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言語)의 위력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7. 2. 6. 08:19

언어(言語)의 위력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빛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말로 사랑을 표현하고 말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인생살이를 한마디로 축약한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로운 표현이다. 사실, 말을 많이 한다고 말 잘하는 것 아니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정확히 그 뜻을 알고 사용하는 것과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비록 매끄럽지 못하고 조금은 거칠게 보여도, 화자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 진솔하게 하는 한 마디 말이라면 그것은 곧 금은과 같으리라.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럼프 씨가 바로 그 한 예다.

그를 보면, 알고(knowing) 사용하는 언어, 그 위력이란 어떤 것인가? 가르쳐준다. 모든 언론, 대다수의 미국민, 그리고 모든 국가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 지적 당한 것이 그의 말이었다. “막말 가, 인신공격 자, 인종차별 자,”등으로 불리우며 그는 많은 지성인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심하게는 그를 가리켜  ‘미친(Insane)자”라고까지 비웃었다. 그러나...트럼프는 끝까지 자신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고 그의 막말은 더욱더 강도를 높여가는 것같아서 보는 이들의 눈에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다. 저런 사람이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개표결과는 완전 충격 그 자체였다. 글자 그대로 세계를 경악게 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지지표를 얻은 후보는, 모두가 기대했던,  세련되고 知적인 힐러리 후보가 아니라 ‘막말 가’로 언론의 비웃음을 샀던 바로 그 ‘트럼프’였다. 놀랍지 않은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의 언어 능력이 일구어낸 결과라고 본다.  그랬다. 민심을 파고드는 그의 언어능력은 탁월했고 많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언어,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미국 내에서도 기득권자들에 의해 버림받았다며 울분을 토하는 노동자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동성애 천국으로 변해가는 미국을 보면서 개탄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을, 그리고 무차별적 완화정책(똘레랑스 정책)으로 망가져 가는  국제정세까지… 이런 사회적 그늘을 그는 한 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 정부를 향해서 울분을 토하고 막말을 쏟아붓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의 아픈 부분을 정확히 찌르면서 그들의 감성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보는 ‘트럼프’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탁월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라 말하고 싶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공약을 지켜나가는 참된 지도자일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정치계나 사회생활에서만 언어가 위력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말씀이(logos)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구속주가 되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을 입을 수 있다니?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음은 더욱 놀라운 힘이요, 위력이다.  뿐만 아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사탄이 최초의 인간, 하와를 미혹할 때 쓴 무기도 다름 아닌 바로  ‘현란한 말의 위력’이 그 기초였다는 것을 아는가?  잘못된 언어 사용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말(언어)이란 위선의 방패로서 한 방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종종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죄된 본성을 잘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것일까? 이렇듯, 언어란 사용하기에 따라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그 말 때문에 영벌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니,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언어 능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이런 사실을 매순간 인식하고 내 입에서 나가는 모든 말이 정제되고 절제될 수 있다면 후회가 없는 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저주의 말을 쉽게 내뱉지 말아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다. 한 기독교 병원에 만삭이 된 젊은 임산부가 해산하러 왔다. 그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기에 벽마다 예수의 성화 액자를 걸어두었다. 그것을 본 젊은 임산부가 짜증을 내면서 “저 액자 좀 떼세요, 보기 싫어요.”  "저희들 맘대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간호사들의 말에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남편은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남편의 권한으로 저 액자를 내리고야 말겠어요. 태어날 내 아이에게는 절대로 저 예수라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너무 화를 내는 임산부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병원 측에서는 하는 수 없이 원장과 상의하여 예수님 액자를 모두 떼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 여인은 아주 건강해 보이고 잘생긴 아들을 출산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여인의 말대로 이 아이는 영원히 예수님의 액자를 볼 수 없는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볼 만한 예가 아닐까 싶다. 말이란 이렇게 위력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성경에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 : 28)"라고 심판의 기준을 우리 입에서 나온 말대로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심을 본다.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사건이 바로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 정권과 협렵자들이 12년(1933~45)동안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국가 차원의 체계적이고 관료적인 탄압과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불에 의하여 희생된 제물(번제)' 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라는 뜻에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홀로코스트의 결과 사망한 유대인은 575만여 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과사전

이것이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아픈 역사이건만, 무엇 때문에 유독 유대인들이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시기 질투에 눈이 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선동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친 유대민족들, 그 포학한 입술의 열매란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마땅할 죄인이라며 끌고 온 예수,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대야에 물을 떠다가 군중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씻는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에게 선동을 당한 어리석고 무지한 군중들은 외쳤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 (마 27장 24-25절 참조)” 얼마나 무서운 저주의 말인가? 그들이 무심코 뱉어낸 그 저주의 말이 훗날에 그대로 그들과 그 자손들이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다음, 어려운 때일수록 믿음의 말(언어)로 승리해야.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 그 자체가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 소망마저 끊어졌으나 그럴수록 더욱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고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분 안에서만 내세의 소망이 있음을 매순간마다 고백하며 증거하기를 쉬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실제 어려움의 무게일 수 있고 어쩌면 신앙의 성숙도까지 갈 것도 없이 정서적, 인격적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 별것 아닌데 작은 이권에 “아웅다웅” 잡아 죽일 듯 목숨 걸고, 입으로 상대를 저주하기도 하며 “죽겠다, 죽겠다”. 부정의 소리로 자신을 옭아매기도 한다. 더 심하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생명마저 던져버리기도 한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내가 하는 모든 언어들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생각을 한다면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벧후 3 : 10절 참조)". 했다.

마음 설레며 새해를 맞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3주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한해의 삶을 계획하기도 하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새해라고 해서 늘 행복한 일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앞에 언제나 평탄한 대로(大路)만 펼쳐져 있겠는가? 우리가 지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수두룩 널려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마치 거대한 바위 같고 태산 같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걸어야 할 길(路),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오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바라다가 안 된다 절망하고 주어진 삶을 내 입술로 저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어둡고 캄캄한 때일수록 밝은 등불이 필요하듯, 다가올 캄캄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의 길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면 “새해는 생명을 살리는 언어”로 내 가슴 한가득 채우고 날마다 내 입술로 믿음의 언어를 선포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 기준이 되는 언어의 위력을 항상 기억하면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성숙함이 내게 더할 수 있기를….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 14 : 1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더디하라( 약 1: 19).”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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