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칭의론
구원론 2016. 7. 22. 08:30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칭의론
2016. 6. 22. 신원균 박사(한마음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
서 론
근래에 전통적 칭의론인 “법정적 칭의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다양한 칭의론들은 한국교회가 100년 이상을 지켜온 성경적 칭의론에 심각한 도전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법정적 칭의론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새관점 학파의 “선교적 칭의론”도 문제지만 전통적 칭의론을 일부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새관점 학파의 칭의론을 수용하려는 김세윤 박사의 “관계적 칭의론”도 문제가 있다. 특히 최근에 와서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을 전통적 입장에서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는 김영한 박사의 “중도적 칭의론” 입장도 큰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들의 칭의론에 대한 공통된 접근은 전통적 칭의론이 지나치게 하나님의 중심적 입장에서 다루기 때문에 인간의 성화적 책임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이제는 칭의와 성화가 융합된 형태, 즉 성화를 토대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칭의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로마 가톨릭이 칭의와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여 성화적 칭의를 주장한 “의화교리”의 변형이며, 또한 알미니안주의가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신인협력적 칭의론을 제시하며 “저항할 수 있는 은혜”와 “은혜로부터 타락 가능성”을 주장한 것의 변형일 뿐이다.
개혁교회의 전통적 칭의론은 이와 같은 인간중심적 칭의론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적 구원의 원리로 “법정적 칭의”, “선언적 칭의”, “확정적 칭의”, “오직 은혜적 칭의”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과 은혜에 기초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에 의한 칭의론을 확립했다. 또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되 분리시키지 않고 성화의 원인과 기초로써 칭의와 칭의의 열매와 증거로써 성화의 관계를 체계화시켰다.
이런 구원의 원리가 도르트 신조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할 따름이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라고 고백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신적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3장3절)라고 표현되었다. 이 고백들은 우리의 칭의와 구원이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총에 의한 선택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임을 강조해 주었다. 이처럼 개혁주의 칭의론은 철저하게 예정론 안에서 시작하고 다루어진다. 칭의론을 포함한 구원론 전체를 예정론 안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방식이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구원론의 원리이다.
따라서 근래에 등장하는 성화중심적 칭의론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서는 칭의를 포함하여 구원론 전체를 “인간 중심”으로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다루며, 특히 신적작정에 기초한 예정론 안에서 칭의론을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과 칭의론의 특징을 좀 더 세말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본 론
1. 비(非)개혁파 신학의 구원론 특징
1) 로마 가톨릭의 견해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구원의 모든 과정과 결정을 교회의 주최가 되는 교황과 신부들이 주도하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론 자체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이해하는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제시한다. 이들은 어린 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주입 은혜(gratia infusa)을 통해서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서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 분류는 크게 충족 은혜와 협력 은혜로 나뉠 수 있다.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의 심령과 삶에서의 구속 사역의 주관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편에서 행해지는 것보다는 인간 편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형태로 구원의 서정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Hollatz와 Philippi의 분류에 의하면 그 순서는 “소명 → 조명 → 회심 → 중생 → 신앙 → 칭의 → 신비적 연합 → 갱신 → 보전”으로 나누어진다.
3) 알미니안파의 견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외면적으로는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부수적이다. 이들에 대한 입장은 도르트 신조 잘못된 3-4교리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 은혜와 자유 의지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데, 회심의 과정을 볼 때 은혜는 자유 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작용하여 결정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 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의 도르트 신조 내용에서 보듯이 이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기회의 이용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완전한 영적 복과 구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충족한 은혜를 베푸신다고 본다. 결국 알미니안주의 입장은 은혜를 말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결정적 주체가 된다.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의 순서를 “소명 → 회개 → 신앙 → 의로 전가 → 중생 → 성화 → 견인”으로 말한다.
4) 웨슬리안의 견해
웨슬리적 혹은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자들은 17세기의 알미니우스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론 기초는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력설을 토대로 한다. 다만 원래의 알미니안주의보다는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많이 수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논리적 구성면에서는 알미니안파 보다 더 비논리적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의 특징은 점진적인 성화와 발전에 있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점진적인 성장에 대한 개념은 인간 의지에 의한 순간적인 요소와 결합된다. 웨슬리의 강조점은 선행적 은혜를 말하지만 이 은혜는 언제나 인간 의지의 결단과 성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구원의 서정을 그의 설교, “성경적 구원의 방법”에서 “선행 은혜의 역사 → 칭의 전의 회개 → 칭의와 죄의 용서 → 신생 혹 중생 → 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 → 완전 성화”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는 “선행 은총 → 회개(깨닫는 은총) → 칭의 → 성결”의 순서로 설명하였다.
