 자들도 또한 부활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무리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다 어디에 서겠습니까? 땅의 평지들이 그들을 모두 다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온 땅을 덮고 산꼭대기까지 덮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대 심판을 하려면 바다를 심판석으로 사용해야 할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대 심판을 알리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선명하고 날카롭게 울리며 그들을 부를 때 그들은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공장에서 뼈가 제대로 맞춰지고, 기이한 신체 조직들이 재구성되는 데에는 긴 세월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수 세기 동안 파괴되어 있던 것을 재건하는 데에도 한 순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이 세상에 처음 생기게 되었을 때는 기이하게 만들어졌으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몸이 죽은 상태에서 회복되는 데에는 눈 깜짝할 사이만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이시며,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억만 년의 세월도 하나님께는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순간에 지극히 기이한 하나님의 기사들이 성취됩니다. 비할 데 없이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놀라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것은 못 믿을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사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악인들의 부활은 과거의 상태로의 회복이 될 것이지만, 성도들의 경우에 부활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 보다는 괄목할 만한 향상이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는 땅 속에 뿌리 하나를 심 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황금 수술을 단 아름다운 백합화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화분에 씨 하나를 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눈부신 색깔을 가진 절묘하게 아름다운 꽃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땅 속에 심은 씨앗이나 그러한 꽃들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 얼마나 다릅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무덤에 묻혀 있는 몸들도, 많은 씨를 심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몸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싹터서 완전히 성장케 되어 모든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놀라움을 더욱 증대시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파괴자의 이빨 사이로부터 먹이를 낚아 챌 뿐만 아니라, 벌레의 먹이가 되었거나 재나 먼지가 되었던 몸들도, 자신의 거룩한 형상을 지닌 것으로 부활 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너덜너덜해지고 좀먹어 갈기갈기 찢겨진 옷들이 거룩한 말씀 한 마디에 완벽하게 회복되고, 거기다가 세상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회고 더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전에는 없었던 값진 수술들과 수놓은 문형들로 치장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 사실을 기이함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 그대로 놔둡시다. 저는 그 사실을 한 순간에 설명하거나, 그 사실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부활의 사실을 믿는데 많은 어려움들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즉, 자연 계 속에서 부활의 사실을 지지해 줄 만한 완벽하게 유사한 것이 명백하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부활과 얼핏 비슷한 현상들이 있어서 우리가 비교를 할 수는 있습니다만, 전적으로 부활을 논증할 좋은 근거로 쓰일 유사한 것이 자연계에는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들이 잠을 죽음에 비유하고, 잠에서 깨는 것이 일종의 부활이라고 말들을 해왔습니다. 그러한 상징은 매우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완벽한 유추가 되기에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잘 때에는 생명이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계속 존재하고 있음은 잠자는 그 사람 자신에게도 명백하며, 잠자는 자를 지켜보며,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심장이 고통 하는 것을 지켜보는 모든 자들에게도 명백합니다.
그러나 죽었을 때는 몸에 맥박이 뛰지도 않고 몸 안에 생명이 남아있는 다른 흔적들도 없습니다. 잠자는 자의 몸과는 달리 생명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잠자는 자의 사지가 갈기갈기 떨어지고, 회반죽과 혼합되며, 그것이 먼지가 되고, 그 먼지가 진흙과 부식토와 섞이고, 그런 다음에 여러 분이 부르면 깨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유사한 것이라고 부를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잠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깨어나는 것은, 뛰어난 비교는 될 수 있을 것이나 부활을 예언하는 것이나, 부활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또 곤충들의 탈바꿈을 부활의 뛰어난 유사로 말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애벌레는 사람의 현재 상태이고, 번데기는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성충, 완전한 곤충은 사람의 부활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들 합니다.
