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이 지났군요. 지금은 떠나왔지만 시애틀엔 이단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여호와의 증인들.....
2009년, 케이시애틀 웹사이트 기독교게시판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몰려들어 자기들이 믿는 것이 참기독교이며 정통교회들이 믿는 삼위일체는 잘못 된 교리라고 주장하는 글들로 도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단일신이며 예수님은 피조물, 즉 미가엘 천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제가 나서서 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올렸습니다.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뒷거래"
만일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님이 미가엘 천사라면 이랬을 거라는 코믹 단막극.
생각이 나서 그 글을 퍼다가 여기 올려봅니다.
한 번 읽어 보세요.

글제목: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더러운 뒷거래 (여호와의 증인교리 반박 시리즈 종결편)

이 글로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한 반박시리즈를 일단 마치고자 합니다.
만일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예수님이 미가엘 천사라면,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픽션으로 재구성하여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의 예언도 거짓말입니다.
이사야서 9장에서 아들을 주신 바 되었다는 둥, 임마누엘이라는 둥, 그 이름이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떠벌린 것도 몽땅 거짓말이요 쇼였습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은 “천사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시당초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줄 의사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니시니 아들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 주시겠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나누실 뜻도 없었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니니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님은 나누거나 느낄 수조차 없습니다.
삼위일체라면 아들이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실 때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도 함께 고통을 당하시겠지만(한 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십자가에 달린 놈만 혼자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미가엘 천사를 시켜서 대신 피 흘리게 하는 게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거짓사랑입니다.

......... 단막극.........
짜짜아아안~ 막이 열리고 (픽션으로 본 뒷거래 전말)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를 부르셨습니다.
"이보게, 미가엘"
"예,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자네, 세상에 내려가 십자가에서 좀 죽어 주어야겠네."
"아니, 하나님, 제가 왜 그 끔찍한 십자가에 죽습니까? 저는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어떻게 죽습니까? 천사는 죽을 수가 애시당초 없지 않습니까?"
"아닐세. 자네가 사람이 되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가 죽어주는 시늉만 하면 되네."
"싫습니다. 저는 그리 못 하겠습니다. 십자가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 하나님도 아시잖습니까?"
"뭐라고? 싫다? 못 하겠다? 자네 지금 내게 반항하는 건가? 혼나고 싶은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반항이라뇨. 하나님께 감히 반항했다간 무저갱 영창에 들어가려고요?"

"짜아식, 알긴 아는군. 진작 그럴 것이지. 그런데 자네에게 거저 부탁하는 거 아닐세.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삼위일체가 아니니 아들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아들을 내어주어 죄인들을 구원하겠다고 큰소리치고 구약성경에다 약속은 해 놨는데, 십자가에 죽어줄 아들이 애시당초 없단 말일세. 그러니 어쩌겠나? 그러니 자네가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죽어준다면 내가 자네를 진짜로 아들로 삼고 자네에게 나의 모든 권세를 양위하겠네. 즉 자네가 하나님이 된단 말일세. 그리고 십자가에 죽는 시늉만 잘 한다면 하나도 안 아프게 해 줌세. 자, 내 제안 어떤가?"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지.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나?"
"제게 하나님을 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주신단 말이죠?"
"그렇다니까... 하나님인 나를 못 믿겠다는 건가? 정 못 믿겠으면 자네 말고 가브리엘 한테 부탁해 볼까 하는데."
"아니, 아닙니다. 믿습니다. 믿슙니다. 미쓥니다. 믿고 말고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하고 말고요.
아,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내가 하나님이 되다니...
그런데 하나님, 제가 하나님이 되면 하나님은 어떡하시려고요?"
"내 걱정은 말게. 이젠 은퇴하고 편히 쉬어야지."

그렇게 미가엘 천사는 하나님과 비밀거래 뒷거래 계약을 했습니다.
이번 일만 잘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물려받는다니, 아니 하나님이 된다니 이게 어딥니까? 루시퍼 녀석이 그토록 탐내다가 쫓겨나서 마귀가 된 그 하나님 자리를 이 미가엘이 차지하다니, 꿈만 같습니다. 가브리엘 녀석도 이젠 끽소리 못 하겠지요.

그래서 미가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본소양과 주의사항을 교육받고 마리아의 몸에 들어가 (삼위일체가 아니니 성령이 있을 턱이 없고, 성령이 없으니 성령의 역사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예수가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빙자하여 인간의 몸에 기어들어가 인간의 탈을 쓰고 기어 나온 셈입니다.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의 가치를 높여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할 수 있을 만큼 값을 올렸습니다.
천하인간의 죄를 다 담당시키려면 그만큼 대속물의 값이 나가야 하니까 부르는 게 값이니 값을 막 올린 거죠.
그렇지만 천사 한 마리가 온 세상 인류의 죄를 다 담당하다니, 이건 순 거품, 버블 값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시켜서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 나팔을 불게 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소리치게 하였습니다.
어린양은 무슨 어린양입니까? 천사가 둔갑한 어린양이지요.
요단강에서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는 비둘기 한 마리 보내어서 성령인 것처럼 꾸미고 (삼위일체가 아니니 성령이 있을 리 없지만요) 입체음향시설을 동원하여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이 울리는 효과음도 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깜빡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된 미가엘 천사는 "아버지는 내게 심판을 맡기셨다"느니,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니 참 양식이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뻥을 마구 쳤습니다.
돌팔이 의사처럼 병자도 고치고, 제멋대로 죄도 사해주고, 죽은 자를 살리는 마술도 하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 위를 걷는 마술 쇼 버라이어티 쇼도 연출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시름 놓았습니다.
미가엘 천사가 천연덕스럽게 아들 역할을 잘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가엘 천사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한 것도 다 쇼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로서가 아니라 이번 일만 잘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삼고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승계해 주겠다는 뒷거래에 따른 미가엘 천사의 영특한 쇼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하신 골치 아픈 약속을 손도 안 대고 코푸는 식으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미가엘 천사가 다 알아서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 아니 담당하는 것처럼 감쪽같이 연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는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만일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미가엘이라는 한 마리 천사였다는 사실이 인간들에게 발각된다면 하나님은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가엘 천사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신 게 아니라, 애시당초 천사란 죽지 않기 때문에 죽은 체 숨죽이고 사흘 동안 있다가 무덤의 무거운 돌문을 제치고 기어 나온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병사들이 기절초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쯤이야 천사장 미가엘에게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임무수행을 마친 미가엘 천사는 하늘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이 미가엘을 우편에 앉히고 권력위양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약속을 안 지켰다간 미가엘이 뭐라고 나발을 불고 떠들어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된 미가엘 천사는 밧모섬에 귀양 간 사도요한에게 나타나서 "내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구라를 쳤습니다.
미가엘 천사가 처음이요 나중이라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뒷거래는 완전범죄로 영원히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거의 2,000 년 가까이 숨겨져 오던 이 비밀이 19 세기에 이르러 그만 러셀과 러더포드라는 똑똑한 인간들에 의하여 눈치채지고 말았습니다. 러셀과 러더포드는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닌데 어째서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냐는 의문을 가지고 비밀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미가엘 천사라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러셀과 러더포드는 여호와의 증인 모임을 만들고 이 비밀을 폭로하고 “파수대”, “깨어라” 책자로 떠들어대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둘씩 짝을 지어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걸고 성경공부하자면서 사람들을 끌어다가 "예수는 미가엘 천사다!"라고 천기를 누설하는 나팔을 불어대고 있습니다.
 
더구나 케이시애틀 자유게시판에 친구, 참숭배, 학자, 로고, gnews, 신앙인, 바보 등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몰려 들어와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니다, 예수는 미가엘 천사다!"라고 떠벌리는 바람에 여호와 하나님과 미가엘 천사의 더러운 뒷거래가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입장이 참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상, "여호와의 증인이 믿는 예수는 미가엘 천사였다"를 재구성해 본 픽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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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기마켜의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한 반박 씨리즈를 마치겠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저의 글 총 11편의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잘못 된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지 못 합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이나 잡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아닌 하나님은 세상 잡신도 해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결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존재방식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것은 잘못 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이단교리를 믿는 것은 마치 이리를 어미라고 믿고 따라가는 새끼양이나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은 부디 올바른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예수를 미가엘 천사라고 믿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이라도 그 잘못을 깨우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께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넷 공간이지만 여러 명이 무더기로 달려드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거의 혼자 상대한 격렬한 논쟁 끝에 마지막으로 이 글을 올리자 여호와의 증인들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반박글을 읽고 그들 여호와의 증인들이 회개하고 바른 신앙으로 돌아왔는지 저는 알지 못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다섯가지 구호가 있는데 ,

첫째는 ‘Sola Scripture’(오직 성경)이며,

둘째는 ‘Sola Fide’(오직 믿음)이며,

셋째는 ‘Sola Gratia’(오직 은혜)이며,

넷째는 ‘Solus Christus’(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다섯째는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Sola Scripture' 오직 성경입니다.

이는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tes'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라는 의미이며,

성경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도 교황의 말도 목사의 생각도 교인의 체험도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오직 성경으로써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할 때

비로소 바른 믿음을 소유할수가 있고,

바른 은혜를 누릴수가 있으며,

그 바른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원자로 믿을수가 있고,

그 바른 은혜로써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드릴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Sola"가 서두마다 붙은 이유는 그 전까지의 신학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즉 인간의 이성위에다 하나님의 계시를 더한다는 신학을 염두해 두고

 "Sola(오직)"를 붙인 것이다.

로마 천주교의 대표적인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 중에

대 이교론(Contra Gentiles)” 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는 '이성 위에 계시가 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 카톨릭 신학의 대부이며, 로마 카톨릭의 대 신학자입니다.

지금의 천주교인 로마카톨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수도생활이나 인간의 헌신과 행동들이 함께 덧붙여져야만이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겨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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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성령은 자유하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성령께서 예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과의 관계에서 보이시는 겸손하심이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인 현상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냉철한 성경적 검증과 분별을 거부할 때, 교회 안에는 봇물 터지듯 온갖 종류의 사이비 가르침과 미혹하는 영의 역사라 밀려들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굴레에서 벗어난 성령 운동은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온상이 된다.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은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성령을 소멸한다는 식으로 위협하고 저주하는 것이 사이비 성령 운동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들은 항상 성령의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역사하심이라는 허울 아래 성경의 가르침을 교묘히 피해가려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굉장한 표적과 기적이 일어났을지라도 그것을 무턱대고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할까 두려워 성경적인 검증을 회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오히려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성령을 가장하는 미혹의 영의 자유로운 역사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믿기보다는 의구심을 가지는 편이 훨씬 지혜로운 일이며 성경 말씀을 신앙과 체험의 척도로 삼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성령뿐 아니라 육신의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곳이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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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풍을 날리는 집사

박영돈 목사님 인터뷰 기사를 읽었었습니다.

