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연합 / 리챠드 개핀

 

바울신학의 중심에 우리의 요약을 통하여,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과 4절에서는 그 연합이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문제는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문제로 꼽힐 수 있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다.

 

간략한 윤곽을 제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한 바울의 이해는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며, 무엇보다 더 바울이 언약신학자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하나님 자신을 자기 백성의 "분깃"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가장 명쾌한 신학이다.(시73:26; 119:57; 렘10:16). 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분깃"이라는 언급도 나타난다(신32:9).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사야 53장 12절에 나타나 있는 주의 기름부음 받은 종에 대한 것이다.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5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가 "우리의 불법을 대신하여 상함을 입으셨고, 우리의 불의를 대신하여 부서지신"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님께서 "내가 그에게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분깃을 할당할 것이라"고 언급하신다.

 

이 언약적인 연합과 유사한 실현, 즉 삼위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서 교회 사이의 순환적인 소유가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심에로 귀착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만, 바울에게서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핵심으로서 구원론적인 현실, 즉 구원의 중심적인 진리를 형성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표현은 바울이나, 혹은 신약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반면에, 여러 곳에서 표현된 것을 미루어 볼 때, 그 실재는 "함께"라는 전치사를 포함하여, 약간 다른 변화와 함께 "주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치사구의 용례에서 두드러진다. 그 의미에 대한 학문적인 토론은 "안에"라는 전치사구의 힘에 집중되었으며, 장소나 혹은 분위기를 전달하는 순전히 도구적인 이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심지어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라는 생각까지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실상, 바울의 용례는 다양하고, 이 표현의 전반적인 의미의 폭은 아담과 둘째 혹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를 통하여 형성된다(롬5:12-19; 고전15:21-22, 45, 47). 각자가 행한 것은 결정적인 것이어서, 사실상 그들의 대표로서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나, 그리고 그들의 죄가 마땅히 초래하는 정당한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로서 그들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각각 죽음과 삶의 결정을 가져오는 것이다(롬3:25-26). 이와 관련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그와 함께"와 같은 표현은 상호 연관된 것이며,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된 것이다. 전자는 단지 후자가 언급하는 연합 안에서만 기능한다. 동시에 "우리를 대신하여"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이 연합 안에는 되돌릴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사실은 고린도전서 1장 13절의 "바울이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라는 수사적인 질문을 통하여 두드러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 연합 혹은 연대성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며, 사실상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를 확장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미래의 영광에 걸쳐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연합의 의미를 토론할 때, 이것은 본문의 낯선 것을 억지로 끼어 넣는 것이거나, 혹은 불필요한 조직화의 산물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삼중의 범주적인 구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① 예정(엡1:4)과도 관계되며, ②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단번에 성취된 구속사적인 사건으로서 과거적인 연합과도 관계되고, 혹은 ③ 현재적인 일로서 구원의 현재적인 소유 내지는 적용과 연관된 연합으로서 실존적인 차원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이러한 구별들은 서로 다른 연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일한 연합의 서로 다른 측면과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차원들 각각을 인식하되 그들 중의 하나를 거절하거나, 혹은 그들 사이의 구별을 거절함으로써 그것들을 무차별적으로 동의어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와 같은 구별을 위한 필요는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인 현실적인 연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교훈적인 예들로 인하여 잘 묘사될 수 있다.

 

로마서 16장 7절에서 바울은 "나에 앞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혹은 "내가 있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자서전적으로,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있는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후를 예리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교훈의 전반적인 구조 안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로 알고 있으며(엡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때에 "그분과 함께" 있었던 자로서 자신을 묵상하고 있다(갈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기간 동안 그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가 있었고, 따라서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복수형으로 인격화되고 있는 "다른 이들처럼 진노의 자녀"였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질문, 곧 구원의 서정과 관련한 질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진노에서부터 은혜에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진노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로 넘어서는 이 전이(轉移)는 무엇이 일으키는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질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물음으로서, 그 답변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사로잡을 것이다.

