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달리기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7. 1. 5. 01:18

 

하늘이 찌뿌듯한 것이 금방 진눈개비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 같은데, 온종일 흐리기만 할 뿐, 비도 오지 않고 눈도 오지 않는다. 오늘 아침 일기 예보는 분명히 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늘상 빗나가기만 하는 일기예보, 제대로 한 번 맞추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정말 믿으면 안되는 것이 일기예보구나 혼자서 궁시렁거리다가 나의 인생길의 달음박질은 과연 어떨까? 늘상 빗나가기만 하는 일기예보처럼 내 인생도 목적지에서 한참 빗나간 달음박질을 달려가고 있지나 않은지, 갑자기 인생길의 달음박질에 대한 경각심과 함께 마침, 아주 오래전 읽어본 책의 주인공, 빗나간 달리기를 하다가 망한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떠오르기에 잠시 나누어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이 연말연시에 조금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 책은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에게는 과연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책인데 아마도 독자 여러분도 모두 읽어보았을 것 같다. 그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줄거리를 대략 요약하여 소개하면 이렇다. "러시아에 바흠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땅을 많이 소유한 대지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우크라이나 지방에 가면 땅값이 엄청나게 싸기 때문에 적은 돈만 있어도 대지주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바흠은 지체하지 않고 없는 돈을 긁어 모은 후, 개나리봇짐을 지고서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향했다. 수십 일이 걸려서 그는 마침내 우크라이나에 도착을 했고, 살펴보니 과연 듣던대로 엄청나게 땅값이 쌌다. 인심도 좋아서 땅을 거래하는데 한 평 두 평씩 파는 것이 아니라 하루치에 얼마씩 해서 거래가 되고 있었다. 땅을 사는 사람이 아침에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출발을 해서 열심히 뛰어서 해가 질 때까지 그가 밟은 모든 면적을 값을 매겨서 사고 팔고 하는 것이다. 바흠은 그 지방 촌장의 땅을 사도록 주선이 되었고 내일이면 그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너무나 흥분한 바흠은 한 숨도 자지못하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 일찍 그는 돈과 함께 빵과 물, 그리고 곡괭이를 들고서 약속장소에 나갔다. 이미 촌장과 그의 하인들이 출발점을 알리는 말뚝을 박아놓고서 바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흠은 자기가 준비해 온 돈을 촌장에게 건네주었고 촌장은 그 돈을 받으면서 바흠에게 분명히 다시 한번 “자네, 이것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게나. 자네가 아무리 많은 땅을 밟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지, 해가 지고 나서 돌아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네!” 하고 약속을 일깨워 주었고, 바흠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동편에 해가 힘있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바흠도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지평선을 향해서 힘있게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하는 일념에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중간 중간에 멈추어서 곡괭이로 땅에 표시를 하는 것 외에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고 오직 대지주가 될 수 있는 단 한 번의 이 기회를 놓칠 새라 그는  뛰고 또 뛰었다.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고 오랜간만에 뛰어서 그런지 온몸이 천근처럼 무거웠으나 쉴 수도 마실 수도 없었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4분의 3정도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을 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뛰고 돌아가야지 하면서 뛰다가 “반드시 해가 지기전 까지…” 라는 촌장의 말이 생각나 아쉬운 마음을 뒤로 접고 그는 방향을 되돌려 출발점을 향해서 다시 뛰기 시작을 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끝이다. 그래서 그는 죽을 각오를 가지고 뛰고 또 뛰었다. 다행히 저 멀리 촌장과 그의 하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가물가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흠의 정신도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버릴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달렸다. 드디어 해가 서산에 꼴깍 넘어감과 동시에, 바흠은 출발점에 도착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심장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말았고, 바흠은 그자리에 쓰러져 영영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촌장은 주위에 있는 하인들에게 그를 잘 묻어 주라고 명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인간에게는 자기가 묻힐 여섯자 땅만 있으면 되는 것을…!”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야 여러가지이겠지만, 결국 요약하면,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자기가 죽어서 묻힐 6자 무덤뿐이란 것이다. 요즘은 그 6자의 땅마저도 아깝다고 화장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높지만 말이다.  바흠은 무조건 뛰기만 할 것이 아니였다. 가다가 좀 쉬면서 주위를 둘러도 보고, 물도 좀 마셔가면서 여유를 가지고 지금 자기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이리도 열심히 뛰고 있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좀 살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오늘도 뛰고 또 뛴다. 명예를 위해서, 지식과 부를 위해서, 인기를 위해서 글자 그대로 숨가쁘게 질주를 한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교계 안에서는 또 어떠한가? 교계를 넓혀서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좀 더 좁혀서 생각해 보면 작금의 목사님들마저 뛰고 또 뛴다. 땅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하는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욕심에 이끌려 무작정 뛰기만 하다가 망한 ‘바흠’처럼, 현대도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성공가도를 향해 무섭게 질주를 하고 있다. 주님께로부터 부름받은 목적 마저 상실한 채 그저 달리고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양떼들이 아프다고 울어도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Caring이란 남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목사님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 받은 목적이 무엇인가? 목사님들을 부르신 목적은 요한복음21:15-19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곳에 보면 “주님의 양떼를 1.먹이고 2치고 3.먹이는 것, ‘ Tend와 Feed’ 이다. 무슨 뜻인가? 여기에서 Tend란 ‘시중들다, 돌보다’의 뜻이며, 'Feed’란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것을 말한다.

