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의 이유 / 매튜 헨리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한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이유는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때문이요, 죄인들이 파멸에 이르는 이유는 이러한 마음에 이끌려 따라가기 때문이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마음의 행로대로 행한다는 것인데 그 마음이 고집불통이요 회개를 모르는 마음일 때 그 행로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죄악의 길로 치닫는 자는 스스로에게 "진노를 쌓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쌓는다는 말에는 풍성하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죄악의 보물은 영원토록 사용해도 다함이 없을 것인데도 죄인들은 여기에 또 죄악을 보물처럼 쌓아 놓는 것이다. 온갖 고의적인 죄악은 수십가지 새끼를 치기 마련이요 청산할 날을 재촉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다"는 말을 "그들의 진노에 가지를"치다는 식으로 번역한 그대로다(겔 8:17). 보물을 쌓는다는 말에는 비밀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진노의 보고, 아니 진노의 탄약고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으로 그것은 비밀 장소에 보관된 보물과 마찬가지로 깊숙히 보관되어 있다(신 32:34;  욥 14:17). 그러나 여기에는 탄약고의 실탄이 전쟁에 대비해서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장기적인 목적으로 유보되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욥 38:22,23). 이 보물들은 마치 "큰 깊음의 생들이 터짐"같이 활짝 열어 제쳐질 것이다(창 7:11). 도매금으로 몽땅 처분되고 말 " 진노의 날"에 대비해서 보물처럼 쌓여질 뿐이다. 지금은 죄인들에 해서 인내와 용납의 날이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진노의 날이 오야말 것이다.

사실 죄인들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진노의 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악한 자에게 매일 분노"하시기 때문이다(시 7:11). 그러나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은 아직 남아 있다(계 6:17). 그리고 이 날은 "하나님의 의로운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격정과 같은 분냄이 아니니 그분에게는 노함이 없기 때문이다(사 27:4). 그것은 의로우신 심판이니 곧 그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죄를 처벌하려는 의지이다. 이 의로운 심판은 죄인들의 번영과 성공 속에 겹겹이 감취어 있지만 오래잖아 만천하에 곧 들어날 것이요 피상적이 무질서는 자리를 물러나고 하늘은 그의 의를 선포하게 될 것이다(시 1:6).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조선일보사설
"북 핵 폐기" 의심하고 확인하는 사람 정부에 누가 있나?

미국과 북한이 27일 판문점에서 북핵 폐기와 관련한 본협상을 시작했다. 미·북 정상회담은 북 폐기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 열리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사안일 뿐이다. 따라서 판문점 미·북의 북핵 폐기 실무 협상이 진짜 협상이다. 이른바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할 때의 그 디테일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의 정확한 의미부터 확인돼야 한다. 이제는 어느덧 한국 정부 관계자들까지 따라 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지금 핵폭탄은 북에만 있다. 그런데 핵도 없는 한국에 대해 비핵화하라는 것은 결국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을 염두에 둔 전략적 포석이 아닌가. 그렇다면 북의 핵 포기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북핵 폐기의 절차와 방법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최단기간 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CVID)'의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25년간 북이 펼쳐온 핵 사기극을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불완전한 폐기' '확인 검증이 어려운 폐기'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폐기'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되면 그것은 핵 폐기가 아니라 핵 사기일 뿐이다.

북이 '완전한 비핵화'를 결심했다면 CVID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과거에 써먹던 '단계적 조치' '핵 군축회담'을 들먹이고 있다. 지난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에서부터 핵 전문가 참관을 허용하지 않았다. '불완전하고 검증 불가능하며 돌이킬 수 있는 비핵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어겨온 북한은 CVID를 하기보다는, 축소 신고하거나 은폐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설혹 김정은이 이런 결단을 하려 해도 군부나 강경파가 나서서 반발하는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한다. 설사 북이 CVID에 동의해도 북이 숨겨 놓은 핵물질, 핵시설, 핵데이터를 다 찾아내 없애고 핵기술자들을 핵에서 격리시키는 일은 지난한 과제다. 하나하나 의심하고 확인하고 검증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도로가 될 수 있다.

북핵은 일차적으로 한국을 겨냥한 것이다. 실제로 터뜨릴 곳도 한국뿐이다. 그런데 가장 민감하게 확인 검증해야 할 한국 정부가 CVID에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미국, 북한을 상대하는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공개적으로 CVID 언급을 꺼리고 있다. 현 정부에서 CVID는 금기어(禁忌語)가 된 것 같은 분위기도 일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결국 단계적 해법밖에 없다"는 발언도 나오고 있다. CVID든 아니든 '남북 평화 축제'를 빨리 열었으면 하는 조급함이 그대로 보인다.

대통령은 북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고 김정은의 주장을 그대로 전하기만 한다.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이런다고 해도 정부 내 누군가는 북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확인하고 검증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 모두가 나서서 '평화가 왔다'고 합창한다. 믿더라도 검증하지 않으면 가짜 평화일 뿐이다.

