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별다른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 비교, 즉 남과 비교하여 자신에게는 죄가 덜 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단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 계신 여러분도 다 죄인입니다. 찬란한 빛이 비추이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깨끗해 보이는 공기 중에 아침햇살이 비추이면 온갖 먼지들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듯 예수님 앞에 서면 모두가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기세등등하게 그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물러갔습니다. 그들은 빛 되신 예수님 앞에서 먼지처럼 피어오르는 자신들의 죄를 본 것입니다. 끌고 온 사람들이나 끌려온 사람이나 예수님 앞에 서니까 모두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여자를 심판하셨다면, 거기에서 심판이 이루어졌다면, 그 여자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자리에 그 여자를 끌고 나온 사람들도, 구경꾼들도 다 한꺼번에 심판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 여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고소는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끼리 무슨 고소이겠습니까?

우리가 간음죄 안 짓는다고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남보다 죄를 덜 지어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 나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제 발로 걸어 나왔든 억지로 끌려 나왔든 주님 앞에 나오는 자가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 간음한 여자는 끌려나왔지만 주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산 것입니다. 자기 죄를 내어놓고 엎드려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이시면서 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그 죄악을 예수님 자신이 담당하실 것을 예정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 자신이 지시고 대신 죽으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다고 모든 사람이 무조건 다 용서 받고 죄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만 합니다. 나오지 않는다면, 빛을 피하여 어둠 속에 엎드려 있다면, 죄를 자기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다면, 그 죄악은 자기가 책임지고 지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속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간음한 여인도 사함 받았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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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1-16절]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하고 
6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좀 길지만 본문을 모두 적었습니다. ^^
‘포도원 비유’로 잘 알려진, 신자라면 대부분 잘 아는, 유명한 성경내용입니다.
이 포도원 비유는 왜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땀 흘려 수고한 품꾼과 해질녘에 와서 일도 안 한 품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느냐 하는 문제의 논쟁거리이기도 하고,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불러오는 성경내용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선 흔히 ‘포도원 비유’, 혹은 ‘포도원 품군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 있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1절을 읽어 보십시오. “천국은.......집주인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무엇과 같다고요? 집주인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포도원도 아니고 포도원 품군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하게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해야 합니다. 천국이 포도원 주인이란 말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주님입니다. 포도원(천국)을 소유하고 품삯(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분입니다. 포도원이 천국이 아니고 그 분이 바로 천국이란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 어디에서 가까이 오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천국입니다. 천국이신 주님이 가까이 오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천국 되신 분이 포도원을 열어놓고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온 종일 돌아다녔습니다. 생명 없이 헤매는 자들에게 품삯 한 데나리온, 아니 생명을 나누어주려고 헤매고 찾아다녔습니다.
그 주인의 애타는 심정도 모르는 채 품군들은 온종일 포도원 안에서 땀 흘려 일하고 나서 더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해질녘에 아슬아슬 포도원에 들어온 품군부터 한 데나리온씩 품삯, 아니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일찍 와서 온종일 일한 품군들이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을 악한 자로 만들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품삯은 포도원에서 땀흘려 일한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부르심에, 애타게 찾으심에 응답한 대가였던 것입니다. 일찍 오든 늦게 오든 오는 자에게는 다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주인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대목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포도원에 들어온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주님께 귀한 믿음의 순서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온 자들이 수고한 대가를 기대하며 더 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구원을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해질녘에 아슬아슬 들어와 한 데나리온을 받은 품군은 황공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식량이 없어 꼼짝없이 굶어야(죽어야) 하는 자신을 그 늦은 시각에 불러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에게 그는 얼마나 감격해 하고 감사해 할까요? 그 감격과 감사가 포도원 주인에게 귀한 것입니다. 먼저 와 일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품군 보다 나중 와 감격하고 감사하는 품군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도록 신앙생활 했다고 주님께서 더 귀하게 여기실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입니다. 무익한 종이라 여기십시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흘리신 피로 구원 받습니다. 그 감격과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먼저 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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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그 몸을 십자가에서 부수어 나누어주신 생명, 곧 하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 밤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살이다.”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피다.”
세상 끝날까지 이를 기념하며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살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먹는 자는 주님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은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가졌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세상이 이기지 못 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 그 생명을 받아들였으니 남편으로부터 생명의 씨를 받은 것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또 그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 받은 생명의 씨앗, 곧 복음으로 전도하여 낳은 복음의 자녀를 말입니다.

-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에 붙은 가지가 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자는 밖에 버리어 말라질 것이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는 풍성한 생명과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교회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구원을 얻었다고 좋아라, 제 갈 길로 흩어지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자들은 당연히 다시 모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성도들은 그 안에서 영양을 보급 받으며 성장해야 합니다. 또 갓 태어난 자와 연약한 자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팔을 먹은 자는 팔이 되고 발을 먹은 자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각자의 은사요 사명입니다. 교회를 떠난 신앙생활은 불타는 장작 하나를 꺼내놓으면 꺼지듯 곧 꺼질 것입니다.