확실히 감탄할 만한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번데기에는 생명이 있고, 조직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번데기도 완전한 곤충입니다. 어떤 관찰자라도 번데기가 죽은 것이라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번데기를 집어 들고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번데기 속에 앞으로 나타날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완벽한 곤충이 명백하게 그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번데기를 뭉개고, 그 생명의 증액을 모두 말려버리고, 밟아서 흙 속에 쳐 넣고, 그것으로 화학적인 분해과정을 겪도록 하며, 철저히 분해시키고, 그 다음에 여러분이 그것을 다시 불러내어서 나비가 되게 한다면, 여러분은 부활의 유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 연계에서는 아직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씨앗으로 부활을 비유하는 데에는 저는 흠잡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교훈적이며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따지자면 결국 유치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씨앗으로 부활을 유추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씨앗은 땅 속에서 죽게 되지만 적당한 때에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땅 속에 묻힌 씨앗을 죽음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씨가 소생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유기체의 조직들이 원래의 미립자의 원소들로 분해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씨앗도 구성 원소들이 각기 분해되어 생명의 유기적인 조직으로부터 유기적인 기능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생명의 배종은 여전히 남아있고, 분해된 유기적인 조직은 배종의 양분이 되고, 배종은 그 영양분으로부터 다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몸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겠습니까? 죽은 몸에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누가 부패한 몸에서 생명의 배종을 발견하겠습니까? 좀 더 고등한 존재들은 인식할 수 있는 생명의 핵이 몸에 남아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부패한 몸의 어디쯤에 그러한 것이 머물러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뇌 속에 그 것이 있습니까? 두뇌는 몸 중에서 가장 먼저 썩어 없어지는 부분입니다. 해 골은 비어있고 공허합니다. 그것이 심장 속에 있습니까? 심장 또한 대단히 빨리 썩어 없어져 버립니다. 뼈보다는 더 빨리 썩어 없어집니다. 무덤에서 끄집어낸 몸의 어디를 현미경으로 살펴보아도 생명의 어떤 요소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씨가 묻혀있는 땅을, 여러분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파헤쳐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씨앗을 묻어둔 곳에서 그 씨앗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그 씨앗은 그 땅에서 싹 터 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동안 묻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무덤에 함께 넣어둔 유품도 아마 거의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대의 사람들보다 장차 올 세대의 사람들은 그를 더욱 더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홍수 이전에 묻혔던 사람들이나, 그 대홍수에 익사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그들의 유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밀 알갱이를 고운 가루로 빻아서, 바람결에 날리십시오. 그리고 그 가루에서 살아난 밀밭을 바라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여러분이 완벽한 부활의 유사를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계에는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활은 부활로서 독자적인 것입니다. 부활에 관하여서 여호와께서 잘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9). 우리 주님의 부활과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던 몇 사람의 부활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할만한 것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찾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사실을 믿을 확실한 한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려움이 있고, 그 한 가지는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 마른 뼈들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것이 믿을만한 것이겠습니까?
Ⅱ. 그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대지에서는 그 어려움을 제거하겠다고 서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공연히 뽐낸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본문을 다시 적당히 강조하여서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은 못 믿을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 곧 전능자요 무한자께서 죽은 사람 살리시는 것을 왜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어려움들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과,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음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믿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요, 필연적 인 것이 됩니다. 불가능과 불신이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신을 깨뜨리는 무기로써 이성을 들고 나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참된 방어책입니다.
