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보여주어라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7. 1. 18. 02:23
길을 보여주어라
지난해를 돌이켜 보니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였다. 누구든지 그렇겠지만, 개인적으로 지난해처럼 어려웠던 때, 폭풍의 눈 속을 통과하는 듯, 모질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던 시기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는 오지 않고, 희망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쌍무지개와 같은 것일까? 열심히 사느라 살았건만…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제 정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 같은 아녀자가 보기에도 위태롭고 위기감마저 느끼는 요즘이다. 깊은 혼란과 혼돈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신약시대 바울 사도가 죄수로 끌려가며 탔던 배, 풍랑을 만나 좌초될 뻔한 ‘알렉산드리아’ 호가 오버랩되기에 몇 자 적어본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그 동족에게 시기와 질시, 미움과 핍박을 받고 신성모독죄와 소란죄로 피소되어 로마 총독에게 끌려가 몇 번씩이나 심문을 받다가 유대 땅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알고 ‘가이사’ 황제에게 직접 심문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이었다. 바울이 탄 배가, ‘미항’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10월 초에 있는 ‘대속죄일’을 그 항구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대속죄일 후에는 대개 풍랑이 거칠어서 항해하지 않던가, 항해를 하더라도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직시한 바울이 ‘미항’에서 겨울을 지난 후 떠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선장은 자기가 선장이란 자부심 때문인지, 죄수복을 입은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작은 ‘미항’ 보다 더 큰 ‘뵈닉스’ 항으로 떠나겠다 고집한다. 이런 때, 죄수들의 총 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에게 결정권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바울의 말보다 그 배의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더 경청했고 결국은 그들의 뜻대로 ‘뵈닉스’ 항을 향해서 떠났던 것이다.
항해를 시작한 처음 며칠 동안은 남풍이 순하게 불었다. “저희(선장과 선원, 그리고 백부장 율리오)가 득의 한 줄 알고(행 27 : 13)”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돌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유라굴로’라고 하는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배는 큰 위기에 빠졌다. 잘못 생각하는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알렉산드리아’ 호는 좌초하기 직전의 위급함에까지 빠져들게 된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사태가 그때 그 ‘알렉산드리아’ 호의 신세처럼 좌초하기 직전의 상태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유라굴로’는 동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유루스’와 북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킬로’의 합성어로 ‘동북풍’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폭풍은 그곳의 전형적인 지형 때문에 형성되는 돌풍으로서 그레데 섬의 한가운데 솟아 있는 ‘이다(Ida)' 산맥에서 형성된 두 반대 기류가 맞부딪칠 때 발생하는데, 순한 남풍이 이런 돌풍과 겹쳐 북풍으로 급격하게 변하기 때문에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한 번 이 바람에 휩싸이면 배가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다 결국은 파선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서운 풍랑 속에 알렉산드리아 호가 빠져들었다.
기록을 보면, 알렉산드리아 호 승객은 죄수를 포함해서 276명이 타고 있었다고 하니 지금부터 약 2,000여 년 전의 배치고는 어마어마하게 큰 배였던 것 같다. 그 속에 탄 사람들의 신분도 가지각색이었다. 따라서 그들 정신세계, 사상의 세계도 가지각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나누어 보면 두 부류가 거기 있었을 뿐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백부장 ‘율리오’를 비롯한 군인들, 선장을 비롯한 뱃사람들이 지배자라면, 바울을 포함한 모든 죄수가 피지배자들이라 하겠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은 비록 지위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현대 젊은이들의 표현대로라면 ‘금수저’ ‘흙 수저’로 나누어지겠지만, 그래 봤자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같은 운명이란 사실이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그 배와 함께 풍랑을 겪어야 하고, 배가 파선하면 그 안에 탄 사람들은 직위, 지식, 부와 빈에 관계없이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호에 탄 사람들의 공동운명이다.
당시에 내가 지배자란 마음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던 선장과 그의 말에 부화뇌동(?) 됐던 백부장 ‘율리오’를 보게 된다. 피지배층인 바울의 말은 무시해도 된다는 교만한 지도자들이 배에 탄 모든 승객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트리게 된 것이다. 현대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정치인들이 민중을 선동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살 길을 보여주는 용기있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바울에게는 남다른 무엇이 있었는가? 참 흥미롭다.
밤낮 사흘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이제 더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 앞에서 기진해 갔다. 행여나 살 길이 있으려나? 선장과 선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그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으랴. 사도행전 기자 누가 선생은 “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하고 그 당시의 절망적 상황을 사실적 표현으로 잘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풍랑을 만나게 된 것이 순전히 지배자들의 잘못이지만 문제는 피지배자들의 태도이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지도자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만 원망하고 있다면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때 바울처럼 살 길을 보여주는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은 없는가?
오늘 우리도 누구 때문인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로 어렵고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때일수록 국가의 권력자들이나 정치인들은 자기 살 길을 찾아 달아날 생각을 하지 말고 불안에 떨고 있는 민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한다면 좋을 텐데….서로 잘못이 없다고 상대를 향해서 손가락질만 해대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부패했다고, 캄캄하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캄캄함을 밝혀줄 빛(등대)에 기름을 채워야 한다. 불평한다고 키를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 없다. 불평보다는 차라리 해법(solution)을 찾아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지배자들과 달라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비록 작은 무리이며 약하고 천대받는 피지배층이라고 할지라도 분연히 일어서서 외쳐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 길이 있노라고…”
어느 나라에서나 기독교인은 사람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할 사명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욱 거세게 몰아가는 이들에게 편승하여 배를 더욱 위기에 몰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 무장하여 자기가 먼저 든든히 서고, 그리고 흑암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살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 : 25)"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 그분이 말씀하셨으니 내 실생활에서 그대로 될 줄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2017년 새해, 이 한해는,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다른 모든 이에게도 살 길을 보여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믿음의 용장들이 나라마다 교회마다 동네마다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며 소원해 본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Your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시 119 : 105)"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 27: 20- 26)"
출처: 목양연가/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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