-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큰 비밀입니다. 

(마태복음 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요한복음 15:4-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에베소서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에베소서 5: 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코로나를 이유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분들이 더러 계신 듯 합니다.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에 출석하라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우리와 당신의 예배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코로나를 이겨내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주님이 머리이신 교회, 주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에 우리는 속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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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6)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슨 해로움이나 위험이 있습니까?

텔레비전, 연극, 비디오, 도서 등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형태의 오락물은 어떠 합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흥물들이 삶에서 점 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에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성회는 유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대한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다 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대부분은 연령의 차이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 연령의 그룹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하며 또한 같 은 유흥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 포함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과 나이 많으신 분 들의 그룹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사회의 문화나 혹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그들은 청년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가 부식되거나 손실되지 않도록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종 유흥 매체에 대한 것을 취급한 아래의 사항들은 우 선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성경적 결론에 입 각하여서 특별한 매개체에 대해 가지는 전통적인 태도와 현세대의 태도를 요약하였습니 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성숙해질 수록, 우리는 현대의 여러가지 형태의 유흥이 영적 생명 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경 원리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슨 종류와 유형의 유흥이 적절 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 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 45; 20:7; 베드로전서 1:15, 16) 라고 하는 명령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영적으로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됨” 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이 하나 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은 그 의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 게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이 의로움 가운데 지시하신 모든 면에서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며, 또 성령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 는 그러한 일로부터 절제하도록 도우시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거룩하다고 선언하 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로마서 6:12-19; 데살로니가전서 4:3, 4). 따라서 적합한 형태의 세속적인 유흥을 선택할 때에, 우리들은 성경이 저주하는 죄악된 활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든 것들이 거룩함의 표 준에 어긋난다고 결론을 지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간음, 혼전(婚前) 성생활, 동성애를 찬 양하는 것, 그리고 그밖에 그릇된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 교인에게 특별한 지혜와 지도가 필요한 때는 성경이 저주하지도 않으며 또한 승인하지도 않는 그러한 활동에 관련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조차도 성경에는 기독교인들 이 따라야 할 지침과 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에 위반되거나 혹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게 할 때에 그에게 죄가 되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 서 가르쳤습니다 (참고. 고린도전서 8:1-13; 로마서 14 장). 그러한 경우에 기독교인은 때 때로, 개인적으로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나 자 매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인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흔히 필요한데, 그 23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로마서 14:15; 고린도전서 8:13).

 

성화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은 구별됨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거룩”과 “거룩 함”을 의미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결하거나 깨끗지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의 그룹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그리 스도의 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3:1, 6:15). 우리들의 유흥 활동은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4, 5).

 

구별됨과 거룩함의 원리는 하나님의성회의 조례, 9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세속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에서 성경은 다음에 대하여 경고하나니 그들은 아래와 같다. 즉, 육신을 병들게 하고 마음과 심령을 썩게 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일; 결국 남용케 되는 쾌락, 직위와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과 집착; 극단적인 태도, 적합지 않은 언어의 사 용, 부적당한 외모;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약화시키는 유혹과 이에 관련된 것 (누 가복음 21:34, 35; 로마서 8:5-8, 12:1, 2; 고린도후서 6:14-18; 에베소서 5:11; 디모데 전서 2:8-10, 4:12; 야고보서 4:4; 요한일서 2:15-17; 디도서 2:12) 등이다.”

 

마지막 원리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저 빠져나가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과 그들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완전히 체험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유흥은 명확히 잘못된 것이며, 그 러한 일에 참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유흥의 종류 가운데 어떤 것들 은 성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한 지침이 주 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으로는 가한 것이나 유익한 것은 아닌 것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두 번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 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고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원리는 유흥을 포 함한 모든 활동에 적용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 24 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합 니다 (고린도전서 10:23)

 