4) 비(非)개혁파 신학의 구원의 서정 특징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비개혁파 신학은 알미니안주의의 견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구원론 순서에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회심의 기원과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 가에 대한 사실로 간명하게 드러나며, 또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는 대신 인간의 의지를 최종 결정적 자리에 전제시키는 데서 나타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인간론 중심적으로 치우치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약화시켰다. 김길성 교수는 이런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특히, 가(可)항력적 은혜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속이 인간의 신앙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부정한다.”
2. 개혁파 구원론의 독특성
1)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예정론에 기초한 구원론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고백하는 예정론적 구원론의 형식은 전 개혁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구원론은 초교파적인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신적 예정론은 빼고 단순히 인간의 회개와 신앙만 강조하는 인간중심적 구원론으로 기울어 졌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칭의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론 전체를 예정론 안에서 다루는 신조의 독특한 구원론 형식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초교파적인 복음주의나 알미니안주의 계통에서는 구원론을 ‘인간론’을 중심으로 다루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신론’을 중심으로 다룬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독자적 사역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이해할 때도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시는가가 강조점이다”라는 벌콥의 지적처럼 인간의 사역보다 하나님의 사역이 더욱 강조되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드러내려고 했다.
특히 구원론을 ‘신론 중심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인간론 중심적’으로 다루려는 알미니안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처럼 ‘기독론 중심적’이거나 신비주의처럼 ‘성령론 중심적’으로 다루는 방식들과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즉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인간론이나 기독론이나 성령론을 중심으로 구원론을 다루지 않고 구원론 전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에 기초한 신론 중심적 형식으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특징을 조석만 교수와 박형룡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이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평화의 의논(슥6:13), 즉 속죄계약이 선행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의 효과는 필연적으로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의하여 속죄의 대상(선택된 자)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 조성자로 높인다. 이 신학은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추적하여 돌아간다. 사람이 구원의 참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나가는 길에 유효적으로 실현하시는 선택의 영원한 작정에 의지한다. 영국 교회의 39개신조(17조), 돌트신조(1장6, 7조),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3장6절)가 모두 이 진리를 선언한다.
이처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구원론은 비록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원인과 근거를 제시할 때는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적 사역임을 강조했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풍성하신 지혜와 은혜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을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으로 이해했다. 이런 구원론의 독특성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 하시게 하셨다고 위는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는 또한 성령이 우리의 중생 이전이든 이후이든 간에 우리에게서 나오는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성화 시키시고 중생 시켰음을 고백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창조와 속죄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처럼 중생과 성화를 위해서도 그 어떤 영광이나 영예도 쾌히 포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선량한 생각을 한 가지도 못하며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의 과분한 은혜의 영광과 찬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적 사역과 또한 그분의 신적작정의 적용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개혁교회 신앙고백에서 드러나는 예정론적 구원론의 독특성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구원론을 따로 독립해서 다루지 않고 신론의 논리적 열매와 적용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 견인 등과 같은 구원의 모든 내용들은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나타난다. 즉 구원의 혜택은 오직 택자자들에게만 적용되고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론은 예정론과 분리해서 다룰 수 없고 반드시 예정론으로부터, 또는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 한다.
