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 / 존 머레이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오는 죄와의 확정적인 단절과 성령 안에서의 새 생명에 대한 강조는 죄가 점점 더 멸해지고 거룩함에의 일치가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금욕과 성화 과정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서 6장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죄의 권능과 더러움으로부터의 결정적인 옮김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같은 서신에서 바울은 내주하는 로 인해 계속 갈등을 묘사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라고 스스로를 고발해야 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7:23, 24), "내 자신이.....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로마서 6장에서도 우리는 죄의 잠식(蠶食)에 끊임없이 깨어 있을 필요를 함축하는 권면들을 거듭 듣는다.

 

신약 성경 기자 가운데서 사도 요한보다 더 신자의 성화의 확정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람은 없다. 요한의 용어들은 너무 강렬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 또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명백한 사실들과 조화시키기에 아주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그런데 이와는 달리 요한은 같은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그는 신자가 죄 없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신자가 범죄할 때 신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고 요한은 신자의 삶에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측면이 있음을 말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status quo) 유지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진보의 상태 즉 성격상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진보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금욕성화 양자를 포괄한다. 

 

금욕과 관련해서 신약 성경에 그 구절들이 등장하는 문맥으로 인해 특히 두드러지는 두 개의 구절이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 두 구절들은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과 그로 인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영역으로서의 이전이 강조되고 있는 문맥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도움이 된다. 로마서 6장은 이 확정적 성화를 강조하는데,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말이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8:13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향해 말하면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데 신자들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이것은 그가 이미 죄의 몸이 멸하여졌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주목되는 것이다(롬 6:6). 이 활동은 성령의 힘과 은혜 안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영으로써'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들이 참여해야 하는 활동이며,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격렬한 활동이다. 골로새서 3:5의 문맥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한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이라는 같은 사고를 포함하고 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권면은 선행하는 범주적 명제들로부터 나온 권면이다. 로마서 8:13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서 신자의 활동이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골로새서 2:20; 3:3에 언급된 죄에 대한 확정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사욕과 더러움으로부터 신자가 해방되지 않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죄들을 죽이는 도살장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확정적인 죽음을 말할 때 쓰였던 어법이 수동의 어법인 것같이-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너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롬 6:2; 골 2:20; 롬 7:4)-이제 그 용어들은 신자 자신 편에서의 활동의 용어이다. 고린도후서 7:1의 권면도 같은 취지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여기의 주장은 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과 영의 더러움이 있으므로 우리 자신을 그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욕과 정화(淨化)의 과정은 신자에게 여전히 붙어 있는 죄 및 더러움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표는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의 제거다. 이러한 죄 됨의 완전한 근절(根絶)은 신자의 목적 즉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의 일치와 양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하고 흠 없고 점 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었는데, 그들은 그를 닮아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형상과도 일치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리고 요한도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우리는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요한이 이 소망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가 곧장 우리의 죄 됨과 관계가 있는 이 소망의 의미의 주의를 집중시켜야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곧장 덧붙인다. "주(아버지)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근절과 이것에 기여하는 금욕의 요구는 구원을 누리는 것과 그 구원이 향해 있는 목표의 성격에 내재해 있다.

 

성화의 과정은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것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근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7:1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는 말을 덧붙여야 했던 것은 뭔가 더 적극적인 측면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완전의 총합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완전의 농축으로서의 거룩함에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점진적인 변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용어는 다음 두 경우에서 바울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예수님의 변형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도 바로 이 용어다(마 17:2; 막 9:3).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전 구속 과정의 목표는 형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난 그리스도의 형상에의 일치이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3:18보다 점진적 성화의 방법을 더 정확히 규정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든, 두 가지 모두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요한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영광을 보기 때문이요, 보면서 점점 더 변화되어 그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에(참고. 히 1:3), 비길 데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고정되어, 우리는 점점 더 한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의 특성들을 띠게 되고, 마침내는 온전히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과 의욕을 갖고 몰두하는 것을 닮는 것은 심리학의 법칙이고, 이 경우에도 그 법칙은 적용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자연적 요소들은 이 변화의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이 표현을 '영이신 주로 말미암음이니라'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성령에 대한 암시가 배제되지 않으며, 성령의 깨우는 권능과 효과적 사역을 새 언약의 탁월성을 특징 짓는 일례로 늘고 있는 6절과 8절로 거슬러 올라 간다. 여기서 바울이 '영이신 주'를 말하고 있다면, 그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구속 과정의 목표를 완성하려는 목적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 자신의 말씀을 상기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 14).

 

적극적 측면에서의 점진성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한다(빌 1:9).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 말미암아 구원 즉 종말에 완성되고 계시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가라고 말한다(벧전 2:2; 참고. 1:5). 그는 또한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 주 곧 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에베소서 4:12-16은 특히 에베소서 전체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고찰할 때 이 점에서 가장 도움이 된다. 여기서는 성장 즉 지식과 사랑으로 구체화된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1절에 규정된 직분들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향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13, 14절). 신자들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절)는 것도 동일한 권면이다.

