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자준 목사 2017. 2. 6. 08:21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혀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재자들을 둘씩 짝을지어서 보냅니다. 여섯 팀이 구성된 셈이지요. 10장의 첫 단락이 이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13장) 성령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셔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하여 둘을 보내게 하십니다.

율법에서 두 사람의 증거는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그리고 둘은 협력을 극대화 할 수 있습니다. 셋은 의견일치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몇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비사(비유적 언설)를 드신 이유는 '지혜와 순결'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권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혜롭게 잘 처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전도현장은 평소와 같은
세상이나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뱀과 비둘기는 지혜와 순결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들입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뱀이 사람처럼 지혜롭다는 뜻이 아니라 뱀의 용의주도한 공격의 자세나 은신, 그리고 발도 없이 배로 밀고다니는 것 등을 보면서, 전도자도 자신만의 대처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턱대고 나대지말고 신중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능력만 믿고 겁도 없이 설치다가는 사역을 망치게 됩니다.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비둘기는 순결하면서도 정결한 새로서 가난한 자들이 드렸던 제물이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번 겨울에도 산행을 댓 번 했습니다. 산비둘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참 순결해보이더군요. 비둘기소리를 들어보면
조용합니다. 구,구,구... 나직한 소리로 주변에 자신을 알립니다. 밭에서 모이활동을 하다가 가끔 맹금류에게 잡혀먹히기도 하지요.

전도자의 순결이란 오늘 본문 앞 단락에서 말씀하신바 대로 돈 조심하고 대접받으려들지 말고 평안을 비는 것으로 기본을 삼고 복음외적인 일로 빌미를 제공하여 공격을 받지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7절, 그런 가운데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회란 유대인들의 지방의회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가 아닙니다. 공회에서 정죄를 받고 회당에서 채찍질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로부터 박해가 있을 것을 알고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여러 당파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말로 시험하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지요.

스데반이나 야고보 사도는 알찍 순교했습니다만, 전도자는 이리떼가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순교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경우로서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최선의 수단은 아닙니다. 기독교 순교는 무슬림들처럼 거짓에 세뇌되어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간계와 포악함을 간파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생활도 단정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18절로 20절 입니다.
앞서 말한 종교적 박해뿐만 아니라 정치적 박해도 받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세상 통치자들을 피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인 줄 알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란 믿음과 각오로 담대히 서야 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할 말을 주십니다.
아버지의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든든한지요.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만큼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자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었겠습니까.

현대의 환난전 휴거론자들을 보면 대개 환난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신적인 죽음은 그리 무서운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로 '나'도 가기에 담담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 것이 진정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늘 말씀과 기도로 성령안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적 종말과 함께 개인적 종말의 때를 항상 준비하는 신자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21절, 장차 국가와 사회 구성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되면 볼짱 다 본 셈이지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란 말입니다. 언제? 말세지말에!
가족해체를 넘어서 골육상쟁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피하려면 가정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북한이 그렇지요. 그 정도는 맛뵈기 수준입니다. 큰 환난과 함께 무서운 때가 올 것입니다.

22절,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끝까지 견딜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남은 자 사상은 신약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남은 자란 '이기는 자'로 나타납니다.

보이는 교회에 속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믿음이 아닌 종교적 신념으로도 얼마든지 교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말세에 배교의 대열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결과적 선택입니다. 그리스도(구원자-하나님이 보내신 자) 안에 있는 자를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예정(계획)하셨습니다. 마지막 추수 때에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나 가라지는 버려집니다.

농사를 지어본 분들은 다 압니다.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시고 심을 땅도 주시고 씨도 주셨습니다. 농부가 땀흘려 일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니요 하나님이 결실케 하십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은 믿음과 순종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입술의 고백이란 행위를 담보(보증)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신행일치, 언행일치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끝으로 박해를 받으면 피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순교가 좋사오니!,
한다면 누가 말리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복음의 그릇이 쉽사리 빨리 순교당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전파는 화급한 일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만민에게 속히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여전히 아직도 많습니다.

재림 후에는 전도의 기회도 구원의 기회도 없습니다. 오직 두려운 심판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읽기만 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연속강해를 이어가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을 상고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주의 뜻을 받들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예화나 긴 적용을 되도록이면 삼가고 있습니다.

아무튼 전도자의 직임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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