예정론이 구원의 서정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파의 중요한 구원론 이해이다. 이렇게 구원의 서정을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 중심적인 구원론이 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예정론적 구원론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은 10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이것이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0장에 ‘부르심’을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10장1절)라고 소개한다. 이 고백을 살펴보면 구원의 서정이 어디에 기초되어 있고 또한 무엇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위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신론에 기초해 있으며, 또한 구원의 서정이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부르심’에 대한 고백은 철저하게 3장의 ‘신적작정’에 기초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3장에서 신적작정을 고백하면서 그 작정 안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포함하여 고백했기 때문에 “부르심”은 바로 3장의 예정에 대한 논리적 열매로 소개한 것이다. 3장에서는 신적작정과 인간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3장3절),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3장5절).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철저하게 구원론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구조는 알미니안적 복음주의에서 소개되는 구원론 구조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들은 신론과 구원론을 분리해 놓았고, 그 결과 구원론에 이르러서는 “가항력적 은혜” “보편구원론”, “회개와 신앙 중심론”, “성화적 칭의론”, “신인협력적 구원”, “견인 불가능성” 등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구원론을 고백하게 될 때 구원론은 인간중심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며, 개혁신앙의 핵심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의 형태로 정립될 수 있다. 특히 3장 6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전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세부 내용들을 이 기초 위에서 장엄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지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미리 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 때를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이처럼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
위의 고백에서 우리가 놀랍게 발견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항목의 모든 내용들을 하나님께서 절대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선물로 주셨음을 강조하는 고백이다. 특히 인간의 책임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하는 성화와 견인까지도 모두 포함해서 다루는 것을 더 주의해 보아야 한다. 결국 구원의 모든 내용은 비록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강조하더라도 전체 구원의 토대는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등의 모든 내용이 이처럼 3장의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다. 구원의 서정의 각 항목들은 10장에서 다루고 있지만 그 기초와 근원은 이미 3장에서 모두 정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기초를 중심으로 해서 10장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론적 구원론 구조를 잘 이해해야만 구원론의 한 부분인 칭의론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예정론적 구원론의 구조적 특징은 ‘부르심’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각 항목들의 고백에서도 계속 살펴볼 수 있다. 즉 11장 ‘칭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라고 고백하였다. 칭의는 바로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강조하여 칭의의 기초를 앞서 소개한 10장의 예정론적 부르심에 두었다. 결국 본 신조는 칭의론도 예정론의 논리적 귀결이요 열매로 다루어 주었다.
다음으로 12장 ‘양자’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라고 고백하였다. 이 부분에서도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양자된다고 고백하므로 앞서 고백한 칭의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칭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양자에 대한 고백도 예정론적 ‘부르심’의 고백으로 돌아가고 있다.
13장 ‘성화’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성화는 인간이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과 결단을 바르게 강조해 주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의 근원적 힘과 기초는 인간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와 예정의 선물로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본 신조는 성화도 “부르심”의 논리적 귀결이며 예정론의 실천적 열매로 고백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4장 ‘신앙’에 대한 부분에서는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는 부르심을 넘어서 3장에서 고백한 “예정론”으로 더 돌아간다. 즉 “신앙”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고백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근원적 기초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들로 대상을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도 예정론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5장 ‘회개’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 …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라고 고백하므로 회개의 성격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총에서 오는 것으로 고백해 주고 있다. 16장 ‘선행’에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고백하므로 선행의 기초도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제시해 주었다.
17장 ‘견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도 역시 견인의 기초를 부르심에 기초해서 고백하여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본 고백에서는 견인에 대한 구원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세하게 드러내 주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 안에서 선택하신 것과 그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것과 또한 성령께서 그 구원을 효과적으로 성취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분리할 수 없는 위격적 사역의 특징을 고백하였다. 이런 형식 때문에 개혁교회는 구원론을 “성령론”으로 부르기도 한다.
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 부분에서도 “이 확신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즉 구원의 확신은 인간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기초해서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고백하였다.
이상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구원의 확신’까지 전 구원의 서정이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인간의 신앙적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구원론 전체의 구조와 토대는 인간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직 신적작정에서 출발하여 예정론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고백하는 구원론의 독특성인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의 서정
위 항목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았다면, 본 항목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대. 소요리문답에서 고백하고 있는 일반적인 독특성으로서 구원의 서정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순서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벌콥(Louis Berkhof)의 선을 따라서 “부르심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양자 → 성화 → 성도의 견인→ 영화” 등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으나, 본 신앙고백서에서는 “부르심(부르심, 중생 포함) → 칭의 → 양자 → 성화 → 신앙 → 회개 → 선행 → 견인 → 은혜와 구원의 확신” 등과 같은 순서로 고백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로 볼 수 없다. 즉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신조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신론을 기초로 하나님의 신적작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동일한 공통점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표현과 내용을 다루는 범위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 자체가 종교개혁 시대에서부터 정립되어 후대로 올수록 좀 더 세분화되고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에 부딪히면서 지금과 같은 논리적인 순서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초기에 소개된 구원의 서정과 후기에 좀 더 세밀하게 정립된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 신조는 후기 조직신학의 구조에 비해서 하나님의 주체적 구원사역이 좀 더 능동적으로 발휘되는 내용을 앞에 배치시키고 인간의 책임이 부여되는 부분을 뒤로 구분했다. 따라서 부르심, 칭의, 양자가 앞 부분으로 나오고 성화에서 확신부분까지가 뒤로 배치됐다. 이런 차이점은 당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를 일으켰던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에 대한 강한 저항적 성격도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도르트 총회 이후 계속적으로 인간중심적인 구원론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본 신조는 이 부분을 강력하게 배척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A. 핫지는 신조 작성 당시 영국의 배경에 대해서 “포악한 왕실파가 교회건설자들의 칼빈사상을 버리고 알미니우스 사상을 채용하므로써 충돌에 새 요소가 첨가되었다. 이 알미니우스 사상은 독단적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과 교회제도적이며 예전적인 종교의 열성자들 사이에서 항상 우세하였다”라고 지적한다.