미국이 CVID를 완화시키려고 하면 한국 정부가 이를 막아서야 정상이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돼 있다. 미국만 '적당한 핵 폐기' '핵 폐기처럼 보이는 쇼'로 이 문제를 봉합하기로 마음을 바꾸면 아무도 막을 사람 없이 일사천리로 끝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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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신앙> 양봉식 기자】 2016년 12월에 성락교회 윤준호 목사의 강의를 시작으로 불거진 ‘김기동 씨의 X파일’과 함께 성락교회 분쟁은 2018년 5월 현재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교회가 분쟁이 생기면 해결을 위한 다툼의 시간이 길어지고, 짧으면 5년, 길면 10년 이상 지나야 해결된다. 해결 방식은 하나의 교회가 대여섯 개 혹은 두 세 개로 나누어지는 형태이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처럼 교회의 분쟁이 길어질수록 교인들은 영적인 병으로 지쳐 간다.
 

   

▲김기동 X파일과 미투운동에 참여했던 성도들을 지지한 개혁파 성도들
<교회와신앙>

사단의 전략중 가장 애용되는 것이 교회 분쟁일 것이다. 분쟁이 생기면 교회에서는 양측이 분쟁을 끝내기 위한 여러 가지 싸움 전략들을 만들어낸다. 그중 즐겨 사용하는 것 한 가지가 재산을 탐한다는 프레임. 성락교회 분쟁에서도 이같은 전략의 구사가 발견된다. 

 

◈ 개혁측은 재산과 권력을 탐하는 자들?

성락교회 개혁측 대표인 장학정 장로를 향하여 이 전략으로 도덕적 흠집을 내려고 한 적이 있다. 부동산업자와 대화하게 하고 녹음한 것을 짜깁기해서 ‘장 대표는 교회 재산을 탈취하려는 자’라는 프레임을 씌우려 했다. 이 방법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속아 넘어갈 수 없었던 전략이다. 교회는 총유재산으로 개인이 탈취하면 위법이다. 금방 탄로 날 일을 두고 교회재산을 팔아넘기려 했다는 주장은 소가 웃을 일이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자 러시아에서 호텔 사업을 한 사실을 두고 '성매매사업'을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호텔을 임대해 그것을 재임대해서 직간접적인 성매매사업을 했다는 주장하기도 했다. 이 논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건물주가 호텔을 임대해주면 건물주는 호텔사업을, 식당을 임대해 주면 식당사업을 공동이든 지분을 갖든지 하는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 
 

성락교회의 김기동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개혁파가 ‘재산탈취나 권력 탐하는 자들’이라는 프레임이 먹혀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동안 김기동 씨가 성락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친 교회론에서 시작된 것으로 엿볼 수 있다.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교회를 탄생시키고, 세상과 분리되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이들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김기동 씨가 말하는 교회에 대한 생각이 어떤 것인가? 성락교회 주보의 ‘松竹岩’ 칼럼에서 김기동 씨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성락교회와 베뢰아와 김기동(시무언)은 영원히 분리할 수가 없다. 하나이다. 과연 교회를 사랑하는 것인가? 교회를 이간하고 해치는 것이 교회 성장을 위해 힘쓰는 자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가를 알아야 한다. 불만이 있으면 내 곁을 조용히 떠나면 된다.”(2017년 1월 8일자 주보 ‘松竹岩’ 칼럼)
 

   

▲ 성락교회와 베뢰아와 김기동은 하나라고 가르친 김기동 씨. <교회와신앙>

베뢰아라는 명칭은 성경에 나오는 고유명사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는 의미에서 김기동 씨가 베뢰아를 차용했다. 그런데 그의 성락교회와 베뢰아와 김기동의 연결고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김기동 씨가 말하는 성락교회와 베뢰아와 김기동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선언 속에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배신자요 교회 이탈자라는 논리를 세우고 있다. 이 주장은 2017년 5월 14일자 주보에 게재한 ‘松竹岩’ 칼럼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베뢰아와 성락교회와 시무언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한 내 말에 대하여 부정했고, 베뢰아와 교회를 이간했고 교회와 시무언을 이간했다. 그러나 정통성을 지키며 전통을 이으려는 ‘환언베뢰아 성락교회사랑회’의 그 열매가 나타난 것을 감사한다.”(2017년 5월 14일자 주보 ‘松竹岩’ 칼럼)
 

   

▲개인의 비리가 드러나 문제를 제기한 성도들에게 교회는 이간질한 자라고
질책한 김기동 씨.
<교회와신앙>

김기동 씨를 따르지 않는 자들(개혁측)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게 하는가를 엿보는 대목이다. 개혁측이 교회와 베뢰아와 김기동을 이간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성락교회=베뢰아=김기동에 등식을 지키려는 ‘환언베뢰아 성락교회사랑회’에 대해 “정통성을 지키며 전통을 이으려는” 모임으로 칭찬하고 있다. 김 씨의 말을 통해 교회와 베뢰아와 김기동은 하나이며 성경적인 전통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공동체의 정신을 강조하고 연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논리를 만들어 놓는 것이 매우 위험하며 성경적이지도 않다. 이 문제를 성락교회 교인이 운영하는 블러그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시무언과 베뢰아와 성락교회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라는 주장은 감독님을 비롯한 우리 교회 요직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근래에 들어 부쩍 강조하며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개념이다. 심지어는 매우 위험한 비유를 들어가면서까지 시무언과 베뢰아와 성락교회의 관계성을 설명하곤 한다.
 