견고한 돌들이 있는데 나무와 짚으로 건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약속하시고 어떤 진리를 계시하신다면, 제가 그것에 대해서 철학자들에게 물어본 후에, 그분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유한한 이성으로 인정할 때에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진리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판단이 궁극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알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계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쳐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은 거짓될지라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현자라고 칭함 받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동요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의뢰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는 인간의 지식을 모아놓은 도서관의 모든 책보다 더욱 무게가 나갑니다.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란 말씀이 모든 합리적인 이유를 대신합니다. 우리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웅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 것이라고 선포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못 믿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너무나 힘겨운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산적한 난해들을 이성으로 건너지 못할 너무나 어려운 교리로 여기십시오. 그 교리 자체에 분명한 자체 모순과 일관성이 없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믿을 기회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말했을 때는 한 유대인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그립바에게 변명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그립바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 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고 말할 좋은 근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아그립바는 유대인으로서 욥의 간증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 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의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조급하구나". 그는 또한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말한 간증도 알았습니다, "내 육체도 안전이 거하리니". 그는 또 이사야서 26장 19절의 이사야의 간증도 알았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그는 또 다니엘서 12장 2, 3절의 다니엘의 증언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 선지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티끌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또 한 가지 더, 아그립바는 호세아 13장 14절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증언을 알았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도 그렇게 명백하게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아그립바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인 우리에게는 더 온전한 증거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숨을 가냘프게 쉬면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킬 의도를 자신 없이 선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의 문장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6장 40절도 그러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성령께서도 사도들을 통하여 동일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귀중하고 복된 로마서 8장 11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중언을 듣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또 제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 말씀을 여러분에게 지금 읽어드리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참으로 부활의 교리가 충만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명령 받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부활의 교리에 대하여 장엄한 논증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일이 말씀 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성령의 중언은 죽은 자들이 부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한다면, 부활 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 복된 소망을 간직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주위를 돌아보며, 주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도움이 되도록 정해놓으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주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는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고 관찰해 보지 않으면, 단순히 보고서를 통해서는 믿을 수 없는 기사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전보, 그것은 사람이 발명해 낸 것에 불과하지만, 지금 우리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을 수 없듯이 천 년 전의 사람은 그것을 믿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짐 마차를 부리던 시대의 사람이라면 누가 영국에서 미국까지 전파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우리 선교사님들이 적도의 여러 나라에서 원주민들에게 얼음의 형성과, 사람들이 얼어붙은 물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망망대해에서 배들이 빙산으로 둘러싸이는 것, 주위의 모든 물들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을 말했을 때, 원주민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보고를 믿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우리가 적응하기까지는 모든 것이 기이합니다.
부활도 우리가 관찰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그것이 전부입니다. 부활 후에는 지금 우리가 피조물과 섭리에 익숙한 것처럼 부활도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의 하나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할 것과 부활을 영원토록 기이히 여길 것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지금 피조물을 보고 기이히 여기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간 후에는 하나님의 이 새로운 일에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태어난 것에 불과하며, 아직도 너무나 적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다 보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피며 보내는 짧은 세월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우리의 왜소함을 벗고 성년이 되었을 때는, 지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들이 친숙하게 되어 찬양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부활이 창조보다 더 큰 기사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말씀으로 세상을 불러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있으라" 하시니 세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무에서 창조해내는 것이나, 흩어졌던 미립자들을 불러 모아서 이전의 그들의 모습으로 다시 빚는 것이나 똑 같이 너무나도 기이한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가 전능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 두 가지 중에서 굳이 쉬운 것을 하나 택한다면, 부활이 더 쉬운 일입니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만 아니라면 모든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의 탄생을 신적 능력의 가장 초월적인 현시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인간의 탄생과 우리의 계속적인 존재에 있어서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 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너무나 흔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건대 부활의 일은 우리가 아직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색해하는 것뿐 입니다. 너무나 기이한 하나님의 다른 행적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믿을 만한 증거를 근거로 받아들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진리의 한 부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부활하여야 할 근거가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모형이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전조가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부활할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가능성을 입증하셨습니다. 아니 주님 자신은 사람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부활을 확실하게 입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은, 주님께서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고전 15:22).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백성들의 부활에 관한 모든 의심들이 영원토록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요"( 고전 15:16). 그러나 주님께서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또한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미 부활과 같은 큰일을 내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내적 본성에 관하여서 여러분이 죽은 데서 부활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하였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있지만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그 일에 관하여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제게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에게 그 뜻을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으로 아는 것이지 설명으론 이해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려면 여러분 자신들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죄의 무덤으로부터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악한 정욕과 불순한 욕망의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이 부활을 여러분 속에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그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힐 때 그리스도께 이루셨던 것과 필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본성이 소생한 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모든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부활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은 헛되며 필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포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불신을 하나님께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 이 하나님의 택한 자중의 하나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을 믿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모든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증거를 거절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쓰라린 쓸개즙 가운데 있으며, 은혜가 없으면 그 가운데서 멸망하게 될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과 교리는 그 모든 영광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고귀한 자들과 악한 자들로 나누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요 8:47)라고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밀히 택하셨음이 눈에 보이는 증거 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요 10:26, 27). 그러므로 이 진리와 다른 그리스도의 진리들이 드러나고, 유지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져서 사람들 사이를 나누며, 애굽인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나누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택함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고 남아있는 자들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거절한 그 진리에 의해 정죄 받고, 그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합니다.