구원론에 대한 이와 같은 특징은 후크마가 ‘중생’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종교개혁 시대와 17세기의 신학자들이 소개하는 중생의 범위가 오늘날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넓고 좁은 형태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소개해 주는 부분에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박형룡 목사는 이와 같은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사들의 다양 의미’, ‘영적 행위들의 대조적 구별’, ‘다양 동작의 선후 순서’ 등을 잘 고려해야만 한다고 지적해 주기도 한다.
이런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본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부르심’ 안에 ‘부르심’과 ‘중생’이 함께 포함되어 소개되어지고 있고, 또한 ‘신앙’과 ‘회개’가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중생 뒤에 소개되지 않고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조직신학에서 ‘회개’ → ‘신앙’으로 소개되는 것이 여기서는 ‘신앙’ → ‘회개’ 순서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는 ‘선행’이란 부분이 따로 설정되어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조직신학에서 ‘성화’에 대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 있는 부분인데, 신조에서는 따로 이 부분을 구분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성화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 주었으며 성도의 삶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좀 더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한 17세기 목회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은 ‘은혜와 구원의 확신’라는 부분이 ‘견인’ 뒤에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것은 ‘견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본 신조에서는 견인교리가 가지고 있는 풍성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을 따로 구분해 주고 있다. 즉 앞 부분인 견인은 예정론의 논리적 귀결로서 부르심이나 칭의가 상실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으며, 뒷 부분인 확신에서는 인간의 신앙적 책임을 더 강조해 주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의 서정은 부르심에서 견인으로 이어지는 전체 내용을 따로 분리해서 다루지 않고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다루어가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 본 신조가 구성한 형식은 더욱 놀랍다. 즉 예정론에 기초한 부르심은 이어지는 모든 구원의 내용들의 기초로 다루었으며, 또한 이어지는 각 과정은 다음과정의 논리적 결과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견인은 이런 논리적 구조의 최종확증으로서 예정과 연결된다. 즉 견인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예정의 논리적 결과인 것이다.
이런 예정론적 구원론 구조를 통해서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간 자신을 모든 구원의 주체로 삼고 싶어 하는 인본주의적 구원론을 막고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을 지켜 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구원론 논쟁과 관련해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칭의론과 성화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칭의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다루는 ‘칭의’는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와 예정론적 구조에 기초한 고백이다. 즉 본 신조는 칭의를 인간의 실질적 변화에 기초하여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과 죄책을 사면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주와 절대주권자로서의 법정적 선언으로 구별하였다. 특히 칭의에 대한 고백도 앞서 소개되었던 ‘부르심’에 대한 고백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이 칭의를 이루시는 주체로 소개한다. 그리고 전체 고백도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칭의를 다루고 있다. 이런 구조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11장1절).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순종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이같이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빚을 완전하게 갚아 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만족을 드렸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 그들 대신으로 그의 순종과 만족이 받아들여졌으며, …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11장3절).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11장4절).
우선 3절에서 칭의 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만족을 드렸다. …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세 전 속죄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라는 고백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의 사역들이 분리할 수 없이 동등하게 칭의 사역과 어떻게 연결되어져 있는지를 드러내 주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칭의 사역을 위해서 작정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칭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성령께서는 칭의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으로 고백하였다.
다음으로 칭의의 사역이 신적작정을 기초로 해서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고 있는 구조를 언급해 볼 수 있다. 위의 고백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신적작정과 선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주체적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칭의의 사역은 구원의 서정에서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소개된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칭의는 부르심뿐만 아니라 다른 항목들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안에서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원의 은사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11장2절).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의 죄들을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그들은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전락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성적인 진노를 살 수 있게 되며, 그들이 자신들을 낮추어,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들이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 전에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게 된다(11장5절).