장풍을 날리는 어느 집사님이 있답니다.
재작년에 노회고시를 볼 때, 저와 함께 봤던 어느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투석을 하시는 분인데 치료받으려 소개받아 어느 교회에 다녔답니다.

성령춤추는 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그 집사님은 병을 치유받았고
어느날 갑자기 손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나가 떨어지는 겁니다.
미국의 어느 치유 사역자와 같은 현상이랍니다.
자신도 맞아보니 꽤 아플 정도의 힘이 느껴졌고 나가 떨어지더랍니다.

그분이 그 집사님에게 기도와 성경을 더 보라고 충고했는데..
그 현상에만 집중해,
집회할 때마다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서 장풍(?)을 과시하곤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 즉 눈에 보이는 것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저희 처가 식구들도 그곳(?) 예배 중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나오기가 쉽겠습니까?
정말 분별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또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 아멘넷 게시판에서: 정리: 나무 목사님

 

 

 

나는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 알렌이라는 무신론자가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독한 무신론자였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든지
무신론에 관하여 아주 달변으로 논쟁을 하는,

자신의 신념에 관해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랑하는 외동딸이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을 하더니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딸의 옆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신이 대신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하는 절박한 마음이 되어 어린 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딸이
진지한 음성으로 아버지께 질문을 했다.

아빠, 마지막으로 아빠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엄마는 예수님이 계시고 천국도 있고,

하나님의 나라도 있다고 하시는데,

아빠는 그것은 다 기독교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고

신은 없고 천국도 없다고 하시기 때문에 난 혼란스러워요.

정말 천국이 없고 예수님이 없고 하나님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에 제게 확실하고 정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저는 아빠의 말을 믿고, 그대로 결정하고 죽음을 맞겠어요.

 

딸이 던진 이 질문에 알렌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얘야, 미안하다내가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다. 천국은 있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도 계신다. 네 엄마 말씀이 맞다.

이 다음에 천국에서 아빠랑 만나자.” )


필자는 직책상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 보아왔습니다.

세상의 지위의 높고 낮음, 지식유무, 귀천에 관계없이 죽음의 침상에 누운 사람들은 반드시 두가지 형태로 나타남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원 받은 영혼,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구원 받지 못한 영혼,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 받은 영혼,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죽음은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한 영혼,  돌아갈 곳이 없는 영혼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 중에 어떤이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손톱에서 피가 나도록

방바닥을 긁으며 "나는 죽기 싫다!"  하고 울부짖기도 하더군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31절)


또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죽음의 침상 앞에서 까지라도 평안을 누리시기를 권고해 드립니다.

진리는 내가 부정한다고 부정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 최송연

6/24/2018
묵상말씀 : 삼상31:1-6
제목 : 하나님을 떠난 인생길을 보세요
                                         김경열 목사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으니라.(삼상31:6)
So Saul and his three sons and his armor- bearer
and all his men died together that same day.
(1 Samule31:6)]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
15년 동안 왕위에 있던 네로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왕궁은 복도 길이가 1마일이나 되는
호화 찬란한 궁전이었고 집안의 모든 벽은
상아와 자개로 장식되었으며 황제가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은 순금으로 만들었고 그가 사용하던 말들도
은으로 장식된 신발을 신겼다고 합니다.

세상 극치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네로 황제는 결코 행복하거나 만족한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네로는 늘 허무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막은 자살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말로는
쾌락을 누리면서도 만족이 없고
소유를 가지고도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또 소수자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동성애 퀴어축제가 7월14일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린다고 해서 염려가 아주 큽니다.

전 세계에 동성애자들이 몰려와 별 해괴한 모습으로
옷을 벗고 거리를 행진하며 축제 퍼레이드를 합니다.

성경에서 동성애는
분명히 하나님을 떠난 죄악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혼자 사는 아담의 모습이 좋지 않아
하와를 주신 것은 남녀 결합의 창조원리입니다.

동성애는 레위기에 땅의 정결을 더럽힌다고 했고
창 18장에서 남색이란 말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유래했습니다.

롬 1:14-32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속한 죄로 나열돼 있습니다.
동성애는 종교적 타락, 윤리적 타락으로 지적됩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며
남녀 간의 결혼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 근간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로마에 폼페이는 한 도시에 화산 폭발이 일어나서
잿더미로 최후의 날을 맞이한 곳입니다.
놀라운 것은 남자가 남자끼리 여자가 여자끼리
사람이 짐승과 관계하는 모습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도 벌써 동성애가 있었습니다.
그곳을 발굴하던 사람이 하나님이 어찌 이런
죄악을 보고 심판하지 않았겠느냐 하면서
이것이 ‘역사의 거울’이라고 했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동성애는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문명들은 결과가
심판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쾌락과 탐욕에만 빠지게 됩니다.
자신도 불행하고 다른 사람도 불행으로 빠뜨리게 되고
결국은 마귀에게 속는 일입니다.

성경에 초대왕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본문에서 사울 왕과 블레셋 사람들의 전투가
매우 맹렬했습니다.

결국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아들(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
셋이 함께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사울 왕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시기와 질투로 마음을 사로잡았고
하나님의 손길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인생의 말로가 비참하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겸손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믿음을 잃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버림받는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앞모습 보다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있을 때보다 떠난 후에 아쉬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사울은 갈수록 인생의 말로가 비참했습니다.

1. 사울은 처음 신앙이 변질되었습니다.(15:17-19)

1) 변화와 변질은 전혀 다릅니다.(19절)

변화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고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나
변질은 본질에서 벗어나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변질되면 썩고 부패합니다.

음식물도 변질되면 버리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변질되면
존귀한 사람도 떨어지고 천박한 사람이 됩니다.

변질되면 높은 자리에서도 내려와야 하고
수취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사울은 변질되었습니다.
계 2장에 에베소 교회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순교를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삶이 풍요해지면서
처음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버렸습니다.

잃은 것과 버린 것은 전혀 다릅니다.
잃은 것은 무의식적인 실수라면
버린 것은 의도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왜요? 풍요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할 때보다 부요할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병들 때보다 건강할 때 더 무너지기 쉽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환란을 당하고 있을 때는
오히려 신앙이 무너지지 않는데
삶이 안정되고 평안할 때
무너지기가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영적 해이함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다윗이 무너졌던 때가
영적으로 해이할 때였습니다.

조지 바너가 쓴 ‘주전자속의 개구리’란 글이 있습니다.
현대 문명에 휩쓸려 영적으로 잠이 들어가는
미국과 여러 나라의 잠자는 교회들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개구리를 물이 든 주전자에 넣어 따뜻하게 데우니
나른하여 잠이 듭니다. 점점 뜨거워오지만
느끼지 못하고 결국은 죽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가 풍요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유럽 교회는 거의 예배당이
텅텅 비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이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은 겸손할 때 왕으로 세우셨습니다.(17절)

스스로 작게 여길 때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과 나중이 같아야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존귀하게 쓰셨습니다.
겸손할 때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노아는 120년간 방주를 지으면서도
처음 먹은 마음이 변함이 없음으로
자신이 만든 방주를 통해 자신의 가정이
모두 구원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가던 첫날 마음이
3일 길을 가면서도 변하지 않을 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시간이 가면서
믿음을 잃었습니다.(13:11-12)

부득이 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입니다.
아말렉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시작했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사기충천하여 싸우겠다고 나섰던 병사들은
하나씩 흩어지기 시작했고 적들은 이미
믹마스 국경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급한 나머지 사울이 제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사무엘이 도착을 했습니다.
사무엘을 본 사울은 선지자여 어쩔 수 없어서
부득이하여 내가 제사를 드렸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전쟁이 이기고 지는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다면 백성이 흩어지든지 적들이 국경을 넘었든지
끝까지 하나님의 방법대로 기다려야 할텐데
믿음을 잃었습니다. 신앙을 잃었습니다.

사울이 부득이하여 어쩔 수 없이 내가 드렸다고 할 때
사무엘은 왕이여 망령된 일을 하였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있거늘
어찌 망령된 일을 하였나이까?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신앙에서 변명과 타협은
믿음을 무너트리는 치명적인 요소가 됩니다.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상실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떠나면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왕 세운 것을 후회하셨습니다.(15:11)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습니다.

후회는 기대에서 빗나갈 때, 충성에서 배신할 때,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세웠을 때 등에 듭니다.
후회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호스피스 전문가인 오츠 슈이치 박사가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로부터
‘후회’라는 말을 1,000명이 훨씬 넘는
환자들에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암 말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가해지는데
그 고통보다 더 깊이 환자의 가슴을 후벼파는
화살촉이 지난 날에 대한 ‘후회’랍니다.

삼상 15:35에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1)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15:19절)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면
아말렉에서 잡아온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조리 죽이겠다고 약속을 했고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왕궁 뒤뜰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어찌 왕궁에서 시끄러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느냐?
내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음으로
하나님도 당신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2)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15:22-23)

22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고 제사보다 나은 것을 알지 못하나이까?
23절에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유없이 버리지 않습니다.

성경에 버림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자들입니다.

벨사살 왕은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성전의 성물로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조롱할 때 별안간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 벽에 글씨를 쓰는데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씨가 나타났습니다.

아무도 해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잡혀온 다니엘이 해석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달아보시고 부족이 보여서
나라를 빼앗고 메데파사로 쪼개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이때 메데파사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벨사살 왕을 죽이고 나라가 둘로 나뉘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며 우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당신을 버린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3. 하나님을 떠난 결과를 보세요.(31:6절)

1) 인생을 번뇌하며 살았다(16:14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고, 삶이 불안해졌고
시기 질투로 악령에 잡혀 살았습니다.(19:9-10)
중심을 잃었고, 방향을 잃었고, 자기정체성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관리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악령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2)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31:6)

전투에서 하나님은 적에게 생명을 넘기셨고
패하게 되었습니다.

자식 세 명이 죽었으니 마지막 칼을 세워놓고
엎드러져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인생의 말로가 너무 비참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떠나 가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권력도 헛되고 명예도 소유도 헛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떠나면 기쁨도 떠나고
행복도 떠나고 소유도 떠납니다.
그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떠나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울의 말로를 거울삼아
평생에 하나님의 품속에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평생감사

                         뉴욕영안교회 제공
                          (917-963-9356)

♡만남과 인연♡

만남은 소중해야 하고,
인연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대 숨쉬는 하늘아래,
그대 머무는 세상에서,
추억 한줌으로 살 수 있음도
행복이라면 행복이지요...

욕심부려 무엇합니까...?
미우면 미운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세상사 순응하며 살 일이지요...
성급한 걸음으로
앞서 갈일 있겠습니까...?