처음에는 원로감독님과 베뢰아와 성락교회를 사랑하고 그 자부심이 특별한 일부 성도들의 소박한 자긍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기실 ‘성락교회는 김기동 감독님이 베뢰아를 기반으로 개척하셨고 부흥시켰다’는 그 역사성과 특수성을 감안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이 모호하고 위험천만한 개념이 하나의 신조(Creed, 信條)가 되어 우리의 신앙 양심을 제약하고 검열하는 괴물로 우리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현재 양 진영의 나뉨은 이를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로 구분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유력한 분은 이 신조에 대한 답변을 기준으로 피아(彼我)를 나누며 적(?)에게는 무소불위의 교권을 휘두르기까지 한다고 한다.
 

우려스러운 것은 사교(邪敎)에서나 있을 법한 이러한 위험하고 발칙한 독초를 순진한 우리 양들은 조금씩 너무 오랫동안 먹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영혼의 어떤 기능은 전혀 작동하고 있지 않다.”(출처:‘어느 안수집사님의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체스님의 블러그>)
 

김기동 씨는 자신의 신조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을 ‘성락=베뢰아=김기동’으로 만들었다. 이 논리 속에서 개혁측은 이간질하거나 교회를 파괴하는 이들로, 더구나 재산을 탐하는 자들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김기동의 복음이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김기동 씨의 교회론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성락=베뢰아=김기동은 성경에 없는 신조
 

김기동 씨는 여러 곳에서 자신의 3대 세습을 언급하고 있다. 그 발상 자체가 자신이 설립한 단체가 성경적인 것에서 출발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지만(그의 책 <교회론>에는 이런 주장들이 그대로 있다) 길을 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떨어뜨린 다른 증거들은 김 씨가 심중에 생각하는 교회론이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더구나 개혁주의 교인들은 성락교회 교인이 아니라는 논리로 사용하는 것이 ‘성락=베뢰아=김기동’이다. 이것은 자신 스스로 성경의 말하는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론을 부정한다. 교회를 해치는 자들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교회의 분란이 일어난 것은 김기동 씨의 ‘X파일’과 재산 문제, 목회비 문제 등이었다. 재정적인 문제 중에 배임과 횡령으로 기소된 부산의 여송빌딩 문제는 개혁측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김 씨 자신이다.
 

교회의 재산과 권력을 탐하는 자가 누구인가? 개혁파인가 아니면 김기동 씨인가? 김 씨는 자신이 성락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말한다. 개척에 대한 수고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무익한 종’으로,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오직 성령을 통해 세워지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공동체라는 점에서 건물이 아니다. 더구나 성전도 아니다. 오순절 이후의 성전은 신자 개인과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신자 개인은 공동체를 통해 교회로 존재한다. 성락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 다툼이 생겨도 여전히 교회이며 개혁측이나 비개혁측이나 모두 성락교회 소속이다. 성락교회의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김기동 씨지 성도들이 아니다. 문제가 드러나면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가 책임이 크다. 성락교회 분쟁의 원인은 성락교회 교인이 아닌 김기동 씨의 개인적인 추문들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한 이들을 두고 이간질 하는 자들, 분열시키는 자들, 재산을 탐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김기동 씨 측의 전략이지 진실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개혁측 역시 여전히 성락교회 교인이며 교인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사회법에서도 보장하고 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채권자들(개혁측)이 채무자 김기동 감독체제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이 사건 교회에서 탈퇴하였다거나 채권자들만의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서울남부지방법원 2017카합20212 결정). 서울고등법원은 “채무자들(김기동, 김경배, 박근수)이 이 법원에 추가로 제출한 소명자료에 의하더라도 채권자들이 이 사건 교회를 탈퇴하여 신청인 적격이 없거나 다른 신청의 이익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서울고등법원 2017라21220 결정).
 

김기동측 교인들과 성락교인들의 싸움이 아니라 비리를 저지른 김기동과 개혁을 바라는 교인들 간의 싸움이라는 구도가 맞다. 개혁측이 교회 이탈자가 아니라 성락교회 교인으로서의 정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재산을 탈취하기 위한 자들의 소행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김기동 씨의 주장에 놀아난 자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들 스스로 김기동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교회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엉뚱한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이 ‘성락교회=베뢰아=김기동’이라는 가르침이다.
 

   

▲ 성경과 다른 왜곡된 교회론을 통해 세습을 정당화한 김기동 씨와 교회를 물려받은 김성현 감독(출처 =설교동영상 갈무리)

더구나 이런 논리를 갖게 될 때 세습은 전혀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또한 김기동 씨의 어떤 행동도 용납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김 씨가 쓴 <교회론>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으로 잘 포장되어 있지만, 그동안의 행보에서 그는 자신의 책으로 쓴 <교회론>과 전혀 다른 차원의 교회를 이끌어 왔다.

 

예를 들어보자. 그는 스스로 기도와 성령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 왔다고 주장했고 그의 글에서도 그렇게 썼다.

 

◈ 자녀에게 배설물을 물려주었나?

성락교회 2010년 12월 12일자 주보에 실린 김기동 씨의 칼럼 ‘松竹岩’에서 “나는 돈으로 영광을 받을 사람이 아니요 오직 개척자로서 성령으로 일했다. ···· 나는 성령으로만 일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기도와 순종만 있을 것이요, 그러므로 아무도 나를 유혹하지 말라. 온 천하를 준다 해도 그것은 내게 똥이라, 더러운 배설물이라.”고 쓰고 있다.
 