위의 고백을 보면 칭의와 믿음이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와 믿음과 회개가 서로 깊은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칭의의 기초에 의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구원의 서정 각 단계들이 서로 단독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고백되는 구원의 서정의 또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구조는 구원의 서정이 인간중심적으로 이해되어지지 않도록 하며 오직 하나님 중심적으로 그 내용들을 고백하고자 한 당시의 노력들이다.
칭의 부분에서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면은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오류를 함께 소개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즉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에 가장 심각한 도전은 알미니주의적인 인간중심적 칭의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적인 칭의관은 도르트 신조에서 배격되었던 알미니안적 구원론과 동일한 성격이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미니안적인 구원론을 배격했다.
이 칭의(稱義)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1절).
또한 이 모든 것이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값없이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3절).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선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의 칭의관이 배격되고 있다. 즉 로마 가톨릭은 새로운 의를 인간에게 주입하여 성화를 통해 의를 발전해 가는 의화교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먼저 비판해 주었다. 다음으로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알미니안주의적인 신인협력적 칭의관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본 신조는 믿음이 칭의의 수단이며 도구라는 사실은 분명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믿음 자체를 칭의의 원인이나 기초로 주장하는 알미니안적 입장은 비판했다.
이 표현은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는 칭의관이 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으로 칭의관을 거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믿음 행위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 또한 신비적인 종교현상을 통해서 자신 안에 무슨 변화나 경험을 인식하므로 칭의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 고백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도 잘못된 칭의관을 분별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근래에 전통적 칭의관을 비판하는 새관점 학파의 “선교적 칭의”나 김세윤 박사의 “관계적 칭의”나 김영한 박사의 “중도적 통합적 칭의론” 등은 바로 위에서 지적한 알미니안적 칭의론의 변형들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이 3 주장들은 칭의론에 대해서 “관계적”, “윤리적”, “성화적”, “연속적”, “보상적”, “칭의 상실 가능적”, “인간 성화적 노력 협력적”, “인간의 능동적 참여” 등의 표현을 제시하면 “성화적 칭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전통적 칭의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법정적”, “단회적”, “선언적”, “확정적”, “절대 은혜적”,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 “인간은 수동적”, “그리스도의 은혜 전가” 등과 같은 표현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들이다.
특히 김영한 박사는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라는 제목을 통해서 ‘크리스천투데이’에 3번에 걸쳐서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과 전통적 칭의론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는 죄인의 칭의와 죄의 칭의를 구분하여 칭의의 법정적 단회적 확정적 성격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종말론적으로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전통적 칭의론의 예정론적 성격과 성화를 구별하여 다루는 방식을 강하게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필자는 정통개혁교회의 신학자로서 "새 관점 학파"가 제기하는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에 함축된 동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 우리 신자들은 칭의의 일회적으로 주어짐의 성격과 종말론적 완성 속에서, 오늘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부르심에 매 순간 응답하여야 한다. 그리고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으로, '안일한 예정 신앙'과 '성화 없는 칭의 신앙'에서 깨어나 선한 누룩이 되고 각종 세속주의 풍조, 동성애, 성매매 자유화, 급진적 이슬람이 밀려오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영한 박사는 법정적 칭의를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칭의가 종말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나 법정적 칭의는 예정론과 견인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본 신조 11장 5절에서 “그들은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타락할 수는 없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칭의 상실 가능성을 주장하면 그 자체가 법정적 칭의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이런 주장들은 전통적 칭의론을 일부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칭의론의 핵심적인 원리나 주체를 인간편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인간중심적 칭의론들이다.
오히려 성경적인 바른 칭의관은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라는 고백처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이루어 주신 속죄의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돌려(전가) 주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그 은혜를 우리게 전가 시켜주시는 하나님 중심적인 칭의관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선물로 칭의가 주어지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라는 고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칭의가 단순히 신약에서만 제시되는 내용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동일한 성격으로 제시되는 부분이다. 본 신조는 6절에서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와 모든 면에서 똑같았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세대주의적인 극단적 종말론주의자들의 칭의관을 비판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관련해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많은 오류가 발생되고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구약은 행위로 구원받고,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세대주의 방식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도 오는 것이지만 역시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온다. 이와 같은 식으로 성경의 통일성을 깨뜨리면 전체 성경의 구조가 무너지게 되고 결국 신론중심적인 칭의관 자체도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고백에서는 철저하게 신구약의 칭의관이 신론중심적인 칭의관으로 동일한 성격임을 명백하게 정립해 주었다.
