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서정

개혁주의 교리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은 항상 신적 작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으로 부터 서술되지 않는 모든 구원의 서정에 대한 주장들은 거짓 교리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역사적 정통 교리는 항상 변함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신적 작정으로 부터 서술되어야 한다.

신적 작정의 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교리도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구원의 서정은 신약 성경의 교리가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교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에 신자들에게 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 신자들에게 해당한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이스라엘도 모두 신적 작정 가운데 유효적 부르심을 받아서 중생과 회심과 믿음과 칭의의 과정을 거쳐서 영화에 이르렀다.

구약 모든 선택받은 백성들은 신적 작정을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과 동일한 구원의 과정을 따라서 영화로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 교리는 단지 신약의 교리가 아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포함하는 교리이다.

가장 먼저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신적 작정 가운데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으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이 있다.

그리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된 자들에게는 유효적 부르심이 있다.

그리고 중생과 희심과 신앙과 칭의에 이르는 전 과정은 항상 논리적일뿐 시간의 순서는 아니다.

신자들의 구원은 시간의 순서를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간이란 인류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한 방편일뿐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을 따라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이 되는 것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의 선택이다.

인간 편에서는 공로는 전혀 없다.

다만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없지만 개혁 교리는 반율법주의를 거짓 교리로 단죄하기에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당위법 조차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신자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마땅히 해아할 도리는 있다.

그것이 당위법이다.

신자의 공로로 행할 수 없으나 행하여야 하는 영원한 도덕법이 있다.

그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인간이 자기 의로 자력으로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인류는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위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있다.

중생한 신자들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결국 중생한 이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간다.

그 중생한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영원한 도덕법을 성취해가는 삶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순종이라는 과정이 요구된다.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있는 신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영원한 도덕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생한 신자들이 영원한 도덕법을 따라서 살아갈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거기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인간의 공로도 인간의 자기 의도 없다.

영원한 도덕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영화로움에 이르는 법으로서 십계명은 그것을 지켜가는 과정을 통하여서 영화로움에 이른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성화란 영화의 시작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화로움에 이르기 전까지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부단히 영화의 완성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선수와 같다.(갈 2:2)

그때에 사도 바울이 푯대로 삼은 영원한 도덕법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통하여서 마음에 심기워주신 영원한 도덕법이다.

신자들은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켜가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되어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부단히 신자들 안에 하나님의 계명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영역의 개념 보다 통치의 개념이 앞선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가시적 교회에 모여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때에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한 신자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아무리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도 그곳이 결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의 서정의 교리는 교회론과도 연결된다.

하나님의 교회란 중생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여서 세워진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가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방 종교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법을 잃어 버리고 철저하게 세속화 되어 버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라는 색채를 띄고 있는 서양 종교이다.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을 신의 대리자로 여기는 로마 카톨릭 교회는 비참하게도 하나님의 법을 상실하여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교리는 참된 교회의 교리와 맞물려 있다.

참되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게 참된 신자들이 없는 교회는 그야말로 복마전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서 사데 교회를 책망하셨을때에 그러한 교리가 드러났다. (계 3:1~6)

결국 참된 신자가 사라져 버린 시대가 아닌가 우려 스럽다.

로마 카톨릭 교회 처럼 참된 신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이다.

지금의 개신교는 종교 정서주의 만 남아서 예배시에 꽥꽥 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나라의 계명에 순종해야하는 교리들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 가운데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된 신자들에게 구원이란 자신에게는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교회론적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 기록한 증거들을 살펴 보면 알 수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4~12)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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