사랑이 부족했다면,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지요...
해답없는 사랑, 규칙없는 사랑일지라도
만남은 소중해야 합니다...
인연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에,
젖은 어깨 털어주고 때묻은 마음 헹구어내
잘익은 봄의 가운데로 함께 걸어가야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를 좁히고
믿음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친구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그 거리를 멀게 하여
무관심이란 비포장도로를 놓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가슴을 잇닿는 그 거리...
믿었던 사람에게서 그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질 때,
내 삶은 상처입고 지쳐 갑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소망합니다...
그들이 높게 쌓아 둔 둑을 허물기 위해,
오늘 하루도 미소지으며
내가 한 걸음 먼저 다가가서,
서로의 가슴에 끝에서 끝까지
잇닿는 강을 틔워 내겠다고...

그리하여 그 미소가 내가 아는
모든 이의 얼굴에 전염되어,
타인이라는 이름이 사라져 가는
소망을, 사랑을 가져봅니다...
우리의 새로운 인연으로 변화하렵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남은 세월을 만끽하렵니다.

펌글

1938년 "9월 9일"은,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날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12시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일본 천황에게 절을 하기로,

교단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결의를 했다.


더 나아가...

신사참배를 하고 난 후,

신도들에게 헌금을 걷어서, 

일제 전투기 3대 값으로 

일본 정부에게 바쳤고,


무녀나 승려들이 받는 천황종교의 세례의식에 

한국교회 목사들까지 다 참여하기도 했다.


총칼의 위협앞에 한국교회가 

신앙을 져버리고 우상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심한 고문과 박해로 인해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여러번 있었던 일이지만...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배도하기 위해 교리까지 바꿔버리는 일은 

2000년 교회사에 전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이땅에서

한국교회가 저지르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끔찍한 배도가 

1907년 대부흥이 일어났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1938년 9월 9일,

이 끔찍한 배도가 낳은 열매는 바로


1948년 9월 9일,

북한 우상 정권이 수립된 날로 저주의 싹이 나게 되고,


1958년 9월 9일 

북한의 모든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폐쇄한 날로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1998년 9월 9일은 김정일 정권이 수립된 날.)


참고: http://reading-tg.com/220810050912


9월 9일...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절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이 당신께 어떤 끔찍한 배도의 죄악을 저질렀고,

그로 인한 무서운 보응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를,

'9월 9일'이란 날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경고의 사인'을 보내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1907년 성령의 대부흥이 임했던 

평양 장대현교회 바로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이 세워진 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의 사인'을 알 수 있다.

참고: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66&replyAll=


그리고, 6.25사변 후

북괴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전국토가 함락되고,

부산경남 지역만 남겨져 있었는데,,


부산경남 지역만 

마지막까지 유일하게 지켜졌던 이유는 바로,

신사참배 결의 당시,

여러지역 교단들 가운데, 

유일하게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한 교단이 

바로 경남노회였기 때문이다.

참고: https://blog.naver.com/up0124/220938117761


행한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경고의 사인'인 것이다.


1948년 이후부터 한반도에서는 

민족 최대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1950년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인한

6.25가 발발해 4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90년대엔 북한에서 

무려 30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인구 2,400만 가운데 

전쟁없이 300만명이 굶어죽은 것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치범수용소에서만

무려 100만명의 사람들이 

70년이 된 지금까지도 학살당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중에도 자비를 잊지 않으셔서,

남쪽땅에서만큼은 

신사참배의 끔찍한 죄악 속에서도,

결코 촛대를 옮기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선

남쪽땅엔 자비를 베풀어주셨는가?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이 나라를 의탁하기로 선포하고

공산 치하에 노예로 붙들린 동포들을 해방하고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는

언약적 선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언약적 선포는 국가적 선포 이전에

남한의 교회들과의 언약이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에게

부르심의 언약을 이어갈 기회를 

한번 더 주시기로 결정하실 때,

하나님의 뜻은 아마 이러지 않으셨을까?


"너희들이 비록 나를 배반하는 죄악을 저질렀지만,

그 죄에 대한 보응은 

이 정도(분단, 6.25)로 유보하고,

나와 맺은 언약을 

너희들(대한민국)이 잘 이어가도록

충분한 지원(부흥과 경제발전)까지 다 해줄께

하지만 언약 꼭 지켜야 한다.

언약을 잘 이행해내는지 지켜보고 있겠어."


그렇게

7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배도로 인한 보응으로 

이 민족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그래도 대한민국에게만이라도,

언약적 부르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는데...


교회가...

고통속에 죽어가는 

북한 동포 해방을 위해


합심해서 발벗고 나선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합심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되려 고통속에 죽어가는 

북한 동포 해방은 커녕 

저 북한 태양신 정권과의

가증한 혼합을 참된 평화인 것처럼 

미혹하는 거짓된 흐름에 

이땅 교회들까지 전부 미혹되어 놀아나면서 

신사참배보다 더 악독한 배도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 되버렸다.


세계선교를 위한 

마지막 때 제사장 나라로 언약을 맺고 

부요와 축복까지 더해줬더니,


총칼의 위협 속에 

마지못해 했던 배도도 아니고,

아주 자발적으로 자랑스럽게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여기며,

다른 이방 잡신들과 가증한 혼합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음녀짓거리(WCC)를

교단들이 앞장서서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다루실까?


신사찬배의 죄악에 대한 보응으로 

6.25라는 참혹한 환란과 

남북이 갈라져 70년간 

북한땅에 내린 저주의 열매를 

그 후손 교회들이 

아주 분명하게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면 정녕 몰라서 이러는건가?)


이보다 더 심각한 배도의 죄악이 

1+1으로 더해진 상황에서,


이런 끔찍한 죄악들을 

어찌 하나님께서 

그냥 눈감아주실 수 있겠는가ㅜ


정녕 우리가 아는 공의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일까?


어쩌다 교회들이 이렇게 영이 닫히고

눈과 귀가 멀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뻔히 보이는 것도 못 보고,

눈뜬 소경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어쩌다...

이땅의 교회가 이 지경까지 와 버렸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땅에는 아직

하나님과의 언약적 부르심을 기억하고,

무너져가는 현실에 애통해하며,

눈물과 간구로 주님께 나아가는 

소수의 깨어있는 중보자들이 있다.


WCC가 열릴 때도,

간절히 중보로 막아서고, 

행동으로 막아서던 자들이 있었다.


북한의 저 우상체제가 박살나고

북한 주민들이 해방되어 

자유복음통일을 이뤄달라 기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지금껏 해온 

애통한 마음과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실거라 믿는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스스로 아무 문제없이 잘하고 있다 착각하면서,

"세계에서 두번째로 선교사 파송하는 나라니까..."

이런 교만한 마음 품고 

죄롤 죄로 여기지도 못하고,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이 나라 교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과 맺은 언약을 파기치 않으시고,


촛대를 옮겨버리는 '멸망'이 아닌,

"죄의 보응"의 '징계'를 허락하셔서,

교회가 그제서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실 것이다.


그렇게 믿고싶다...

그렇게 기도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땅 교회들에 주실 수 있는

마지막 '긍휼'과 '자비'의 기회이다.


(참고로, 2018년 나팔절이 9월 9일임.

나팔절, 즉 ‘로쉬 하샤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함.)



글: 엘샤다이

지금 제주도에 난민 신청하는 예멘인들의 종교,이슬람의 실체입니다.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 등 하나님의 큰 종들이 미국의 부흥에 쓰임받아 곳곳에서 대각성이 일어나자, 그로 인해 나오는열매로써 노예 매매하는 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대각성은 결국 미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 노예제를 밀어붙치는 남부와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비록 전쟁의 심판이 있었으나 북부 지역의 회개를 받으신 하나님은 이후 미국을 세계의 지도 국가로 축복을 부어주셨다. 1700년대 당시 노예무역과 이로 인한 생산량이 영국 경제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을 때 목숨을 걸고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하나님의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가 나타났다. 


이 때도 영국에서 대부흥으로 인한 회개와 각성의 열매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킬 정치가가 나온 것이다. 온갖 음해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국의 국가적 범죄인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이제 국가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국에 산업혁명을 주셨고 노예제가 있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쏟아부어주셨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는 NPT조약을 깨고 핵무기를 만드는 북한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에는 피를 묻히고 싫지 않다는 이유로 북한 노예 해방 전쟁을 거부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김일성 김정일은 스위스 망명길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북한 경제는 완전히 끝장난 상태라 하나님께서 아예 거저 승리의 깃발 꽂으라고 만반의 준비를 해주신 상태였다. 김일성이 전격적으로 남북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개방을 해서라도 일단 살고보자고 할만큼 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압승을 주시기 위해 한미연합군으로 공격할 수 있는 조건도 주셨다. 하지만 노예를 해방하라는 명령에 결국 불순종하고 말았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 이념 중 하나는 바로 한반도를 자유통일하여 그곳에 예수 복음이 자유롭게 증거되도록 하는 기독입국론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미국과 유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을 거부하였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 김일성 공산주의 태양신 정권을 무너뜨려 노예를 해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남한은 북한의 노예를 해방해야 할 십자가를 지기고 언약을 맺은 것이었다. 괜히 하나님께서 이땅에 기적적인 경제발전과 부흥을 허락해주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보다 못 살던 세계 최빈국 수준이던 나라가 하나님 은혜로 돈 좀 벌었다고 그 번영을 남한 혼자 누리고 손에 피 묻히기 싫다는 거짓 평화에 집착한 나머지 북한에 볼모로 붙잡혀 노예로 살고 있는 북한 동포들 해방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무시한 결과 남북한은 모두 저주를 받게 되었다.


남한은 그 이후 IMF 구제금융 신세를 져야 했으며, 이후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와 비정규직 양산의 대가를 지불해야했다. 또 북한은 94년부터 3년 간 '고난의 행군'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기근으로 3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어야 했다.


이후 김정일 정권이 출범하고 북한판 문화대혁명인 '심화조 사건'으로 수천명이 학살당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아사자와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덤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4:17)


역사의 주관자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다. 얄팍한 인본주의로 계산기 두드리면서 사명을 무시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 하나님은 역사로부터 배워라고 우리에게 무수한 역사 데이터를 허락하셨다.


지금이라도 고통받는 북한 주민 해방을 선포해야만 한다. 문재인 정권이 못하면 한국교회가 나서서 중국 접경 지역과 동남아에 떠도는 탈북자들을 구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바, 저 북한 땅에 예수 믿을 자유를 줄 사명을 잊는다면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살후 2:11~12)


나라와 민족이 우상숭배함으로 하나님 마음을 망쳐버리면 아주 오랜 기간 미혹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신다. 말라기 이후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400년 간 선지자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을 능멸하자 1000년 이상 종교 암흑기에 내버려 두셨다.


이단 사이비 로마 카톨릭에 시달렸다고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살아보자고 하니까 르네상스 미혹에 취하게 하셨고, 하나님 없이 인간이 자뻑으로 취하는 쾌락에 젖으니 미혹에 미혹을 더하여 합리주의 이성주의 철학에 온 나라가 빠지게 하셨다.