“오직 개척자로서 성령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령만으로 일”했기에 ‘온 천하’는 “똥, 더러운 배설물”이라고 했다. 김 씨의 글대로라면 그의 아들인 김성현 감독에게 물려준 세습은 교회의 재산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교회 분쟁이 일어나고 세습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는 교회 개척을 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메고 와서 살리고 한 일은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이 재물은 김 씨가 규정한 ‘똥과 배설물’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똥’ 취급한 것도 자녀에게 물려준 셈이다.
 

그가 ‘송죽암’ 칼럼에서 ‘온 천하’는 이 세상 것이고 재산과 권력도 여기에 포함된 것이다. 이것들이 똥이고 배설물로 여긴 것이라고 했다. 만약 재산을 탐하는 자들이라면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아니라서 그 더러운 것을 탐하는 개혁측에게 기꺼이 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 김기동은 자신의 말을 뒤집는 설교를 했다. 성령과 기도가 아닌 돈으로 교회의 재산을 늘려간 것으로 말하는 이율배반적인 말을 주일 설교 시간에 한 것이다.
 

“나는 목사가 돈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내가 돈이 없었으면, 수입이 없었으면 이렇게 큰 교회 못 맨듭니다. 왜, 아 저기 땅 있는데 좀 사자. 교인들이 벌써 아 돈 없어요. 힘들어서 관둡시다. 그만 못하는 거야. 그러나 나는 누구와 상의할 것이 없어요, 내 돈 있으니까. 즉시 사버립니다. 계약을 해 버립니다.”(2018년 5월 13일. 주일 설교)
 

앞에서는 성령과 기도와 순종으로 교회를 세웠다고 말하고, “온 천하를 준다고 해도 내게 똥이라, 더러운 배설물이다.”라고 규정했던 그가 최근 설교에서는 “목사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는 설교 시간에 부동산 투자를 통해 어떻게 교회 재산을 늘렸는지를 잠깐 언급하고 있다. 더구나 성도들이 돈이 없다는 것에 괘념하지 않고 “내 돈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땅을 사고 분할해서 돈을 갚았더라도 그는 스스로 돈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앞뒤 문장을 연결해보아도 그는 부동산의 귀재라고 할 만큼 많은 양의 부동산을 늘렸다.
 

또한 성락교회의 성장은 초기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 자기 열심을 통해 교회를 일구고 재산을 늘렸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표현이다. 실제로 현재 성락교회 부동산은 공지시가로 8천억원이 넘는다. 그렇다면 성령 운운한 교회 개척을 했다는 주장들은 단지 포장만 그렇게 했을 뿐임을 짐작하게 한다.
 

김 씨는 예전부터 자신의 집을 팔아 교회를 세웠다고 말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를 세운 것은 매우 훌륭한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을 자랑삼고 그 몫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헌신을 가장한 투자라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김기동 씨는 스스로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대신 목회비를 받는다고 말했다. 김씨가 강사비와 목회비 명목으로 받아챙긴 돈이 5천만원이 넘는다고 개혁측이 주장한 바 있다. 그러다가 교회 분쟁이 생기면서 횡령과 배임 등 사례비 문제가 생기자 ‘목회비’를 받지 않고 ‘사례비’를 받았다고 말을 바꾸었다. 자칫 횡령이라는 죄목에 걸릴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그가 각종 명목으로 사례비를 받은 것도 큰 돈이었다. 이 역시 그가 <송죽암>이라는 책에서 쓴 헌금에 대한 이야기와 전혀 다르다.
 

“목회자일수록 물질에는 더 깨끗해야 한다. 불의한 청지기의 낙인이 찍혀서는 안 된다. 어떤 자는 교회의 헌금을 가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줄로 생각하지만 헌금은 공금이다. 세상 공금보다 더 무서운 공금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재물로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평생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회의 헌금에 대하여는 나는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헌금을 이용하려고 생각도 못했다.”(<송죽암> ‘物心不變’ 173쪽)
 

   

▲ 성락교회 설립자인 김기동 씨의 교회 설립 취지는 글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했다.(출처=설교 동영상 갈무리)

이 글대로라면 아주 올곧은 생각이다. 이대로만 실천했다면 존경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받은 돈을 교회에 빌려주고 고율이자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만 가지고도 글과 행동 별개인 것을 알 수가 있다.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씨가 강사비로 6년간 100억을 수령해 갔다는 의혹에 수사에 들어간 것을 두고, 김기동 씨는 훨씬 적으니 다행이라고 말해줘야 하는가?

 

◈ 왜곡된 교회론 감추고 칼끝을 개혁측 교인들에게 겨눠

성락교회의 분열의 문제는 김기동 씨의 그릇된 성경관, 교회관이 그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전혀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위배되었다. 그것을 두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이런 기류 가운데 나타난 현상을 두고 개혁측은 “교회 사유화, 성폭행, 부정축재, 교회 운영원칙을 무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에 일어나는 것을 보더라도 결코 ‘신사적인 베뢰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개혁측을 재산을 탐하는 자들‘로 몰아세우는 프레임에서 눈을 뜨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김기동 씨와 성락교회를 ‘동일시’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김기동 씨와 그의 아들을 옹호하는 교인들은 김기동 씨를 반대하거나 비판하면 교회를 반대하고 비판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측 교인들은 김기동 목사의 비리행위에 대해 진상조사와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을 뿐 성락교회를 부당히 비난하거나 교회 분리를 주장하지 않고 있다.
 