이런 구조는 이미 앞서서 소개하고 있는 7장 ‘언약’과 8장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에 기초하고 있는 고백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7장에서는 신적작정에 의해서 주어진 은혜언약의 본질이 구약과 신약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원의 은혜임을 고백해 주었다. 또한 8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비록 신약에 오셔서 구원의 실제적인 내용을 성취하셨지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도 구원의 주체로 존재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 구원의 사역 내용은 비록 신약에서 성취되었어도 구약의 모든 택한 백성들에게도 역시 그 효력과 은혜가 성취되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므로 신구약의 구원적 성질의 통일성을 확립해 주었다.
그러므로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7장6절).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사역의 공덕과 효능과 혜택은 창세로부터 모든 세대에 살던 택함 받은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받아 누려 왔다(8장6절).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칭의론 고백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부분들을 정리하여 주었다. 즉 칭의론 고백에서는 펠라기우스주의, 반펠라기우스, 로마 가톨릭, 알미니우스주의, 세대주의적 종말론주의 등이 배격되었고, 특히 성화나 신앙, 회개, 견인과 연결시키지 않는 분리적인 형태의 칭의론도 배격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성화론
성화와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은 성화의 주체에 대한 부분이다. 많은 초교파적 복음주의자들은 성화는 인간이 실제적인 참여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주체가 되는 것으로, 또는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서 이루어 가는 ‘신인협력설’ 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에서는 철저하게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한다. 비록 인간이 성화의 대상으로 실제적인 참여자이고 실행자일지라도 그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성화의 사역을 이루시는 분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런 하나님 주권적인 ‘성화’의 의미가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즉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앞서 소개했던 구원의 서정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성화는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역시 성화의 사역을 앞으로 거슬러서 예정론적 ‘부르심’에 기초하여 고백하고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성화’를 ‘칭의’에서부터 설명하므로 ‘신인협력설’ 쪽으로 기울어진 것에 비해서, 본 신조는 이들과의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칭의’보다는 ‘부르심’에 기초해서 설명하였다. 즉 ‘부르심’에서 기초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이 ‘성화’를 다룸으로 성화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여 ‘성화’는 예정론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화’의 주체이시며, 또한 각 위격의 사역이 ‘성화’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자세히 고백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대요리문답),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신의 사역으로 고백된다.
또한 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서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라고 고백하므로 모든 성화의 과정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주어지는 실제적인 도우심과 힘이 없이는 인간의 공로와 의지와 노력으로는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통해서 이루시는 ‘성화’는 인간의 공로에 이루어지거나 ‘신인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성화’ 부분에서도 아주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화’ 부분에서 인간의 공로와 노력과 상급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화’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며, 또한 은총의 선물인 부분을 약화시키려고 하지만 본 신앙고백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은총의 선물로서 ‘성화’에 대한 고백은 3절에서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라고 고백하며, 대요리문답에서는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끓어오르고 증가되며 강력해져서(75)”라고 고백하며, 소요리문답에서는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이신 데(35)”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런 정신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성화의 수단’에 대한 부분이다. 본 고백에서는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화의 수단이 “말씀과 성령”으로 고백된다.
말씀이 성화의 외적수단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다. 즉 인간의 판단이나 결정, 좋은 의도나 공로가 성화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성화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16장에서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들만을 가리킨다’(1절)라는 고백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 설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 부분은 칼빈주의에서 율법의 제3용법을 강조하여 성화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루터파와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삶의 규범이 되는 원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기초해서 고백해 주고 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특히 이와 같은 성화의 수단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 하는 것으로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라는 말씀을 통해 성화의 수단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이해인 것이다.
또한 본 고백에서는 성화의 ‘범위’와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먼저 성화의 범위는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3절)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의 전 인격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의 자라남이 종교적인 모습에서만 열정적이고 그의 삶에서는 전혀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이원론적인 신앙을 비판 할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이다.
성화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의 전 인격에서 세워져 감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으로는 두 가지를 소개한다.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라는 고백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죄에 대해서 슬퍼하며, 의로운 삶을 향해 가는 것으로 증거한다.