이어서, 인간들이 그렇게 좋아라하는 이성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지 보았더니 합리주의 이성주의 철학의 본산인 독일에서 나치 전체주의가 나왔고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과학을 하나님보다 높인 나머지 진화론이 나오자 창세기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부정하여 구원받는 자들이 적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무신론 유물론에 기반하여 인간의 공동분배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공산주의가 나와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 전세계의 절반이 공산국가가 되었다 망했고, 그 과정에서 1억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 당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이 모든 것이 말하는 바는 결국 무엇인가?

하나님 없이 인간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것이 결국 인간을 지옥에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안 그런 것 같은가?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교회가 WCC와 종북으로 배도한 결과, 나라 전체가 공산주의, 동성애, 페미니즘, 이슬람 똥을 맛있다고 먹는 대미혹에 빠진 것이다. 다만 소망이 남아 있다면 아직 바알에 무릎 꿇지 아니한 그루터기들이 중보한다는 것뿐이다. 주님께서 부디 한국을 버리지 않으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글 출처: Larry Gates님 페이스북

부활 가르침의 본질

  

본문: 딤후 2:16-18

요절: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4절에서 사도는, 교회의 교사는 교회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는 사람과 절대 논쟁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이들과 논쟁에 들어가면 옆에서 듣는 사람도 영향을 받아 망하게됩니다. , 교인과 교회가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 대신 교사는 진리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것을 먼저 자기가 실행하면서 가르치고, 또 성도들이 실행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사도는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리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이들이 부활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부활 가르침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이며, 이것 없이는 우리 믿음도, 기독교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므로(고전 15:14), 우리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복습하고자 합니다.

 

지금 주목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는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대부분 오늘날 교인의 문제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대체로 부활을 믿습니다. 교회를 상당히 파괴한 루돌프 불트만과 몰트만과 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르치고 믿는 부활은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과는 전혀 다릅니다. 독일 일반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신자도 이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분명 부활 신앙은 가졌는데, 무슨 부활을 믿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단 가르침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사회, 후기 사실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부활 가르침이 교회에서도조차 올바로 선포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은 우리가 죽은 후 영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정말로 중요한 가르침이므로 우리는 성경의 부활 가르침을 정확하게 알고, 믿고,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삶이 전혀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죽으면 영원한 심판으로 눈을 뜨는가, 아니면 영원한 구원으로 눈을 뜨는가를 결정합니다. 오늘 확실하게 부활 가르침을 배워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사도는 망령되고 빈말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이 나오면 대화에 응하지 말라고 합니다. 망령되다는 말은 거룩한 성도에 걸맞지 않은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말합니다. 그 말이 매우 영적으로들릴지라도 그것은 빈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되며 우쭐하게 되어 더욱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불경건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이것이 오히려 진전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교회는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토론을 그치고 이들에게 말씀을 쓰인 그대로,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순종하면 그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고, 이들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면 영생을 완전히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할지라도 회개하지 않고 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진다면, 교회는 이들을 축출(권징)해야 합니다. 그 전에 참을 수 있는 대로 참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복음을 가르치면서 다른 사람이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를 게을리해서 때가 너무 늦으면, 이들이 사람을 선동하여 오히려 목사, 장로가 쫓겨나고 교회는 완전히 이단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을 여러 명을 둔 교회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는 다른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신자가 대부분이므로, 오늘날 목회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17절이 이들의 문제를 말합니다: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악성 종양을 적시에 잘라내지 않으면 결국 몸이 죽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교인은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교제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 다른 복음, 다른 말이나 생각은, 악성 종양이 퍼지는 것처럼 교회에 영향을 줍니다. 갈수록 교회 지체가 그곳에 빠지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영에 감염된다면, 이때는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체 일부분인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는 일은 없도록 미리 조처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을 댑니다. 그 이유는 사도가 무엇을 말하고 누구를 문제로 삼는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후메네오는 이미 딤전 1:19-20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버렸고 바울은 그를 무섭게 징계했습니다(참조: 고전 5:5). 그 후로 그는 이제 교회 밖에서 복음을 위조하여 다른 복음을 만들어 전하는 사람들의 지도자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결단력이 없었더라면, 에베소 교회는 암이 퍼져서 이단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18절에서 사도는 이들의 문제를 분명히 밝힙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18)

 

이들은 잘못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면 먼저 성경이 부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쓰기 한참 전에 이미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부활에 대해 상세하게 가르쳤습니다. 그곳 교회에서도 부활을 두고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순서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고전 15:23).

 

이에 따르면 먼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그다음에 그분이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자들이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아무도 부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마감하시고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시체가 썩어서 흔적도 없어진 사람도 예수님께서 부활시키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혀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3-44).

 

우리는 지금 땅에 합당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부활 시에는 하늘의 영광과 영생에 합당한 몸을 입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영광된 몸입니다(고전 15:40-41). 모두 똑같은 몸을 입는 것이 아니라, 외관이 서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만 부활할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도 새로워집니다. 우리는 완전히 성화 되어 하나님을 면전에서 뵙게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육신이 우리를 정욕으로 자극하지도 않고, 사단도 불못에 있으므로 우리를 충동질하지 못합니다. 죄는 더이상 간 데가 없고,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며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내일 복권이 당첨되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내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광된 부활에 참여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지금 에베소 교회에서 문제 되는 사람은 이미 부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영지주의 가르침으로서, 이들의 부활론은 기독교 가르침과 겉으로는 매우 비슷하게 보이고, 이들은 일반 교인에게. “우리는 너희와는 다른 고급 신자다라고 자랑하므로, 점차로 이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게 됩니다. 이들의 부활 가르침은 신비하게 보입니다. 그 안에 깊은 무엇이 있는 것 같아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들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이들이 엑스터시 때 부활이 일어나서 완전한 구원이 이미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영혼이 드디어 육신의 감옥을 빠져나와 구속 받은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것이 가끔 일어나지만, 죽고 부활한 다음에는 항상 이러한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 가르침이 기독교 가르침과 비슷한 것은, 6장에서 그리스도인도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다고 하고, 죽어서도 다시 부활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는 엑스터시를 통해 먼저 부활하고, 죽어서 온전히 육으로부터 해방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과 성경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양자는 전혀 다릅니다. 이들은 부활을 체험한 이후에도 육을 제어하고자 대단한 금욕생활을 합니다. 혹은 이들은 육은 영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영지주의파도 있었습니다. 1945년에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도울 김용옥이 까불고 다니면서 영지주의를 많이 소개하면서 신약성경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합니다(“기독교성서의 이해”). 이것은 유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이야기입니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영은 선하고 육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가 악한 육을 입을 수가 없으므로, 단지 육을 입을 것으로 보인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인간이 죽었다는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자기들만 알고 있는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승천 이후에 그들에게 이 비밀 코드를 알려줍니다. 이것이 영지라는 것입니다. 이 영지는 자기들만 알고 그들만 관리합니다. 이것을 터득하려면 많은 비밀 제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단전문가 정동섭 박사에 따르면, 신천지가 바로 이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람을 합숙시켜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는 또한 구원파가 영지주의적 이단임을 밝혔습니다. 박옥수에 따르면, 죄 사함을 깨달으면(영지를 얻으면) 의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는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진짜 의인이 되므로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된 후에는 절대 회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구원파의 진정한 복음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파격적이고 기쁜 소식입니까? 회개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를 기쁜소식선교회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가면서 혼합종교 운동이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영지주의 가르침이 이미 교회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체계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을 통한 깨달음을 좋아하고, 유럽인들처럼 수년간 조금씩 배워 높은 지식에 도달하기보다는, 순간적인 통찰(영지)을 통해 도를 깨달으려는 한국인의 유전인자가 여기에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이러한 경향 때문에 처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우리는 특별한 깨달음을 좋아하고, 이 깨달음으로 성경을 기발하게 재해석하는 사람이 많고, 이 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이단의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교묘하게 성경 가르침의 옷을 입혀 가르쳐, 많은 사람을 모으고 대형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올해 1월에 홍정길 목사는 다음과 같이 실토했습니다: "누가 양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목자라 할 수 있겠나.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목회는 사라지고 매니지먼트(관리)만 남게 됐다" "주님이 보시기에 나는 가짜 목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관상기도 찬양자인 홍정길, 이동원과 같은 무리를 가짜 목사로 알고는 있지만, 그가 이것을 실토한 것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따르면 가짜 목사는 사람을 물어 찢는 늑대이며, 그가 죽어서 가는 곳은 지옥이며, 일반인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태연히 나는 가짜 목사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믿음을 통한 구원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하나님입니다. 그가 이것을 지금 실토하는 것은, 그가 누릴 영광은 이미 다 누렸으니, 이제 죽기 전에 마음에 남은 부담을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가 받을 죄의 삯(영원한 죽음)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죄가 없으시므로 죽음이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분은 죄인도 부활에 참여하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죄인이 부활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시인하고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이것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죄 고백은 간단한 입 놀림이 아니라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런데 수십 번 죄 고백을 해야 참다운 고백이 나오므로 수십 번 죽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인, 일본인에게는 진실한 죄 고백이 정말로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은, 칼로 자신을 찔러죽이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고백이 매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죄를 고백하는 자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기까지는 적어도 30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진심으로 아내에게 과거의 제 잘못을 사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아내에게 사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진심으로 사과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한 번 진실되게 죄 고백을 한 사람은, 계속 죄 고백을 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죄가 더욱 잘 보여서 계속 회개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새 삶으로 부활했으므로, 자기 죄가 더 많이 보이고, 자기의 추한 모습을 알므로, 이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부활했지만, 아직 옛사람을 지니고 있으므로 계속 공격을 받아 연약해져 죄를 짓는 경우가 있고, 이것을 마음 아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또한, 그는 죄인이지만, 사함 받은 의인입니다.

 

내 안에 아직 옛사람이 살아있고, 이것은 내가 몸으로 부활할 때에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으므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옛사람의 충동질 때문에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나는 때로는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이며 우리가 일생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권능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계속 믿음과 능력을 주셔서 죄에 대항한 투쟁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취하는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권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고전 15: 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이미 부활한 자의 표적입니다. 다른 표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통해 이미 깨달음이 왔으므로(영지를 받아) 나는 거듭났으며(부활했으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니(세례도 받고 성찬식에도 참여하고, 교회 생활을 적극 하니), 내가 구원받은 것은 지극히 다양하다. 내 구원의 확신은 아무도 흔들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구원(영지)를 받은 증표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자기는 고급 신자라는 표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하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방언과 구원은 관계가 없을뿐더러, 아무도 자기가 진짜 방언을 하는지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영지주의자는 자기는 고급신자이며, 일반 교인은 하급신자라고 합니다. 한국인은 비교우위를 좋아하므로, 될 수 있으면 고급신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의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고 합니다. UBF, 한국 Navigator가 이런 무리에 속합니다. 대형교회도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이 의의 열매(성화)을 가르칩니다. 구원은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은혜로 그분의 뜻이 담긴 계명을 지키면서, 회개하면서 거룩한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거짓이며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시발이 된 루터의 95개 조 제1항이 그리스도인은 매일 옛 아담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 관상기도를 한다든지, 방언을 한다면 그는 입신한 영지주의자와 같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기도하거나, 말씀을 외우고 읽음으로써 위로를 찾는 것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이미 의인이 되어 있으므로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에게는, 늘 마음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마음이 영원한 부활에 가 있으므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면 마음에 큰 부담이 생겨 회개하여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그가 부활했다는 표시이며, 앞으로 새 몸을 입고 영생으로 부활한다는 보증입니다. 여러분이 이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이 죄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죄를 해결하는 길은 회심/ 회개 외에는 없습니다. 회개가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부활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MvxA/97


출처: 영적분별력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

★다시 읽어도 좋은글★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면 友情(우정)에 금이 가고
자식과의 약속을 어기면 尊敬(존경)이 사라지며
기업과의 약속을 어기면 去來(거래)가 끊어집니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엔 負擔(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못 믿는다면 세상엔 나를 믿어줄 자 없으리라 봅니다.
뛰어가려면 늦지 않게 가고 어차피 늦을 거라면 뛰어가지 마라.
후회할 거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라면 절대 後悔(후회)하지 마라.