성락교회가 이와 같은 분쟁에 휩쓸리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김 씨의 잘못된 성경해석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나타난 김기동 씨의 비리행위에 있다. 성락교회의 분열 사태는 개혁측이 교회를 음해하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종 비리를 일으키고 드러난 김기동 개인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지 교회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 씨는 자신의 비리를 덮고 책임 회피하고 개혁측의 주장을 마치 교회의 재산이나 탐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 주의와 협상

이 세상은 공산주의와 협상 하게 될 염려가 많이 있는데 우리 기독교는 어떠한 방향을 취하여야 되겠습니까?

    이날까지는 우리 기독교가 정치와 종교는 분리라는 것을 가지고 정치는 정치요,
종교는 종교라고 하였지만 이제부터 우리가 사상전을 하는 일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1. 사상전에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한 민주 정당이 아니요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사상을 가지고 세계를 통일해서 기독교 사상을 없애고 공산주의의 사회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자기들의 사상에 굴복지 않는 자는 죽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써 싸워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는 공산당과 끝까지 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으로 명확히 밝힌 것이 즉 심판과 새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의 사상을 대적하는 세력은 전부 없애는 심판을 내리고 하나님의 사상과 하나가 된 사람만 사는 평화 왕국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인류 종말이라는 것은 마귀의 사상과 하나님의 사상으로 대립이 되어 마귀의 사상을 따르는 자는 멸망을 당하고 하나님의 사상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도우시므로 완전 승리를 이루어 평화 왕국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상 사람이 공산주의와 협상을 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보호를 믿고 끝까지 사상적인 투쟁을 해야만 재앙의 날에 남은 자가 될 것입니다.

2. 성경 본문주의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의 거짓 선지들은 손에는 성경을 들었지만 입으로는 성경과 거리가 먼 학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공산주의와 협상을 하는 논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공산주의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양의 옷을 입고 이리 마음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옷을 입고 실지는 양떼를 죽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죄의 사상을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아들을 죽게 하셨고 마귀를 없애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는 것도 죄와 싸우는 일이요, 죄의 세력을 이 땅에서 없애기 위하여 재림하는 것도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죄인들에게 죄가 없는 인격을 만들어 주는 것이요, 심판이라는 것은 죄가 없는 사람만 남게 하고 죄인은 완전히 없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사상을 가진 공산주의와 협상이라는 것은 성경을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성경은 죄와 싸워 이기라는 것이 목적인데 죄의 사상을 용납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고 나가는 미운 물건이 될 것입니다.

3. 진리 사상으로 뭉쳐진 단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파라는 것은 진리 사상으로 뭉쳐진 단체가 아니요, 교파에 얽매인 단체라고 봅니다. 교권이라는 것은 성신 떠난 교회의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요, 진리의 사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의합된 사상인데 이 사상을 가진 자는 교파를 초월해서 한 단체를 이루게 되는 것은 어떤 규칙이나 도덕에서가 아니요, 마음속에서 진리가 움직이는 불타는 양심 사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진리 사상으로 뭉쳐진 단체가 공산주의를 이기고 새 시대를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단체는 하나님 편이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가 같이 해서 영원한 평화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압니다.

 

옮긴 글

 

삼위일체 하나님은 과연 성서적인가?

나는 최근에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이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시요, 메시야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주장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이유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성경 속에서 먼저 살펴보고 그 말씀을 근거로 삼위일체의 하나님

되심을 몇차레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하나님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태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

2. 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
(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자신 속에 계신 성부, 말씀,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
(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써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빌2:5절)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라.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시다.
      
유다서 4절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디도서 2;13 "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 처음과 나중이시다.
계시록 1: 8절을 읽어보라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

계2: 8절에서도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 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 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2: 13절에서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천명하셨고, 여기에서 는 누구인가
?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셨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라고 말씀한다.
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작금의 많은 목사님들도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글/최송연

설마설마 하던 일이 

실제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현정부와 죽이 척척 맞는 JTBC가 토스를 해주고,

문재인 정권이 스파이크를 날릴 모양입니다.


북송되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될 것이 뻔한데...


만약 이 일이 현실이 된다면...


교회가 이 문제에 침묵하고 외면해 버리거나,

되려 악을 선하다 하며 분별없는 행태를 보이며

악에 동조하는 참람된 행태를 보이게 된다면, 


그땐 정말 이 나라는 

하나님의 큰 심판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탈북 北식당 종업원 북송되나… 통일부 "입국 상황 면밀 검토 중"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1/2018051101227.html









아래는 위 기사에 대한 탈북만화가 최성국씨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한.미.일 지도자 클라스 비교!