어떤 유흥은 그것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유흥이든지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기독교 인은 그러한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일에 지나치게 열중함 으로서 흔히 영적으로 중화되거나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하나 님보다는 다른 어떤 능력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 이 바라는 바는 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이 진리의 말씀에 비 추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유흥이 덕을 세우거나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굳세게 만들까?” 또는 “이 특별한 유흥이 나 의 생활을 일시적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영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은 도덕적 으로 허용되는 모든 유흥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유흥의 장소가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함께 웃고 노는 시 간들은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족이 결속하도록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유익한 유흥을 통하여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유흥이 항상 교육적이어야 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유흥은 악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 도 만들어 주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 는 중립적인 형태의 유흥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어린이들의 나 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이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 이어야만 합니다. 몇 년 후에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은 재미있게 놀 줄도 모른다고 조롱할 때에, 어린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 인은 죄악된 행위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유흥을 위해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제품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 제품 에 적당한 나이 수준을 알리는 레이블을 제품에 부착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 켜왔습니다. 이러한 레이블을 붙이는 제도는 세속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품은 폭력, 나체, 성적인 내용, 그리고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R” 등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연령 에게 피하도록 경계를 주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PG 13, TV 14, NC 17 등 과 같은 등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등급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이 어린 아이들 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어떤 내용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제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지금 그 나이보다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또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장합니다. 세속적인 검열관이 보 아도 좋다고 말한다 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 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러한 행동과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것을 묘사하 는 그러한 것들 속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적 생동력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G” 등급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서 특별히 주의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에 “R” 등급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등급을 정하는 그러한 제도는 그 이야 기 뒤에 있는 사상적 의도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습니다. 행동주의자 작가나 제작 자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모든 성인들은 그러한 영화나 비디오 가 어린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 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 비평가들은 이러한 진실로부터의 탈선에 대해서 경종을 울 리고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것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만 합니다.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을 위한 여가 시간의 활동에 합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많은 유흥 프로그램과 영화를 직접 볼 필요는 없습니다. 등급제도 이외에도 여러 유흥 매체에 대해 평론한 인쇄물들은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관해서 경고할 것입니 다.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염려하는 시청자들이 폭력과 성적인 내용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그러한 등급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영화를 상영하는 공중 영화관은 기독교인 – 흔히 가족과 함께 – 과 그러한 영화를 함께 감상하는 비 기독교인들의 유익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추가적인 관심 요인을 제공 할지 모릅니다. 모든 형태의 유흥에서 기독교인은 그 유흥의 실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유익한 유흥이 저 주하는 말, 술취함, 그리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말을 하는 군중에 의해서 망쳐질 수도 있습 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사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많은 영향을 미 쳐왔습니다. 심지어 때때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종교 프로그램 조차도 신자들이 지역 교회 에서 기대하는 것에 대해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뉴스 취재원들이 보도하는 뉴스의 경향 은 사람들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미묘하게 영향을 줍니다. 광고주들은 여가 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욕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매력적이고 해(害)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나 다른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 찬가지로 면밀한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연속 코미디극, 심야 프로그램, 그리고 코미디 프 로그램들은 특별히 유혹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웃는 것들은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며, 진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머들은 교묘하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 에 대해서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텔 레비전이 가족에게 매우 해(害)가 된다고 결정을 하고, 그들의 가정에서는 텔레비전을 가 지지 않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지라도, 텔레비전은 주의 깊게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며, 결코 그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보모의 대용품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면에 대하여 염려하는 성인, 부모, 그리고 영 적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가지는 사생활에서 비 기독교적인 주제와 그릇된 행실을 촉진시키는 케이블 채널뿐만 아니라 유료 시청을 통해 서 온갖 종류의 호색적(好色的)인 요소들에 관한 것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모 든 성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 교인들은 그들의 유선 방송 회사에게 적절하게 여과되지 않은 혐오감을 주는 모든 프로 그램에 대한 비디오와 오디오 신호를 철저히 봉쇄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케이블 방송 국들은 그러한 채널 프로그램들이 가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료로 완전히 봉쇄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읽을거리

 

어떤 지역사회의 공립 도서관은, 검열 없이 무제한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 명(美名) 아래, 인쇄물이나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부도덕한 것들과 심지어 포르노 서적들 까지도 수집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도서관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숙하지 못한 대중의 태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 라, 기독교인들이 관찰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동안에 일어난 조용한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와 동시에, 반기독교인의 계획을 가진 행동주의자 그룹들은 그들의 주장을 촉진시키는 서적을 포함하도록 압력을 넣어 왔습니다. 책방이나 소매점포의 잡지 진열대는 성경의 가 르침은 물론 공중의 도덕을 해치는 읽을거리들을 뻔뻔스럽게 진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터넷

 

가장 최근의 유흥 매체인 인터넷은 교회가 청년과 성인들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 전쟁터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매체의 형태에 대해서 도덕적 표준이 느슨 28 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비록 그러한 표준이 최근에 매우 침식을 당하긴 했지만), 인 터넷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떠한 제한이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지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것 이며, 또한 그러한 프로그램은 원하지 않는 모든 곳에 접속하는 것을 방지하지는 못합니 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원거리 통신 학교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에 게 추천한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컴퓨터 모니터에 부착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 는 특별히 포르노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여 접촉하는 것을 피함으로 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서만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관심사:

 

거룩함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항상 율법주의나 세속적인 것을 촉진시키려 한다는 책임 추궁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표준을 정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을 지키지 못 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매체의 표현에 대해서 위에서 언 급한 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에 반대되는 가치, 표 준, 및 행동에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헌신에 대해서 계속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활동을 단지 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임을 명심해야만 합니 다.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유구한 성품을 지니지 못 하는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휴식, 유흥, 그리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결정한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은 입술로 나오는 모든 안일한 말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마태복 음 12:36), 시간과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대한 깊은 책임감 때문에 육체적 및 정 신적 힘을 유지하기에 겨우 충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유흥이나 오락을 위해 소비합니다. 책임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저울질합니다. 신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유흥을 위한 장소를 평가하고 재고(再 考)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성회 조례, 8 조, 6 항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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