죽은 博士(박사)보다 살아있는 멍청이가 낫다.
그래서 자식을 아주 잘 키우면 國家(국가)의 자식이 되고,
그 다음으로 잘 키우면 丈母(장모)의 자식이 되고,
적당히 잘 키우면 내 자식이 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下水道(하수도)가 막혔다고, 電球(전구)가 나갔다고,
미국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 없고
서울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볼까말까 하는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고
평생에 한두 번 볼 수 있고
사진을 통해서나 겨우 만날 수 있는 손자들이
내 손자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Family”의 어원은 …….
아버지, 어머니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즉 , Father And Mother I Love You " 의
첫 글자들을 합성한 것이랍니다.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사내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습니다.

權勢(권세)와 名譽(명예), 富貴榮華(부귀영화)를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을
淸廉潔白(청렴결백) 하다고 말하지만
가까이 하고서도 이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淸廉(청렴)하다 할 수 있다.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모르는 사람은
高尙(고상)하다고 말하지만
권모술수를 알면서도 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고상한 人格者(인격자)이다.

예쁜 여자를 만나면 三年이 행복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면 三十年이 행복하고,
知慧(지혜)로운 여자를 만나면 三代가 행복하답니다.

잘 생긴 남자를 만나면
결혼식 세 시간 동안의 행복이 보장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통장 세 개의 행복이 보장되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를 만나면
平生(평생)의 행복이 보장 된답니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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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트럼프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그에 대한 글을 조금 더 이어가보자면,


그가 사업가 출신 정치가이든,

막노동 출신 정치가이든,

영적원리는 어느 영역을 초월하여

세상의 전 영역 가운데 다 적용된다.


특히 지금 같은 시대에 

정치 영역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현실만 놓고 보더라도,

좌파우파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나,

북한정권과 연계된 

치열한 영적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든 안하든 엄연한 현실이다.


더군다나 우리 한반도 현실이자 

선과 악의 문제인

북한정권의 존속여부의 문제를 

단순히 정치문제로 여기고, 

또 트럼프를 단순 정치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타당치 않은 접근이고, 


정치문제엔 영적원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너무나 순진무구한 생각이다. 


트럼프가 

세상적 스타일로 정치를 하든,

성경적 가치관으로 정치를 하든,

영적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교회 장로인 모 국회의원 후보가,

선거 유세 일정 가운데, 절에 찾아가

법명을 받고, 참배를 하면서, 

"부처님은 인류에게 

참 평화와 구원을 주시는 구원주이시다."

라는식의 말을 했다고 치자.


그가 한 말이 아무리 빈말이고,

그 사람은 세상적 감각으로,

누가 봐도 당연한 선거유세의 한 과정으로써

임했을 뿐이라 해도,

영적 원리에서의 영적 열매는,

크든작든 맺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정치가가 어떤식으로 정치를 하든,

그가 설사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가 진리를 대적하는 

반진리적 메시지를 선포하거나, 행동을 해도, 

그 영역 가운데 영적 열매는 반드시 맺혀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복음사역자인지, 정치인인지를 

구분해야 할게 아니라,


그가 사람들에게 있어서 

'권위자'인지 아닌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적 원리에서의 흐름은

'권위'의 여부에 따라 

파급력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트럼프 김정은 회담 직후,

트럼프가 아닌 길거리 노숙자와 

인터뷰를 가졌었다면,

그래서 회담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 노숙자가 

"김정은은 자기 인민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했다면,

그 메시지가 전세계 대중들에게 

영적 메시지로서의 파급력이 어떠할까?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세계 최고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대놓고 그런 소리가 나왔다면, 

이 영적 메시지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저 말을

자기 측근들과만 주고받은건데, 

어떻게 비밀이 세나가서,

유튜브에 올라온 그런 차원이 아니다.


전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송 인터뷰를 통해 아주 자랑스럽게,

"악을 선하다"라는 반진리적 메시지를 공표했다.


이것은 우리의 주관적 판단하에 

단순한 말실수라고 치부해버릴 수준이 아니라,

세상의 전영역 가운데 적용되는 영적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선포되어 미혹의 씨앗이 

전세계에 뿌려지게 되는 것이다.


트럼프는 공식적으로 

김정은이 자기 인민들을 

사랑한다는 점에 놀랐다고 말했다.


이 부분을 가지고 또 

김정은이 앞으로 자기 인민을 

사랑할거란 차원의 얘기라는 둥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해석하든 본인 마음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그렇게 트럼프에 대해 믿고 싶은 본인만의 해석이지,


"김정은이 인민을 사랑한다"는 그 워딩이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있는 그대로의 메시지이다.


만에 하나 

그게 트럼프가 말하고자 했던 의도라고 해도,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 인터뷰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 중,


트럼프의 숨은 의도들과 북한정권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본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지각없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이걸 우리처럼 이리 해석 저리 해석해서 

받아들이는게 아니란 말이다.


최소한의 분별력이 있는 우리는 

언론미디어에서 

사실관계를 교묘하게 뒤틀어서 

거짓선동 보도하는 것을,

캐치해내고 분별하기도 하지만,


지각없는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은 

보도를 보도 그대로 믿지,

거기서 거짓을 걸러내는 

그런 자정능력이 전무하다.


그렇게 사람들은 거짓에 선동되고,

영적으론 미혹의 길로 이끌려가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다윗왕도 블레셋에서 침흘리며 미친척해서 

위기를 모면하고 기지를 발휘한 것처럼

트럼프를 거기에 빗대는 경우도 있는데,


다윗왕의 경우와 트럼프 문제는 

조금도 빗댈만한 상황 자체가 전혀 아니다.


다윗이 미친척하며 

"바알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는 참신이다."

이런 망령된 소리를 내뱉기라도 했는가?


단순히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에서 벗어난 상황과,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악을 선하다 말하는 경우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리고 트럼프가 지금껏 

보여준 친기독교적 정책을 펼쳐왔더라도,

그것과 이번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그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했든,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해 회개치 않으면,

선한 일들로 인해, 그 죄는 죄가 아닌게 되는가?


그가 본인 입으로 공식적으로 쏟아낸 말이 

어떻게 영적 원리에 의해 뿌려졌는지에 대한 

팩트 자체를 가지고 얘기하는 상황에서,


그가 이전에 무슨 정책을 펴고, 과업을 냈는지는,

이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일 뿐이다.


나 또한 트럼프 회담이

어떤 나름의 숨겨진 의도가 있고,

또 그 의도에 의해,

합의한 사항과는 다른 국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숨은 의도는 의도고,

트럼프의 회담 이후 

일어난 그 분명한 선포와 메시지들로 인해,

영적 원리에 의해 맺혀질 열매는 별개의 문제다.


트럼프가 나중에 대한민국에서 손을 떼고,

북한을 치든, 중국을 치든,

그렇게 되기까지의 기간동안

어찌되었든 트럼프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나간 말들에 의한 열매는 

어떤식으로든 맺혀질 수밖에 없는게 

영적 원리인 것이다.


오히려 교회안에 국한된 영적 범위보다 

그 범위가 훨씬 더 광범위한

전세계적 차원의 작금의 문제는 

영적 파급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트럼프에 대해 우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 부분을 가지고 

영적원리에 입각해 영적인 눈으로 보자는 것을,

왜 많은 우파성향 기독교인들은

이렇게까지 트럼프에 대해 

긍정적인 집착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영적 원리는 파악하고서,

트럼프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지금 돌아가는 현실을 바라보자는 것을,

무슨 트럼프를 깍아내리기 위한 

악한 의중으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그냥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생각하며 사는 길밖엔 없을 것이다.


대환란 때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미혹'이 그가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전 세계에 충만히 깔아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미혹은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우리가 전혀 생각치 못하는 

논리와 사상, 이념, 가치관을 통해서 역사한다.


세상에서 오는 온갖 그럴듯한 내면의 가치들이 

내 생각, 내 사상과 맞아떨어지더라도,

그것의 영적 본질을 진리안에서 바르게 분별하고

중심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면,

내 생각과 논리가 얼마나 진리안에 부합된 것인지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져 내 생각, 내 논리, 내 기준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며

자기 고집대로만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 

가장 큰 위험이자 

또다른 미혹의 전조이다.  



글: 엘샤다이

나는 미국이 왜 대북 군사옵션을 포기했는가를 두고 많은 생각을 했었다. 최근에 그 진짜 이유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트럼프가 대화모드로 돌아선 이유에 대하여 몇차례 이런 식으로 말했었다

"수백만이 죽을수도 있는 전쟁을 피한 것은 잘한 일이다."
"남한 수도권에는 2~3천만명의 시민들이 살고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미 국방부 관계자도 언론에 비슷한 이야기를 흘렸었다. "북한에서 벌어질 끔찍한 인명살상 때문에 군사옵션을 주저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베트남전 이후 벌어진 미국 주도의 전쟁들은 양측 모두 합해서 사망자가 1~5만명 안쪽에서 끝났다. 그것도 민간인까지 포함해서. 미국이 주도하지 않은 내전 성격의 전쟁에서는 수십만명 수준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트럼프나 미 국방부는 수백만명을 언급하는 것인가? 그냥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표현하기 위한 레토릭 과장법이라 이해해야 할까?

내가 볼 때 이것은, 단순한 레토릭 수준의 과장법이 아니라, 미국이 북한과 전쟁할 경우엔 불가피하게 핵전쟁을 염두할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동안 중동에서 성공했던 재래전을 놔두고 왜 북한에만 유독 핵전쟁을 염두하는 것인가?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표면적인 논리이지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다.