미국 : 북한에 억류되었던 "한국계" 미국인 '석방'시킴

일본 : 납북자 '송환'하라고 줄기차게 요구 

한국 : 탈북 종업원 출신 자국민 '북송' 고려


 

펌글

 

 

- 무분별한 정죄, 건강신학 위해 교수들 비평 나서

 

【 <교회와신앙> 】 정이철 목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의 신학사상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제기한 연구 보고서가 나와 화제다. 연구를 진행한 교수는 총신대학교의 일곱 학자들(김성태, 이한후, 김지찬, 정승원, 김창훈, 박용규, 이상원). 한국교회와 예장합동측 총신대학교 사태에 대한 왜곡은 물론, 방언에 관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다른 사람을 무차별 정죄하는 정 목사의 발언에 대하여 깊은 책임의식을 느껴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적 성숙을 위한 성찰과 평가가 작성의 이유다. 이 평가서에 대해 독자들이 읽어 바른 판단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한 본지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에 대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들어가면서

총신대 김영우 총장은 지난 십수년 동안 자신은 진정한 개혁주의자이며 총신은 잘못된 복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고 호도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바로 잡고 있다고 직간접으로 표방하여왔다.(*일곱 명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정이철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것은 정이철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고 말하며 학교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무차별적으로 근거 없이 방언을 비롯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더 이상 묵인하는 것은 신학교 교수로서 깊은 책임의식과 총신과 교단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성숙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고는 서로 읽고 검토하고 보완하여 완성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 총장처럼 겉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예장합동과 총신을 변질된 현대복음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몰아가며 여러 학자들과 목사들을 비판하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정이철이다.(*정이철이 담임하는 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전남 여수 인근에서 출생하여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 1992년 11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신반포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전임강도사, 교육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서울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95.10), 목사 안수(97.10)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님의 기쁨교회(2001-2002), 앤아버 한인장로교회 (2002-2004)에서 시무했고, 현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2004-) 담임을 맡고 있다(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주소는 다음과 같다.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 Tel: 734-678-7133). 그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새물결, 2013),「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BOOKS, 2015) 등 세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개인적으로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홈페이지, <http://cantoncrc.com/with_pastor>/ (2018년 4월 17일 접속); 바른믿음 홈페이지, <http://www.good-faith.net/>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이름뿐인 개혁주의를 외치는 김영우 총장을 공공연하게 두둔하며 자신도 김 총장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식의 지지 글을 자신의 사이트에 올렸다. 총신 사태를 김영우 총장의 정관변경과 사유화 그리고 학사비리 등의 문제로 보지 않고 신학적 문제로 호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양비론을 내세우며 마치 이 둘이 대립적이어서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왜곡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개혁주의자라고 자처하며 자신들을 치켜세우고 있다. 말뿐인 개혁주의는 이단도 주장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거짓 선지자들과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를 구분하는 방법을 우리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마7:20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김 총장의 열매가 어떤지는 이미 많이 알려졌고 곧 확실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성경적 근거 없이 단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교조적 착각으로 많은 목사들과 교수들을 비판하여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정이철 목사는 교만과 비방과 분열의 열매를 맺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진단해 본다.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특별계시의 존속을 인정하는 것으로, 심지어 이단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정이철이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사고를 가지는 반개혁주의적이고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과 맞지 않은 비성경적인 이단적인 측면도 상당히 많다. 그의 신학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어거스틴, 칼빈, 핫지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해해온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그런 후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I. 정이철의 신학 사상에 나타난 비 성경적 이단성
 

1.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의 방언 비판 문제

   

▲ 정이철 목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에서
박영돈 목사의 방언관을 비판했다.(사진은 인터넷 화면 갈무리)

정이철 목사는 소위 <바른믿음>이라는 본인의 사이트에 한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이며 고신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인 박영돈 교수의 방언에 관한 글들을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정이철 목사가 주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대상들은 오늘날에도 방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과 목사들이다. 비록 이들 중 누구도 방언을 성경적 특별계시 차원으로 놓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마치 이들이 특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거나 성경이 특별계시임을 부인하는 자들인 것처럼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비판이다. 그가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박영돈 교수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 수록된 글들은 다음과 같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었겠는가?”(154쪽)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173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175쪽)


박영돈 교수는 방언에 대해 나름대로 개혁주의 틀 안에서 건전하고 날카로운 해석과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모두 외국어라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으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기도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박영돈 교수는 이러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신학적 지식과 해석학적 지식을 갖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박영돈 교수를 '이단'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심지어 그는 “박영돈 교수가 감히 이런 주장을 하고서도 편히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명색이 고신의 교수이고 조직신학 학과장인 박영돈 교수가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해댄다.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말이 무엇인가동류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같은 이단의 범주로 그를 평가한다는 말이 아닌가개혁주의 신학자가 개혁주의 틀 안에서 자신의 방언에 대한 입장을 개진한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이단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이다.(*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한 것도 아닌데, 박교수를 이단의 한 부류로 모는 정이철 목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단이라면 그 옷이라도 싫어해서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야 하며 이것이 이웃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박영돈 교수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왜 유독 정이철 목사만 박영돈 교수를 향해 이단 이론을 답습하고 동승하고 있다고 주장할까? 여기 다른 이유는 없다. 정이철 목사 자신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복음이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꾸짖을 때 사용했던 말이다(갈1:6-9). 여기 다른 복음이란 한 마디로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게 되지만 율법의 행위, 곧 할례를 받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떠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 외에 의롭게 만드는 다른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박영돈 교수가 칭의론을 거부했는가? 그가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했는가? 박영돈 교수가 방언을 계시의 방편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기도의 수단으로써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인데, 정이철은 박영돈 교수를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자라고 정죄하였다. 정이철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롭다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유대주의자이며 바리새인이다. 요한 칼빈의 멘토요, 종교개혁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어거스틴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한다.
 