Ⅲ.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대지로, 이 진리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의 진리와 우리와의 첫 번째 관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 말씀으로 서로서로 위로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소중한 자들을 잃었습니다~방금 드린 말씀을 수정하겠습니다~그들은 더 좋은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뒤에 남겨둔 몸은 잃은 것이 아니라, 이자가 붙는 저축을 하듯이 맡겨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별 때문에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마십시오. 왜 우리가 성도들의 장례식에서 항상 슬픈 장송곡을 애달프게 부르며, 검은 상복을 입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 방식대로 한다면, 저는 저의 운구를 흰 말들로 장례지까지 끌도록 하고, 복장은 상복을 입었지만 기쁨을 표하는 자들이 어깨로 메고 하관식을 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영광 중으로 들어갔으며, 불멸함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왜 슬퍼해야 합니까? 옛날 청교도들은 성도들이 관을 어깨에 메고, 무덤까지 시편을 노래하면서 걸어갔는데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영화롭게 된 자들에 대해서 슬피 운다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기쁨의 나팔을 울리십시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클라리온으로 승리의 즐거운 음 조를 연주하도록 하십시오. 위대한 정복자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왕께서 자기의 보좌에 오르셨습니다. "즐거워하라", 하늘로부터 우리의 형제들이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즐거워하자, 우리는 우리의 안식에 들어왔도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우리가 죽은 자들을 생각할 때 슬픈 기색을 계속 띄지 않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으로는 고통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비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게 죽은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살아있는 약속을 우리가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영원 무궁히 찬양합시다.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들도 떠날 것을 기대하며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도 역시 죽어야 합니다. 이 전쟁에 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화살이 한 대 있고 궁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화살은 제 심장을 겨냥하고 있고, 궁수는 필사적으로 그 목표물을 맞히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잠들어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아마도 외국의 쓸쓸한 무덤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여러분의 뼈가 여러분의 선조의 뼈와 나란히 적소에 안치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여러분은 먼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 어디에 묻히든지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 동안입니다. 그것은 불멸의 길로 가는 중에 잠시 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금생과 내생 사이에 잠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마음을 평안히 가질 뿐만 아니라 기대를 하면서 죽음을 맞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망하는 것은 지금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복된 부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귀히 여기도록 합시다. 우리의 지체들이 악의 병기가 되도록 하지 말며, 죄로 더럽히지도 맙시다. 크리스천은 탐식이나 술 취함이나, 불결한 행동들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고전 3:17). 여러분은 순결하게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 여러분의 몸이 깨끗한 물로 씻음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후로 여러분이 모든 불결한 것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모든 악한 것들을 제해버리십시오. 천국에서 영원토록 거해야 할 몸들이 지금 이 땅에서 더럽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준엄한 사상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도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활은 불행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죄를 지었으므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마 10:28).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 모두를 영원토록 지속되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무덤에서 잠자는 것이 그러한 부활~"심판의 부활"보다 무한히 더 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 칭합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표현하기를,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단 12:2)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부활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부활로부터 피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육체를 입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을 받는 것도 충분히 무서운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몸과 영혼이 함께 죄를 지었다면 몸과 영혼이 함께 영원토록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예레미 테일러는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라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라는 사람이 졸도하였는데, 그의 친구들이 그가 죽은 줄로 알고 화장시키려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열기로 몸이 뜨거워지자 그가 깨어났고 자신은 화장 불길에 휩싸여 소망 없이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출해달라고 부르짖었지만 헛되었습니다. 그는 구출 받을 수가 없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전신이 일그러지며 마비되었습니다. 모든 죄악 된 몸이 무덤에서 잠자다가 부활하게 될 때에 바로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깨어나서 심판 받고, 정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을 얻도록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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