가장 뼈아픈 핵심적인 이유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1년 넘게 한국 정부를 상대하고 관찰해본 결과, 한국군이 동참하지 않을 것임을 미국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최고위 의사결정자들은 물론이고, 한국 국방부와 대부분의 국군 장성들 조차 문정권에 꽉 잡혀 조금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며 설설 기고 있는 실태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미연합 작전에 의한 선제 공격이 불가능하다.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의 전쟁을 재래전으로 승리하려면 무조건 한미연합 작전으로 육해공 상에서 한미연합군이 동시에 공격해야 한다.

동북아 해상에서는 일본, 영국, 호주, 캐나다 연합해군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재하고,

한반도 근해는 수십년간 이곳에서 대북작전을 위한 연합훈련을 해 왔던 한미연합 해군이 한반도 해상을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공중에서는 미 공군이 북한의 핵시설, 미사일기지, 레이다기지, 기타 방공기지 등 전략 거점들을 타격하고, 수도권을 위협할 북한 장사정포는 한국 공군이 담당한다.

땅에서는 한국 육군이 주력이 되어 휴전선을 밀고 북진을 하고, 이로써 북한 육군을 황해남도 이남에 묶어두면,

평양으로 진격할 미 해병대는 손쉽게 평안남도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할수 있게 되고, 미 해병대의 상륙작전이 완료되는 즉시 한미연합 특수부대가 미공군의 수송기를 타고 참수작전을 위한 공수작전에 돌입한다.

이렇게 되면 실질적인 공격/제압 작전은 길어야 2주 안에 끝난다. 이후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북한군 무장해제를 위해 한국군이 주력이 된 한미연합 육군이 점령군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며 전체 전쟁은 수개월 안에 마무리 된다.

원래는 이런 시나리오로 갔어야 했다. 이렇게 됐다면 재래전만으로 최소한의 희생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북한을 해방시킬수 있었다.

이 시나리오의 핵심은 한미연합 작전이다. 수십년간 같이 훈련을 해왔던 한미연합 육해공군이 동시에 번개같이 움직여, 일시에 모든 화력을 집중시키며 기동작전을 펼친다면, 핵무기의 사용 없이도 충분히 최단시간에 북한군을 제압할수 있었다.

이 한미연합 작전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미국이 혼자 전쟁을 하게 된다면, 원래는 한국 육군이 붙잡고 있어야 할 휴전선 부근의 북한 1,2,3,4 군단들이 미 해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해안선으로 몰려오게 된다. 미군의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고, 미국은 불가피하게 핵전쟁을 심각하게 고민할수 밖에 없게 된다.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이 살상될 것이며, 핵미사일을 맞은 북한이 악에 받혀 핵보복을 하게 되면 수도권의 2~3천만의 시민들이 핵 위협에 그대로 노출된다. 트럼프도 미 국방부도 핵전쟁을 하느니 다소 기만적이긴 하나 대화모드로 가 보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결국 이 나라가 전쟁이 두려워 한미동맹을 멀리하고 미군과의 연합작전을 포기한 것, 이것이 현재 트럼프가 대화모드로 들어가게 된 주 이유이며, 나아가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를 마음속 깊이 염두하게 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이다.

펌글

말세의 사람들과 교인들 I

 

본문: 딤후 3:2

요절: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지난주 우리는 이미 말세가 가까웠고 사회에 불법이 가득하고 교회도 그 영향을 받아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바로 전의 상태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때가 가까워 사회에서 살기도 어렵고, 교회 생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1절에서 이때를 나쁜”, “고통스러운시기라고 하면서 2-5절에서 이런 시대에 사는 사람의 성품이 어떤지를 묘사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자율의 길을 갔을 때, 그들의 죄가 성숙하면 이러한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2-5절에 열거한 것을 악덕목록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악덕목록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성경은 인간의 악한 행실을 고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나타나는 19개 악덕은 모두 불신자의 성품과 태도입니다.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대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진리대로, 친절하고 섬기려는 자세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살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이들이 목사가 되었을 때,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이런 목사들 때문에 지금도 시간과 정신을 낭비하며 상당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너무도 경건해서 함께 일을 시작하면 언젠가는 본색이 드러나서 일이 깨어지고 제가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런 일을 당하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해서 사람 관계를 끊고 교회를 완전히 떠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것을 미리 경고하셨으므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진짜 말세에는 이러한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므로 교회는 경건의 능력을 잃게 되고 위선으로만 가득 차서 극도로 어려워집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목록을 통해 남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판하고자 합니다.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도 이 목록의 어느 하나라도 자기에게 해당한다면, 구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미 거짓 복음으로 조금은 세뇌되었으므로, 별 생각없이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삽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아무리 말씀을 가르쳐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면 자기를 냉철하게 점검하고 회개해야 하는데, 자기는 잘 지킨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에서 보통 악덕을 세밀하게 가르치지 않아 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실정입니다. 설교자가 바로 당신이 이런 사람이다라고 꼭 집어서 지적하면, 감사하지 않고 분노하여 교회가 파탄 나거나 설교자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길을 제시하면 돼지가 진주를 밟듯이 공격적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말세 교회의 한 단면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개하여 거룩한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시고, 마음속에 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감화와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이러한 악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phil-autos)

 

유럽의 일반 기독교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이웃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하고(물론 좀 극단화된 표현입니다만),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는 자기가 정의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에게 적어도 두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경 말씀을 순종하므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유지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 사랑을 자기가 정의하므로, 자기가 입법자가 되는 휴머니즘-계몽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는 계몽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계몽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인에게는 Selbstverwicklichung(자기 계발, 자기완성)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말의 중심에는 자기(그리스어로 아우토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선하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잘 개발하면 낙원이 온다는 생각이 근저에 있습니다. 오늘날 독일에는 녹색정당이 이 사상을 실현하고자 그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곳에서는 이 이념에 따라 법을 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자기를 사랑하며가 오늘날 유럽인 생각과 감정의 기본이 됩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온 유럽은 낙원이 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타락했습니다. 자기만 알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고,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청소년들이 늘어났습니다. 결손 가정도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한국은 공공장소가 갈수록 깨끗해지는데, 유럽은 갈수록 더러워집니다.

 

전 영역에서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으므로, 남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많이 둔 부부라고 할지라도, 갑자기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이혼하고 그를 사귑니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극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통해 배우자가 상처받고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규정한 이웃 사랑의 결과입니다.

 

물론 유럽인은 막무가내는 아닙니다. 높고 깊은 문화적 전통과 기독교 유산이 있어서 이것이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정직과 성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필-아우토스(“자기를 사랑하고”)가 근저에 있으므로, 좋은 문화적 유산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으며, 사회적 불안이 점차로 증폭되며, 사람 사이가 조금씩 균열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과 태도가 교회에 침투한 것입니다. 유럽 교회는 한국 교회 상황과 전혀 다르므로, 한국 교회로 넘어가겠습니다. 신앙을 자기완성이나 이익의 도구로 삼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거나 지인의 범위를 늘인다든지, 건강, , 행복을 증진한다는 생각입니다. 집사, 권사, 장로, 목사가 되면 사회적 명망도 생깁니다. 목사는 큰 교회를 이루면 그가 받는 영광은 말할 수도 없이 큽니다. 이것이 바로 필-아우토스(“자기를 사랑하고”)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는 매우 친절하고 은혜로운 교우가, 금전이나 명예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원수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저희 교단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첫 단계는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도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며, 셋째 단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정반대인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 해야 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든 죄가 파생됩니다. 앞으로 나올 18개 악덕은 자기 사랑의 결과라고까지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이 솟아나온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살인(미워하는 것)간음음란도둑질(탐내는 것)거짓 증언비방(남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이니”( 15:19). 그리스도인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이런 일을 하면서도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남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이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죄를 너무나 사랑하므로 이것을 놓지 않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사랑해서 이 악덕을 키울 것이 아니라 죽여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의 말씀이므로, 우리가 정말로 명심해야 하며,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항상 자기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2. “돈을 사랑하며

 

성경은 가난함이 부자보다 낫다는 것을 계속해서 가르칩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면서 부자가 되려는 마음에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6:20-21).

 

오늘 본문에서는 주로 돈이 있어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13:16).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자기 재산을 움켜쥐지 말고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했음을 감사하지 않는 것으로서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돈을 지출하는가에 따라 그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데에 돈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구제나 하나님 사업에는 인색합니다. 이것은 돈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선물이며 자기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소유욕으로부터 해방하도록 무섭게 훈련하지 않으면, 돈 사랑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들을 경건한 자들이라고 칭찬했으며, 자신도 그렇다고 굳세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바리새인들은 이 비판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14). 혹시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의 고소에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의식 표면으로 떠오르지도 않은 것까지도 아시고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자기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심판 기준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3. “자랑하며

 

이것도 자기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 돈, 학식, 지식, 지위, 출신을 자랑하므로 기회만 있으면 이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느 모임에 가도 이들은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큰소리를 냅니다. 생각이 항상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으로서 이런 사람을 교회 일군으로 세우면 큰일 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이러한 경향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러한 식으로 목회하지 않으면 교회에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풍조에 물든 목회자와 교인은, 자기 영광을 마음껏 구해서 영광을 다 받고, 제일 마지막에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 얼굴에 침을 뱉어야 마땅한데, 대부분 이 말을 듣고 아멘합니다. 이렇게 교인은 세상 사람이 보기에도 유치한 우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를 잘라내야 합니다. 이것이 없어야 자기가 자유로워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이런 사람 때문에 항상 어지럽습니다.

 

 

4. “교만하며

 

이것은, 자랑하는 것과 성질은 같지만, 죄질이 더 악한 것입니다. 교만은 자기 상태(실력)를 잘 모르므로, 자기를 실재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는 과대망상적인 현상입니다. 게다가 남을 낮게 보는 병적인 현상까지 겹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남이 하는 것은 우습게 보이고 자기가 하는 일은 항상 옳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남이 끝까지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더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중간에 말을 끊고 개입합니다.

 

제가 모 대기업체에 근무할 때, 회사의 장이 사원의 개인 생활에까지 간섭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 가도 자기가 다 시킵니다. 사원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목사나 힘이 있는 장로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줄을 자기가 쥐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 단체는 결혼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혼하라고 명하면 이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자가 신자의 인생 깊은 곳에까지 간섭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흉내 내는 교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이러한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남을 지배하려는 현상이 특히 한국 교회에 심합니다.

 

한국인에게는 이러한 유전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자랑하는 사람과는 달리 매우 겸손하고 사랑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마음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평소에 나타나지 않지만, 결정적일 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말씀을 잘 배우지도 않고 영접하지도 않으므로 그 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하므로 아무도 그의 속을 잘 모릅니다.

 

교만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죄를 완전히 자백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도 해야 하지만, 사람에게도 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교만 죄를 벗을 수 없습니다.

 

  •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정리하면, 예수님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보통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교만한 것이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교회도 이와 같이 됩니다. 그러면 교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게 되어, 자기도 이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겉으로는 예배가 활성화되어도, 내적으로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이미 무너져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 경건한 삶을 위해 매우 애써야 하며,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여 실천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과 그분의 감화로, 성령님의 능력을 받아, 새사람의 본질에 맞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일이 실천하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는 믿음의 형제를 찾아 같이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돕고 격려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사회나 교회 상태를 보고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MvxA/99



출처: 영적분별력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1. "앞"에서 할수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마라.
뒷말은 가장 나쁘다. 궁시렁 거리지 마라.