2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와 직통설교라는 정이철의 주장은 개혁신학 왜곡

정이철 목사는 아래와 같이 방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박영돈교수를 비판한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를 내포하는(특별계시를 보충하는) 계시적인 은사였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보고서 불신앙했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방언이 있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나타났다. 최초의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에서는 삼 천 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방언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라고 단정함으로 방언을 직통특별계시로, 이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 설교”라고 단정한다. 심지어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방언을 직통특별계시, 직통설교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지 흥미롭다. 그가 어떤 성경적 근거로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단정적 말투가 영락없이 이단 교주와 비슷하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는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구별된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다.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를 말하는 기적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듣는 기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외국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기적이지 그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대한 직통계시가 아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도 직통계시는 아니다. 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이라는 매개체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통계시는 아니다. 물론 바울 서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 받아 바울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통계시라고 하지 않는다. 직통계시는 이단들이 잘 쓰는 용어이다. 개혁주의 성경관은 신구약 66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영감된 말씀임을 주장한다.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성경의 영감은 유기적 영감이지 직통으로 받아 적는 기계적 영감이 아니다. 혹 정이철 목사는 벧후1:21,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는 말씀을 직통계시라고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3:1에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라고 말씀한다. 베드로후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가 썼지만 베드로 자신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 등이 개입되지 않은 직통계시는 아니다.(*만약 정이철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한다면 왜 사도바울은 통역을 요구했을까?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통역하면 그 통역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지 않는가? 통역은 사람의 말이지 않는가? 왜 바울은 방언보다는 통역을 더 중요시 했는가?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면 바울은 자신의 서신보다 더 권위적인 직통계시 앞에 무릎을 꿇고 경청했어야 하지 않는가? 왜 방언을 자제하라고 하며 통역 없이는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며 금했던가? 더욱이 바울은 고전14:19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 한다면 어떻게 일만 마디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의 깨달음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보다 낫다는 말인가?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시며 훈계하는 내용을 주로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파당문제, 성찬문제, 음란문제, 의복문제, 부활문제 그리고 은사문제였다. 즉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여러 은사들은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지양해야 할 문제였다.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며 직통설교라면 왜 교회를 위한 목회서신서에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을까? 그것은 바로 방언은 교회가 지양해야 할 일종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정이철 목사는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고린도교회는 헬라 지역에 위치한 교회로서 헬라어가 통용어였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헬라어, 아람어, 심지어 로마 제국 아래에서 라틴어까지 사용되었던 고린도지방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충격 받도록 이방인들의 말로 십자가를 설명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다들 헬라어를 이해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방나라 언어로 십자가를 설명했다고 유대성도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회개를 했을까? 만약 정이철 목사가 말하는 이방인들의 말이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아니라면 어떻게 고린도교회의 유대인들이 이해를 하고 회개를 했을까? 혹 정목사는 통역을 했을 것이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이 통역없이 방언을 했기에 사도바울은 통역 없으면 하지 말라고 자제 시킨 것이다.) 정 목사는 복음의 내용보다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현상 자체를 보고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워하고 회개를 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것은 복음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순절 때 3,000명이 회개한 것은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심으로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 “저희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그들 가운데 초자연적인 성령의 임재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능력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선지서와 다윗의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메시아이며 부활하신 주가 되신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 영감어린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베드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씀을 직통으로 계시해준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께 듣고 배운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고 깨달게 하신 것이다.

 

3. 정이철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을 동일시

정이철 목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이 성경의 방언의 기능이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설교하시는 현상이었다. 그 때에는 교회에 설교자가 없었고, 성경도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친히 말씀하시어야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 박영돈 교수가 쓴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왜 초대교회에 설교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가? 무엇보다 바울과 11사도가 있었고 7 집사들도 있었다. 베드로도 설교했고, 11제자들이 베드로와 함께 설교했다. 빌립도 설교를 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교훈을 했다. 방언으로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개혁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엡2:20). 방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신사도운동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는 이단적 발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단회적인 직분이며 그들과 선지자들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외에 다른 터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정이철 목사는 이단임에 분명하다.