젖에도 두 가지가 있다. 모유가 있고 분유가 있다. 물론, 신생아에게 있어 모유보다 더 좋은 영양소는 없다. 모유에는 분유가 가지고 있지 않은 각종 영양소가 면역 항체성 물질과 함께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어머니들이 손 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아기에게 모유보다는 분유를 더 많이 먹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 목사님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수님의 어린 양떼들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꼴,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고 각종 병균, 이단 사설로 부터 보호할 수 있는 면역체계를 갖춘 가장 좋은 양식이 무엇인가? 무엇으로 Feeding해야만 성도들이 병들지 않고 더 성숙해져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분은 그리 많지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생명의 꼴인 성경은 너무 딱딱하다는 이유로, 또 성도들이 즐겨듣지를 않는다는 이유로, 각종 다른 교훈과 철학서적들을 섞어서 먹이기도 하고, 성경에도 없는 이적과 기사를 상품으로 내 걸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릿광대의 역활도 서슴치 않는다. 그래야만 더 많은 성도들을 쉽게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은 성도들을 모아야 더 좋은 차 를 굴릴 수 있고, 큰 종이라고 떠받들림도 받고 대접받는다. 다 좋다. 그렇다고 하여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할 일이다.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곧 사명자란 소리고 사명자라면 사명을 부여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이고, 사명을 주신 그분 앞에서 반드시 셈해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달려가도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절 말씀)”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는 영벌과 영생에 대한 심판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냐, 아니면 자신이 지은 죄, 자기자신이 다 당해야만 하느냐? 두 갈래로 갈라놓는 백보좌 심판이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청지기로서의 심판, 사명에 대한 충성과 불충성에 대한 심판, 상급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는 좀 쉼표를 가지면 어떨까 싶다. 쉬면서 좀 살펴보자.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뛰어왔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 뛰어갈 것이냐?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좀 뒤돌아 보자. 그만큼 뛰어 왔으면 족하다. 이제는 돌아가야할 본향도 좀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내 이웃도 좀 돌아보자. 그들의 고통과 삶의 무게도 좀 나누어서 담당해 보자.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달려왔고,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으며, 내가 받은 이 사명이 누구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 하는 것도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이 한해도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이 한해뿐 아니라, 평생을 두고 살펴보아야할 과제가 바로 나는 부름의 목적에 빗나간 달리기를 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쉼표는 마침표가 아니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다. 무조건 뛰고 달린다고 해서 제대로 달렸다고 할 수 없고, 무조건 뛰고 달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쉼표를 찍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시점이 바로 오늘이 아닐까? 급하게 돌아가는 세월이긴 하지만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잠시 쉬면서 한 번 둘러보자. 그래야, 더 늦기 전에 해결책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좀 빗나간 달리기를 멈추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별똥별/최송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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