2.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적게 말하고 많이들어라. 들을수록 내편이 많아진다.

3.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 된다.
흥분하지마라. 낮은목소리가 힘이있다.

4. "귀"를 훔치지말고 "가슴"을 흔드는 말을 하라.
듣기좋은 소리보다 마음에 남는 말을하라.

5. 내가 "하고"싶은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싶은 말을해라.
하기쉬운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해라.

6. 칭찬에 "발"이 달려있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있다.
나의말은 반드시 전달된다. 허물은 덮고 칭찬은 자주해라.

7. "뻔"한 이야기보다 "펀"(fun)한 이야기를 해라.
디즈니 만큼 재미있게 해라.

8. "혀"로만 말하지말고 "눈"과 "표정"으로 해라.
비언어적 요소가 언어적 요소보다 힘이있다.

9. 입술에 "30초"가 가슴에 "30"년이 된다.
나의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수있다.

10. "혀"를 다스리는 것은 나지만 내 뱉어진 "말"이 나를 다스린다.
함부로 말하지말고 한번 말한것은 책임을 져야한다.
소통은 귀로듣고 눈으로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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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젊은이들을 향하여   KAIST 이병태 교수의 하소연 !

"헬조선이라 빈정거리지 마라? 부모세대야말로 전부 울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청년들에게 앞 세대의 성취와 피땀을 폄하하지 말라는 KAIST 이병태 교수의 호소가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가 지난 7월16일 페이스북에 올린 ‘젊은이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라는 글이다.

그의 글은 9월17일 오후까지 25 만명  이상 공유되는 등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

[젊은이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

이 땅을 헬조선이라고 할 때, 이 땅이 살만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욕할 때, 한번이라도 당신의 조부모와 부모를 바라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기 바랍니다.

초등학교부터 오뉴월 태양 아래 학교 갔다오자 마자 책가방 팽개치고 밭으로 가서 김을 매고...

저녁이면 쇠 먹이를 거두려고 강가로 가고 겨울이면 땔감을 마련하려고 산으로 갔던 그런 분들을 쳐다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라.

초등학교 졸업하는 딸은 남의 집 식모로 보내면서 울었던 당신의 할머니를 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라.

대기업이 착취를 한다구요?

한국에 일자리가 없어서 대학을 나오고도 독일의 광산 광부로 갔고 간호사로 갔던 그래서 국제미아가 되었던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의 이야기를 물어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라.

지금도 대학을 나오고도 대한민국에 불법 취업을 와서 노동자로 일하는 필리핀과 몽고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이야기 하라.

신혼 초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두고 지하 방 반칸  이라도 마련해 보려고 중동의 뙤약볕으로 건설 공사장의 인부로 갔던 당신의 삼촌들을 보고 그런 응석을 부려라.

월남전에 가서 생명을 담보로 돈 벌이를 갔던 당신의 할아버지,삼촌 세대를 생각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라.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지 않나?

앞세대의 성취와 피땀을 그렇게 부정하고 폄하하고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나?

사람들은 내가 미국가서 박사하고 KAIST교수하고 반기업 정서에 대응하니까 무척 금수저인 줄 아는 가 보다.

나는 위에 적은 일들을 직접 경험했고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신들처럼 그런 배부른 소리를 못할 뿐이다.

나는 부모 모두 무학으로 농부의 아들이고, 그 것도 땅 한평 없던 소작농의 아들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 등잔과 호롱불로 공부했다.

나보다 더 영특했던 우리 누이는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하고 공장으로 취업해 갔고, 지금까지도 우리 어머님의 지워지지 않는 한이다.

나는 대학4년 내내 아르바이트로 내 생활비를 마련하며 다녔고, 때로는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면서 다녔다.

나는 돈 한푼도 없이 결혼했고 집없는 설움을 겪으며 신혼 초에 치솟는 전세값 때문에 서울변두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단돈 3백만원으로 가족을 데리고 유학을 가서 배추 살 돈이 없어서 김치를 만들어 먹지 못했고,   내 아내는   남의 애들을 봐주고,
딸은 흑인애들이 받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서 우유와 오렌지 쥬스를 사 먹이면서 학교를 다녔다.

나는 회사에 취업해서 주 6일을 근무하던 때에 입사 첫해에 크리스마스 날 단 하루 쉬어 보았다.

공장 창고의 재고를 맞추려고 퇴근 안하고 팬티만 입고 냉방도 안되는 높다란 창고 위를 기어 올라 부품을 세면서 생산을 정상화하려 애썼다.

그렇게 야근하는 날은 세상에서 제일 맛 있는 음식은 삼겹살인줄 알고 살았다.

그렇게 살아 왔기에, 무책임한 노조가 망가뜨리는 회사를 보아왔기에,

우리보다 잘사는 것으로 알았던 많은 나라들이 꼬꾸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 어떻게 잘 사는 사회인지 보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들처럼 아프다고 못하고 힐링해야 한다고 응석을 부리지 못한다.

제발 당신의 고결한 조부모와 부모들을 더 이상 능멸하지 말라.

당신들이 우습게 하는 대한민국 기업들 가발공장에 납품하는 하청업체부터 시작해서 배워서 지금까지 일군 것이다.

정부의 벤처 지원책도, 금융도 없었고, 대학도 없었고, 컨설팅 없이 자유수출공단에 진출한 일본인들에게 술사주고 기생 접대하면서 배우고 일군 것들이다.
당신의 이모 고모가 그렇게 술 따르면서 번돈으로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제발 응석부리고 빈정거릴 시간에 공부하고 너른 세상을 보라.

우리 사회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뜰하게 공부하고 나서 비난해도 늦지 않다.

사람 값이 싸다고 투덜 대기 전에 누구 한번 월급 줘보고 그런 철없는 소리를 하고, 월급 보다 더 가치있는 직원이라고 증명해라.

그런 직원 찾으려고 기업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나는 당신들의 그 빈정거림과 무지에 화가 난다.

그러니 나보다 더 고생하고 생존자체를 위해 발버둥처야만 했던 나의 앞 세대, 내 부모님 세대는 오죽하겠나?

당신들이 아프다고 할 때, 나는 그 유약하고 철없음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다.

당신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들, 스타벅스 커피, 스타크래프트 게임, 해외 배낭여행, 그 어떤 것들도 당신들이 이룬 것은 없다. 당신들은 지금 이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것으로 지금 누리는 것에 보답해야 한다.

우리세대는 누리지 못했기에 당신들이 누리는 것을 보는 것으로 행복할 따름이고 부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조롱받을 아무런 이유는 없다.

당신들의 앞세대는 그저 물려 받은 것 보다 몇십 몇백배로 일구어 넘겨준 죄 뿐이고 당신들에게 인생은 원래 고달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려주지 못한 것 뿐이다.

사기꾼들이 이 나라 밖에는 어디 천국이 있는 것처럼 거짓을 전파할 때 설마 저런 소리에 속을까하며 미리 막지 못한 죄 뿐이다.

당신들의 부모들이 침묵하는 것은 어이가 없거나, 말해도 못 알아 듣거나, 남보다 더 해주고 싶다는 한 없는 자식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지 당신들의 응석이 옳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속으로 울화통이 터져서 울고 계실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 한다

출처 :   [한국경제]
"헬조선이라 빈정  대지마라…부모들은 모두 울고 싶은 심정"이란다!

🔹107세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렇게 오래 산
비결이 무엇 입니까?"
⚘"할아버지가 뭐야?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아! 형님 죄송합니다.
형님! 오래 산 비결이 뭐죠?"
⚘"비결은 무슨... 안죽으니까 오래 살았지!"
⚘질문마다 웃음을 만들어 내는
멋진 '우문 현답'.

⚘"형님, 그동안 살면서 미운 사람도
많았을 텐데,
⚘스트레스도 없이 어떻게 그런 걸
다 참고 사셨어요?"
⚘*"응 미운 사람들도 있었지
⚘하지만 그냥 내버려 뒀어,
⚘그랬더니 지들이 알아서
⚘80~90살이 되더니 다 죽던데 뭘~!"

⚘미운 사람 있어도
그냥 즐겁게 오래 살면 돼!
⚘"절대 화 내지마! 화날 때는 그냥
웃어 버려, 하하하~ 이렇게 말야...!"

⚘가 : 다가 웃고,
⚘나 : 서다가 웃고,
⚘다 : 가가서 웃고,
⚘라 : 일락꽃 처럼 활짝 웃고,
⚘마 : 음속까지 웃고,
⚘바 : 다처럼 시원하게 웃고,
⚘사 : 랑하듯 웃고,
⚘아 : 침부터 웃고,
⚘자 : 면서도 웃고,
⚘차 : 안에서도 웃고,
⚘카 : 네이션 꽃처럼 활짝 웃고,
⚘타 : 인에게도 웃고,
⚘파 : 도처럼 시원하게 웃고,
⚘하 : 루를 시작하면서 웃자...!

💞 웃으며 즐거운 하루 누리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웃는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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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시대 속에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열정>이 아닙니다. 열정보다는 <순종>이 더 필요합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말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적인 기도 안에는 <자기 의>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기도는 말씀에 못 박힘이 있기에 주님의 뜻만을 구하게 됩니다.


열정과 순종, 한 쪽은 좋고 한 쪽은 나쁘다고 비교 우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열정 이전에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열정 이전에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미 하늘에서 정하신 뜻을 이 땅 위에서 풀어낼 수 있는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만 말씀이 기도가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앞으로 어떤 시간들을 맞이할지 이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나아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맞이하기 위한, 마치 <산고의 고통>과도 같은 시간들입니다.


무엇인가를 출산하는 과정과도 같은 앞 날이기에 중요한 시절입니다. 그래서 힘겹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 받은 자들에게는 힘들지만 기쁜 날이 되는 것입니다. 깊어지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고의 고통, 생명을 낳는 출산은 열정 이전에 듣고 따르는 자세,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길 원하는 여러분!" (행 10:35)


엘리야의 시대처럼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시하십시오. 이에 내 안에 열정 이전에 순종의 자세가 충만히 있는지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시대는 주님 말씀 하신대로 '그릿 시냇가'로 피해야만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곳에서 까마귀들이 가져다 주는 것들로 배를 채워야 하는 시절입니다. (열상 17장)


그러나 마침내 그 곳마저도 물이 말라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때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의, 자기 지식을 거두어 내고 이해할 수 없지만 "하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엘리야의 영들"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맞이할 <엘리야의 영> 말입니다. 