 정이철 목사는 계속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단들도 사도행전의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신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종류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움직여서 하나님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영적인 기도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하늘의 언어’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에 두 종류의 방언이 있었다는 이런 주장은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시대와 고린도교회 시대는 동시였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처음부터 바울에게서 신학을 배운 사람이고,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를 동일하게 전파한 사람이다. 바울이 가르친 성령의 은사와 누가가 설명하는 성령의 은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방언의 형식은 반드시 이방인의 언어이고,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경의 방언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표적이며, 반대로 믿고 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되는 복이 부어졌음이 선포하는 표적이라고 가르쳤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위 문장에 있는 대로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달리 외국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짓 이론을 주장하는 자라고 단죄한다. 칼빈은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했고, 개혁주의 영역에서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을 동일시하지 않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도 정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구분하는 이들을 이렇게 함부로 거짓된 이론이라고 정죄한다. 정죄를 하지 말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과 같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해석학적, 문헌적, 역사적, 사회적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먼저 제시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교인들을 헛된 환상을 갖게 하고 대외적으로 관심을 끌며 스스로 바른 신학을 세우는 이 시대의 의로운 대선생인 척하는 것은 영락없는 이단 교주의 모습이요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는 거의 동시대에 기록되었고 누가와 바울은 동역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말씀한다. 외국어라고 한다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그 외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보다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한 언어이며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국어였다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전 14:22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겠는가?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표적(sign)이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 밖의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한다면 방언 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방언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파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14:21에서 인용된 사28: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에서 다른 방언은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 언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 본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 28장의 다른 방언, 즉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가 표시하는 즉 표적은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라고 한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고전14:21에 이사야 28:11을 인용했다고 해서 고전14장의 방언이 외국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4. 바울의 “다른 복음”(고후 11:3, 4)을 거짓방언으로 곡해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계속 주장한다.

박영돈 교수 등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에서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른 이상한 기도의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에 기도를 위한 방언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영돈 교수처럼 다음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주장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과연 위 말씀이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음을 의미하는 내용일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고 있음이 전제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영'으로는 기도하므로 '마음'으로는 그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바울의 신학일까? 바울이 그런 내용을 가르쳤던 사람이었나?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대체 바울은 왜 이런 이상한 말을 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개월 후에 쓰여진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를 떠난 후 이단들이 고린도에 찾아가서 거짓된 가르침을 베풀었고,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에게서 배운 것을 버리고 이단들이 가르친 것을 따라갔다고 심각하게 책망했다. 즉,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고 한탄하면서 책망했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우리는 위 문장에서 정이철이 고린도의 방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그가 사용한 용어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2.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3.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위 정이철의 주장을 요약하면 고린도교회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고, “이상한 거짓 방언”으로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심어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곧 이단들이 고린도교회에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거짓 방언, 이단적인 방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이처럼 정이철은 사도행전과는 달리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 있는 내용이나 주장은 다 이단적 행태나 거짓 방언으로 정죄한다.

그 예로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구절이다. 여기 “내가 만일”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이것은 가상적(hypothetical) 표현이지 바울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말씀한다(고전14:18). 따라서 14절 말씀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나 자신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며 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자신의 의견을 일단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맞추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어떻게 이 구절을 두고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위적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매우 흥미롭다.(*정이철 목사는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단들의 해석방법이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방언을 다루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을 전하지 말고 통역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방언으로 기도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의미로 바울은 말씀하신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무지하게도 “마음”(νοῦς)을 영과 비슷한 개념의 마음(mind)으로 이해하고 있다. 14:19,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깨달은”이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넣었다. νοῦς를 한글성경은 “깨달은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πέντε λόγους τῷ νοΐ μου 혹은 πέντε λόγους διὰ τοῦ νοός μου 로 되어 있다. “내 마음의 다섯 마디”라는 것이다. 원문의 마음(τῷ νοΐ 혹은 τοῦ νοός)은 영어로 intellect,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영으로 기도해도 나는 지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그 다음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주시는 권면이다. 거짓 이단들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이철목사 말대로 바울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영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여기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해도 그 뜻을 깨닫고 기도해야 하고 방언으로 찬송해도 그 뜻을 깨닫고 찬송해야 한다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철 목사는 특유의 이단 해석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고후 11장에 언급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고린도교회에서 직통계시가 아닌 기도로서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과 단정적으로 연결시킨다. 고후 11장의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받고 다른 복음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를 유대 왕국의 회복자로 보는 유대주의자들이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수신자가 같지만 그 목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정이철 목사는 이단처럼 이들을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5.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 사이비로 정죄

끝으로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박영돈 교수를 비방한다.
 

고신의 조직신학 학과장이라는 박영돈 교수가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을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접 설교하시는 계시적인 은사가 아니었고,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박영돈 교수의 신앙성장 과정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 형성된 모양이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70>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은 위 글에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단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방언이론,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사이비 신앙”으로 정죄한다. 목사의 탈을 쓰고, 아니 신자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한 신실한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을 비방하고 모욕을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무서운 저주를 퍼부을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사탄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라고 단죄하였는데 자신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고 이렇게까지 모욕을 주는 정이철 목사가 오히려 마귀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보인다. 사탄이라는 말의 뜻은 대적하는 자, 모함하는 자이다. 방언을 인정함으로 자신과 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거짓의 영으로, 이단으로, 다른 예수를 따르는 자로 모함하고 적을 만드는 정이철 목사는 전형적인 사탄의 자식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깎아내리고 자신을 치켜세우고 의롭다 만드는 그는 영락없는 현대판 바리새인이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점점 더 방언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국내 총신과 고신을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교에 재직하는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도 계시의 방편으로 방언을 인정하는 신학자는 없다. 특별계시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방언은 각 지방 언어이지만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기도의 수단으로 보고 방언을 인정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정죄하거나 그런 입장의 신학자들을 반개혁주의 신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개혁주의 안에서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나 칼 매킨타이어 노선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심지어 은사중지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개핀 교수도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개혁주의 안에 이론으로 여기고 다른 견해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고 그것도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인정한다고 해서 누구도 정이철 목사처럼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비방하고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지 않는다.

 

김문제 munjett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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