 

이제 특히 현재적 연합, 구원의 현실적인 적용 혹은 적용 안에서의 연합, 그리고 그 연합의 구원 서정적인 측면에 집중하게 될 때, 여러 가지 국면이 지적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예정과 관련한, 구속사적인 연합과 관련한, 그리고 대표적이며 법률적인 연합과 관련한 것만큼 이것은 또한 신비적인 연합인 것이다. 바울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유비를 사용하여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처럼, 이것은 "큰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엡5:32). 이 유비는 확실히 깊고 친밀한 연합을 지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한 생각을 분명하게 견지한다. 그런 친밀함이 공상한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인격적인 구별을 제거하거나, 혹은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인격적인 정체성은 유지된다. "신비적"인 연합은 인격적인 본래모습(integrity)을 지워버리거나 혹은 경감시키지 않는다. 현재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대표자로서 그리고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유지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가장 괄목할 만한 증거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롬8:34)의 현재적 중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속의 적용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연합, 즉 칭의와 성화 사이의 차이가 애매하게 적당히 처리되어서는 안 되고, 혹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사실상 타협되고 만다는 이해할 만하고 또한 적절한 그런 관점은 바울의 윤곽이 보여주는 통합적인 연합을 상실하고 있다. 구별할 수 있지만 그러나 분리할 수는 없는 따라서 법적이고 갱신적인 측면이 공존하는 단지 하나의 연합만이 있다.

 

현재적 연합은 또한 영적이다. 이것이 비물질적이며 관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내주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연합과 관련한 독특성이다. 이것이 이 연합과 관련한 신비적인 면을 가능하게 하며, 이 연합을 다른 종류의 연합과 혼동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즉 성령께서 일으키신 영적인 현실로서 이 연합은 삼위일체의 연합과 같은 존재론적인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인양성과 같은 위격적인 연합도 아니며, 인간의 인격 내의 육체와 영혼의 상관적 관계를 상정하는 심인적인 연합도 아니며, 남편과 아내 사이의 육체적인 연합도 아니며, 열정과 목적 및 이해와 관련된 지적이고 도덕적인 연합도 아닌 것이다.

 

영적인 연합은 "그리스도"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셔서 이 연합의 배후에 계신 "성령" 사이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이 바울의 근본적인 생각이며, 이것이 무엇을 함의하는 것인지는 나중에 또 생각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의 사실만을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형되었으며, 현재 성령을 완전하게 소유하심으로써 "생명-주시는 성령이 되셨고", 그 결과로서 현재 "주 곧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고전15:45; 고후3:17). 위격적인 구별을 지워버리지 않는 기능적인 동일시로서 부활의 생명을 주는 행동에 있어서(고전15) 그리고 종말론적인 자유를 주는 행동에 있어서(고후3) 성령과 그리스도가 하나임을 보여주며, 그 결과로서 교회의 삶과 신자들의 내면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사실상 분리 불가한 하나인 것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9절과 10절에서 "여러분들이 성령 안에", "성령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여러분 혹은 "그리스도의 소유된" 여러분,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은 모두 하나의 연합을 묘사하는 분리할 수 없는 국면인 것이다. 비슷하게, 에베소서 3장 16절과 17절에도 "여러분의 속사람에 그의 영을 가진" 자는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자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영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성령의 행동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며, 비성경적인 관념론이나 비물질적인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영적인 연합으로서 이 현재적인 연합은 순환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환언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며, 또한 교회를 위한 "영광의 소망"이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골1:27). 그러므로 그런 연합은 본질상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생명 그 자체이다.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여러분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었습니다"(골3:4).

 

마지막으로 현재적인 연합은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신자들을 위하여 영원히 의도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서 도달하게 될 종말론적인 완성에서 반드시 성취된다(롬8:17; 고전15:20, 23).

 

요컨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과 현재 그의 죽으심과 부활 덕택에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연합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바울의 구원론의 중심을 차지한다.

 

 

리챠드 개핀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에서, 69-7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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