열정하면 생각나는 분이 베드로 사도이십니다. 그는 디베랴 바닷가 이후, 마가의 다락방을 통해 성령을 받은 이후 <순종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바로 유대인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리더십이었던 베드로 사도가 꿈에 나타난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간 것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 날 밤, 베드로 사도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행하심을 들은 이방인들 위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주신다는 사실에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온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보고 놀라기 시작했습니다. (행 10:44-45)


이처럼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끝내시는, 마침표 찍으시는 시간이 마지막 때"란 것을 기억하시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열정 이전에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순종하려는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주님이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통로되어 하늘에서 정하신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낼 주님의 사람을 찾고 계신것입니다! 산 골에 사는 자가 전하는 소리이지만 들을 귀 있는 분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마라나타!



글: 김영표 목사님

한 노병의 외침 -

 

그대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촛불따라 가는길이 그리도 밝던가?
수십년 저주하던 얼굴이 하루 이침에 그리도 곱던가?
몽롱한 정신의 세계로 빠져가고 있는 그대모습들이 참으로 가련하구나.
춤추는 언론들의 가면극의 무대가 남인가 북인가?
발목잡힌 방북객들의 목줄이 이성을 잃고 조국을 버리려 하는구나!
그대가 원하는 평화란 어떤것인가? 방탕할만큼 누리던 자유가 싫어 졌던가?
잘사는 사람 성공한 사람들을 시기질투 할수 있었던 자유도 이제는 싫어 졌던가?
주체못할 자유도 이제 버리고 싶은가? 미끼를 미끼인줄 모르고 덥석 물은 우매한 인간들이 가야할 길은 어디이던가?
오호 통재라!
그토록 악랄하고 무자비한 지옥같은 삶 을 수없이 듣고 보아왔건만 한 순간에 뒤집어진 생각들이 과연 정상적 이었던가?
몇푼의 청년수당에 젊은 패기를 버렸고, 달콤한 육아수당에 정신이 녹았고, 인상된 노년수당에 젊음과 생명을 바쳤던 조국애를 팔았고,
최저임금 운운하며 마치 자기돈이라도 퍼주듯하며 재벌을 죄악시하고 가진자들을 적대시하는 이 나라의 평등사회란 어떤 사회이며
막 퍼준 인기의 종말은 어디이며
그 부담은 누가 짊어져야하며
그 책임은 누가 질것인가?
이미 체면상태에 들어간 몽롱하고 우매한 인간들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미 때는 늦었도다
오호 통재라!
침몰해가는 조국이여! 자유대한민국이여!
허수아비처럼 춤추는 지성이라던 언론과 평론가들.
나라살리는 일꾼으로 뽑아준 국개들은 제살길 찾느라고 나라생각 잊어 버린지 오래고, 이 나라의 보수 지성들은 겁먹은 새앙쥐처럼 궤멸되어가는 보수를 보고도 무엇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털면 먼지 날짓이라도 했는지 저항은 커녕 떨고만 있구나.
국가의 정체성에 반하는 세력에게 국가가 지원을 하지 않는것은 당연한 조치이거늘 문화계 블랙리스트라며 생사람 다 잡아가더니 언제부터인가 TV에서는 그들을 비판하던 보수냄세나는 인물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것은 브랙리스트가 아니고 보수괘멸 리스트이던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은 그대들이여! 이렇게 보수가 쉽게 무너질줄 몰랐다고 점령군들 스스로도 놀랐다던데.
국립현충원에 잠들고 있는 호국영령들이 없었다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나라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5만4천명의 전사자와 10만명의 부상자를 낸 미국을 물론이고 참전 및 의료 지원군을 보내준 21개국의 6ㆍ25참전국들을 대할 면목이 없구나.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은 왜 이다지도 무지하단 말인가?
國破山河在라더니 이런들 어뗘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오.
참으로 태평이시던가?
이 모든게 자업자득이 이닐가?
소멸되어가는 자유대한민국이여!
소리 높여 외쳐본다
오호 통재라!
이미 때는 늦었도다.
이제는 그 업보로 가득찬 길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몸부림쳐도 소용없으리,

월남전 참전노병 예종이 씀

★프레임의 법칙(Frame law)★
                    

 공자가 제자들과 함게 진나라로 가던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안회가 가까스로 쌀을 구해 와 밥을 
지었습니다.

공자는 밥이 다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부엌을 들여다보다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고 있는 안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공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회는 제자 가운데 도덕수양이 가장 잘되어 공자가 아끼는 제자였습니다. 공자는 크게 실망하고 곧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윽고 안회가 밥이 다 되었다고 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더구나."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안회는 곧장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훍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이부 끄럽고 후회스러워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보고 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

성인 공자도 이렇게 오해를 했는데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은 어떠 하겠습니까? 

때문에 귀로 직접 듣거나 눈으로 본 것이라고 해도 항상 심사숙고하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섣불리 결론을 내려 평생 후회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그의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타고르가 해고해야 겠다고 작정했다.

3시간 후 허겁지겁 달려 온 하인에게 빗자루를 던지며 말했다.
"당신은 해고야! 빨리 이 집에서 나가!"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들며 말했다. "죄송 합니다. 어젯 밤에 딸 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는 길 입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고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 배웠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 대해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는
잠시 상대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장통을 거쳐가는 8번 버스엔 늘 승객들이 만원입니다. 보따리마다 
주고받은 정을 받아 온다고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참을 달리든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잠시 후 그치겠지 했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세 정거장을 거쳐 올 때까지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슬슬 화가 난 승객들은 여기저기서 “아줌마 애기 좀 잘 달래 봐요..” “버스 전세 냈나..”  “이봐요. 아줌마 내려서 택시 타고 가요!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  “아~짜증 나... 정말 “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 대한 원성으로 화난 표정들이 버스 안을 가득 매우고 있을 그 때 차가 멈추어 섭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버스기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간 버스기사는 긴 막대사탕의 비닐을 벗겨 얘기 입에 물려주니 그제사야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맙니다. 

다시 버스는 출발을 했고 버스 안에 승객들은 그제야 웃음이 번졌나왔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아이엄마는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다른 한 손"을 세워보입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수화로 고마움을 표현한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내린뒤 버스기사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랑의
불빛을 멀리 비추어 주고 있었어도 누구하나 
"빨리 갑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붙이는 말: 프레임 법칙이란,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서로 간에 불협화음이 일어나곤 하는 것은  
자기의 고정관념에서 나오는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상대방을 배려함이 없이 모든 걸 자기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어 분쟁이 생기는 것이다.
선입견(先入見)은 자아의 성찰(省察)없는 자만(自慢)이나 오만(傲慢)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어 모든 오해와 분쟁의 불씨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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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인간론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련하여서,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출처: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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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궤멸, 수구 패배일 뿐
보수 유권자는 냉전 굴레 불태워
일단은 민주당에 몸 맡겼지만
기대 못 미치면 박차고 나갈 것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자유한국당이 ‘폭망’해서 보수가 궤멸했다고 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은 보수가 아니었고, 보수를 대변하지도 않았다.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에 눈과 귀를 막은 냉전적 사고, 요설(妖說)로 포장한 기득권 밥그릇 챙기기로 일관했을 뿐이다. 이렇게 보수정당이 아예 존재한 적도 없는데, 보수가 선거에서 무너졌다는 건 보수에 대한 모욕이다. 눈이 밝은 보수 유권자들이 악취가 진동하는 수구(守舊)를 심판했다고 해야 맞다.
 
자유한국당 세력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참 편하게 정치했다. 시대가 요청하는 생산적 담론과 정책은 안중에 없고 권력의 달콤한 꿀을 빠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전 대표가 된 홍준표의 표현대로 “고관대작 지내고 국회의원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과 “국비로 세계 일주가 꿈인 사람”이 “지금 이대로”를 외치면서 정치를 시궁창에 처박았다.
 
이들은 논리가 밀리면 상대에게 “너 종북이지, 빨갱이지”라고 눈을 부라렸다. 눈에 핏발이 서도록 토론하고 어떻게든 난관을 돌파할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상대를 위협함으로써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깡패정치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홍준표는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위장평화쇼’라고 했다. 서울시장 후보 김문수는 “평화협정 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겪을 후유증이 무엇인가”라는 영국 기자의 질문에 “한국은 적화되고, 나는 총살될 것 같다”고 했다. 분단 냉전시대의 승리 공식에 충실했지만 기자는 “오 마이 갓”이라고 했다. 이들은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모욕했다. 이게 자유한국당의 수준이다. 뒤늦게 “우리가 탄핵당했다”며 무릎을 꿇었지만 시대착오적 무위(無爲)의 정치, 폭력의 정치를 용서받기에는 너무 나갔다.
 
지금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는 프레임은 수십, 수백 개다. 낙관론도 있고, 비관론도 있다. 미국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에서 기대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체제보장(CVIG)’의 맞교환은 명시되지 않았다. 미국은 많은 것을 내주었지만 북한의 양보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은 이런 비관론의 정점에 서 있다. 근거도 있고,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이다. 

동시에 미국과 북한의 최고 책임자가 직접 만나 전쟁이 아닌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표시하고 핵단추 대신 핫라인을 설치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향한 세계사적 전환에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렇다면 냉철하되 열린 마음으로,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상상력을 가지고 평화의 확률을 높이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한반도 문제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나라와 세력이 관여하고 있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인간과 집단도 완벽하게 전망할 수 없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이자 천재 자연과학자인 데카르트가 위대한 점은 자신의 감각경험을 지독하게 의심한 데 있다. 심지어 자신이 감각하고 있는 세계가 현실인지, 꿈인지를 고민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불완전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주시하고 상이한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전모(全貌)에 다가설 수 있다.
 
너무도 부족한 존재인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 결국엔 말도 안 되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은 “수구냉전적 사고에 머물러 있는다면 국민들은 점점 더 외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반성적 인식이 당 차원의 집단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열린 보수를 세울 수 있다.
 
19세기 영국 보수당은 ‘멍청한 당(stupid party)’으로 조롱받았다. 이때 디즈레일리는 “오두막이 행복하지 않으면 궁전도 안전하지 않다”며 당이 불평등과 빈부격차 해소에 나서도록 했다. 침체했던 영국의 귀족정당 보수당이 혁신을 통해 세계 최장수 정당이 됐다는 박지향(서양사) 서울대 교수의 조언은 설득력이 있다. 기득권에 안주해 온 자유한국당이 과연 이런 치열함을 갖출 수 있을까.
 
이번 선거의 승자는 보수 유권자다. 스스로의 힘으로 ‘북한이 화해 불가능한 적(敵)’이라는 수구냉전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불태우고 합리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보수의 판단력은 건강하게 작동한 것이다. 이들은 더불어민주당에 몸을 맡겼지만 기대에 못 미치면 언제든지 박차고 나갈 것이다.
 
정당이 제대로 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처절하게 버림받는 시대가 열렸다. 수구를 혼내준 보수 유권자의 멋진 승리가 구제불능의 낡은 정치판을 제대로 갈아엎기를 바란다

 

출처: 중앙일보/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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