이것은 소요리문답에서 좀 더 명확하게 요약되어 “거룩하게 하신 것은 … 점점 죄에 대하여서는 능히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능히 살게 되는 것이다(35)”라는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성화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성화는 단지 외부적으로 나오는 몇몇의 구별된 행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반응과 그리고 의로운 삶에 대한 태도를 총체적으로 해서 평가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 삼고, 그 말씀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슬퍼하며, 또한 그 말씀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는 성화의 내용은 칼빈주의 삶의 독특성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성화의 ‘상태’에 대한 고백이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완전성화’를 고백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고백된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로 인하여 계속적이고 화해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2절).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 전쟁에서, 그 남아 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롬7:23)(3절)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이 땅에서 순간적으로 완전히 성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죄 때문에 여전히 부패의 내용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성화라는 것은 일평생 동안 끊임없이 전인격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성격이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이 생에서 아무도 완전한 성화에 달할 수는 없고 다만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갈 뿐이다(77)”, “신자들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숨어 있는 죄의 잔재 때문에, 그리고 영을 끊임없이 거스리는 육의 정욕 때문에 성화를 완전히 달성할 수 없다(78)”라는 표현으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이런 성화의 성격 때문에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싸워가며, 또한 의로움 향해 항상 전진해 가야 하는 삶의 과정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성도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본 고백에서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라는 표현으로 제시되었다.
결국 성화에서 거룩한 삶이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부정’의 삶이다. 성화에 대한 이런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우리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는 말씀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구원이 우리의 노력과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이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해 주었다. 하지만 비록 성화에서 인간의 노력이 중요한 위치에 있다할지라도 본 신조는 결코 성화의 주체로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 신조는 인간의 선행과 노력은 구원의 대상자로서의 책임과 의무임을 강조해 주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보존 및 확립되는 거룩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다.
성화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성격과 인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조화를 윌리암슨( G. I. Williamson)은 다음과 같이 구별해 주었다. “성화는 사람과 하나님이 활동하셔서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가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화에 대한 공로를 다 취하시는 그러한 것이며 반면에 사람의 역사는 자기가 ‘무익한 종’이라는 것 외에 결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또한 빈센트(T. Vincent)도 “우리가 성화의 주체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성화의 주관자나 그것을 유효케하는 원인 될 수 없다”라고 구분해 주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성화론은 칭의의 원인이 아니라 열매이며 증거로서의 역할을 잘 드러내 주었다. 대요리문답에서는 신조의 칭의론을 더 보충하여 칭의와 성화의 중요한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소개하였다.
77.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성화되는 것은 어떤 점이 다른가? 답: 성화는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그 둘이 같지가 않다. 하나님께서는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 주시며,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은총을 부어 주신다. 또한 칭의로는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화로는 죄를 이기게 하신다. 그리고 칭의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벌하시는 진노로부터 면제를 받게 되며, 칭의는 이 생에서도 완전하여 신자들이 다시금 정죄되는 일이 없게 한다. 그러나 성화의 경우는 사람에 따라 같지가 않다. 그 뿐 아니라 이 생에서 아무도 완전한 성화에 달할 수는 없고 다만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갈 뿐이다.
따라서 본 신조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여 말하면서도 둘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특히 칭의를 성화의 원인이며 근거로 설명하였고, 성화는 칭의 열매요 증거로 다루었다. 또한 칭의와 성화 모두 신적작정과 예정론에 기초하여 구원의 논리적 열매로써 고백해 주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결코 성화가 칭의의 원인이나 근거로 말해서는 안되며, 그리고 성화의 열매를 가져오지 않는 형태로 칭의를 분리해서 말해도 안되며, 더 나아가 칭의와 성화를 예정론과 나눠서 다루어도 안된다.
결 론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개혁파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론은 구원의 서정 전체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해서 예정론 안에서 이해되고 고백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구원의 서정은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원인’이나 ‘조건’이 아니라 바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 ‘열매’로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주체에 있어서도 역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신론 중심적으로 구원론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파 구원론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와 같은 구원론의 이해가 있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고백될 수 있다. 비록 구원의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론에서는 당연히 인간이 많이 소개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본 신조는 구원론의 완성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이르어야 한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즉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소요리문답의 고백처럼 구원론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자리까지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구원론의 구조를 기초로 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전체 구원의 서정들을 다루어 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즉 ‘부르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이 기초 위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런 특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기 위해서 각 구원의 서정들의 근거를 ‘부르심’으로 소급해서 고백해 주고 있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특징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칭의론이 논의될 때만이 칭의의 법정적, 단회적, 완성적, 은혜적, 선언적, 전가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영적분별력 /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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