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그리스도와의 연합
둥지 2012.04.14 10:38 http://blog.daum.net/7gnak/15717996

 

 

5.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해하기 위해 언약을 알아야 한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예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부른 것이다.하나님과 아담의 교제는 언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담을 만드시고 정기적인 교제를 하신 것은 언약을 전제로 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관계는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다 라는 특별한 관계이다. 이 언약적 관계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즉 구원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사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 특별한 관계란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언약적 관계에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곧 구원이다. 구원이란 사건인 동시에 사건보다 선행하는 것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는 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나도 하나님을 알고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나를 자기의 자녀라 부르는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바로 이 특별한 관계에 들어갈 대상으로 우리를 예정해 주셨다. 그리고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없다면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다 무한자와 유한자가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것이다 어떻게 맺는가?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는 자녀로 부르고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대화하고 느끼고 그 친밀한 관계속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자와 유한자가 사이의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한계를 뛰어 넘을수 있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인격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그 채널로서 하니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독교의 종교는 없다. 그것이 없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와도 우리를 위해 죽었을 찌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은혜도 알고 감사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줄도 알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땅에 기어다니는 구더기에게 미분 적분방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떠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다. 우주를 아는 사람만이 우주가 광대하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 우리를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 언약적인 관계는 특별한 관계다. 이것은 전폭적인 헌신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우리는 그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기 원해서 부르신 그들에게 은사를, 언약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언약적 관계로 만드신 것이다. 구원은 이런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도 우리를 예정하신 대로 언약적 관계로 들어오시게 하는 관계다. 하나님의 형상을 아담에게 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신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3장38절에서 아담을 사람의 조상으로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다.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선택된 사람들이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이 언약의 징표다. 그 사람이 언약에 머무는지 머무르지 않는지 가리기 위한 시험지다. 그것을 따먹지 않은 한 그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 있음을 그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세상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언약적 관계가 파괴되고 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항상 부르신 다음에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람 부르시고 언약을 세우시고 이삭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야곱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계속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모세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셨다. 나중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을 파괴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너희들을 회복시키신다 하셨다. 예수님도 유월절 전날 밤 마지막 식사 때 이것은 나의 피로 살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라고 하셨다. 우리가 지금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룻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룻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있는 언약 안에 들어오는 신앙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올 때 그를 하나님이 복되게 하셨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언약에 들어갈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게 하는 사역이다.


고전 15장 21~22절, 롬 5장 12절~17절 구원에 관한 언약적 배경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아담을 대조하는 것이다. 구원을 이해하는 도표가 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역사에 존재하였던 인물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다. 구원의 원리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언약의 머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는 아담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미쳐진다는 대표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아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아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말미암는 모든 인간의 후손들이 아담처럼 범죄한 자로 아담처럼 범죄하고 아담처럼 죽는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죽는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죽음이다. 언약을 깨뜨린 자가 겪는 결과이다. 그래서 아담은 결국 자기 자신의 한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죄를 만든 사람은 아담 한 사람이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죄를 범했다. 행위로 죄인된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것이다. 내가 언약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같은 원리로 모든 사람이 의로움에 이른다는 것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새 언약에 들어가는 수단이 무엇인가?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마찬가지로 믿는자가 그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죄인 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케 하므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적 출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인 출생은 육체로 말미암아 영적 출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로 얻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성령의 아버지 삼위일체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으로써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언약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언약에 참여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 언약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믿음으로 참여한다. 그 믿음이 성령의 중생케 하심을 일으키신다.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기는 한데, 원인과 결과식으로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연쇄적인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10장~16장에 보면 언약적 모델로 되어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원의 경험을 원인과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다. 구원의 서정을 언약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루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성도들을 언약으로 한대 묶는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칭의와 성화처럼 구원의 경험중의 하나가 아니다. 구원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라고 한다. 그리스도 연합안에는 모든 구원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출발한다. 구원의 적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적용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엡5장 30~31절 “우리는 그의 몸의 한 지체다...”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되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몸이 성전 이라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연합 때문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한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언약적 관계이다. 그것이 곧 교회와 그리스도와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공동운명체이다. 교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힘은 바로 성령으로 부터이다. 언약적 관계를 깨버리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깨어 버리면 한 몸 한 지체가 될 수 없다. 약함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결국 언약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하고 육체를 죽이고 성령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즉 죄를 죽이고 성령께 순종하게 하는 이유는 언약 안에 머무르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목적은 죄를 소멸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소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신부로 그와 연합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이 일반 세상윤리와 다른 것이다. 죄의 소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순결한 신부로 언약의 동반자로 그와 연합하기위해 죄의 소멸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없고 그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구원의 경험도 결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안된다면 구원의 경험이 없다. 칭의 회심도 없고, 믿음도 없고 회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죄이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이 죄에 끌려가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악한 양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죄의 확신을 주시고 우리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케 하신다. 우리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것도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해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언약의 동반자로서 그리스도의 연합에 머무르지 못한다. 성령의 사역은 외적인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본질적인 그리스도의 형상 만든 요소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명령인 동시에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 연합적 힌트가 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짐승 머리 위에 안수하고 그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물로 드린다. 이럴 때 안수할 때 그 대상인 짐승과 제사를 드리는 제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짐승은 그 죄를 지은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서 그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의 인격적인 개체성을 믿는 믿음 때문에 불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신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죄도 언약으로 사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듯이 이것은 정해놓으신 질서이다.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되고 언약으로 죄사함 받는다. 다른 것으로 절대 죄시힘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 동물제사가 많이 행해졌던 것은 언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다. 그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다. 우리를 위한 언약에서 대신하신 죽음이다. 실제로 나의 죄가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다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가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그 외에는 죄가 해결되는 방법이 없다.


이사야 53장 4~6절, 이사야 53장 11~12절에서 고난 받는 종의 기사가 나온다. 고난 받는 종의 고통은 그 고난 받는 종에게 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이다. 채찍을 맞고 질고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수욕당하고 버림당하고 결국 죽는 그 모든 그의 고통은 그가 고난 받는 종과 붙어있는 모든 사람의 위한 고난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고통 받을 때 언약적으로 내가, 그와 함께 고난을 다 받았고 그가 장사되어 죽을 때 내가, 언약적으로 그와 함께 죽고 그가 부활할 때 내가, 함께 부활하여 산바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마25장40절“작은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identify) 한다. 언약적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가장 작은 자와 억울한 자와 버림 받은 자와 자기와 동일시한다. 구제하는 것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잊혀지지 아니하고 소멸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언약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다.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헌금한 것이 다른 사람이 오용한다 할지라도 내가 바친 것이 오용된다 할지라도, 바쳐진 것이 무효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받쳐진 것이다. 헌금할 때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 오직 언약적 하나님만 생각해야 한다. 요15장에서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는 한 구원의 경험은 모두 내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모두 내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이 중요한 것이다.


(3강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영원전에 예정하시고 작정하신대로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기를 쉬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계속하게 하옵소서. 우리속에 하나님의 이 사랑이 붙들린 바 된 간절한 심령을 주사 하나님의 종되기를 마음 또한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언약에 동참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우리 것으로 받았사오니, 우리가 복받은 사람이요 정말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세상의 재물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모하게 하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날마다 붙잡아 주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믿음의 기초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양심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이어서 coming soon.... 6부. 구원과 언약의 관계 편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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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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