 

그러므로 성장의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과정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에 이 원칙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쓸모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기괴한 일일 것이다. 어른이 어린 아이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서 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행위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는 어린 아이가 있으며, 청년도 있고, 노인도 있다. 그런데 성장의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기괴하고 비극적인 일들이 교회의 증거를 얼마나 손상시켜 왔던가!

 

이 과정은 특히 지식사랑으로 구현된다.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로서의 지식과 이해력의 개화(참고, 엡 1:17, 18; 4:13-15; 벧후 3:18)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것들이 증진됨에 따라 사랑, 희락, 화평 등 성령의 열매가 증진될 수 있다는 교훈을 강화시켜 준다. 이 둘의 상보성(相補性)은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분변함 속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빌립보 신자들을 위한 바울의 권고에 예시되어 있다. 요한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러나 사랑은 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증진되고 풍성해져야 한다(참고. 빌 1:9; 살전 3:12; 4:10).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분, 사랑 자체이신 분의 영광을 점점 더 알게 됨으로써 자라간다.

 

이러한 진보는 개인뿐만 아니라 통일성과 연대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도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개인의 성장은 성령과의 교제와 마찬가지로 교회와의 교제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신자들은 결코 독립된 단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았다(엡 1:4). 그들의 구속이 성취되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후 5:14, 15; 엡1:7). 구속의 적용에서 그들은 그리소도와의 교제로 인도된다(고전 1:9). 그리고 성화 자체도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온전하고 전적으로 흠 없고 점 없이 나타날 때에야 비로서 개인에게 실현되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온 몸의 성화를 계발하고 진전시킬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책임, 특권, 호기(好期)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들이 명백해진다.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무관심하고 은혜, 사랑, 믿음, 지식, 순종, 거룩함 안에서의 그들의 성장을 촉진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 자신의 성화를 방해한다. (1)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부족 자체가 영적 성장의 밑동을 갉아먹는 악덕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안에서의 성령의 열매에 관해서 갖지 않거나 깨어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데 거룩한 열심으로 불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모든 단점과 죄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사람들의 결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식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그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가 하지 않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메마르게 하며, 이러한 메마름은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지지, 격려, 가르침, 교화, 권면을 충분하게 그에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의 상호 작용과 상호 소통이 하나님의 백성의 점진적 성화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측면들을 보게 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그리스도의 몸의 연대성 안에서의 우리의 상호 의존의 진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성화에만 몰두하는 것의 위험성과 모순됨을 밝혀 준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은 독립성과 초연성의 반대되는 덕목을 얼마나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참고. 롬 12:4 이하; 고전 12:12 이하; 골 2:19). 

 

성장에 있어서의 이러한 교제는 방금 인용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라는 표현에 유의할 것을 요구한다. 이 표현은 성화 과정의 목표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 자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의 나눠 줌과 받음보다 이 과정의 특징을 더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1:19부터 살펴보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이 본문은 존재론적으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모든 충만'은 영원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충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을 논박하고, 경륜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이고 중보적인 정체성 안에 있는 충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8절이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면서 특히 메시야로서의 경륜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명칭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 명칭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영원한 성자의 신분과 신성에 고유한 탁월성이 아니라 이 역사적 사건에 의해 그에게 발생한 탁월성이며, 나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는 계획된 결과라고 분명히 진술된 탁월성이다.

(3) 19절은 탁월성의 획득의 인과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탁월성이 그에게 속하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본질적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행사할 만한 자격이 없었다면, 즉 신성의 충만이 본질적으로 그의 것이지 않았다면, 그러한 탁월성은 그에게 부과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진정 사실이다. 그러나 19절이 그 탁월성을 만들어 내는 수여(授與)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은 경륜에 대한 문맥에 있어서의 강조와 더욱 부합한다.

(4) 만약 19절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전혀 만들 필요가 없는 중대한 신학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성자 안에 거하는 것은 성부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성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그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골로새서 1:19이 말하는 충만은 구원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에 부여된 충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골로새서 2:9은 이러한 결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2:9은 영원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신성의 충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의 주된 의도는 이 충만이 그의 성육신된 상태 안에 거하며, 육신이 말씀으로서의 그의 육체적 정체성으로 인해 삭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신성의 충만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그가 메시야 직분의 수행으로 인해 얻게 될 충만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충만은 생명, 은혜, 진리, 지혜, 지식, 선함, 자비, 의, 권능의 충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논란이 있어 왔던 바울의 본문을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성화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설명이다.

이제 에베소서 1:23로 돌아가 보자.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첫번째 문제는 여기서 '충만케 하다'로 번역된 용어의 의미다. 그것은 능동태 또는 수동태 중 어느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수동태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가 충만케 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은 충만케 된다는 개념을 강조할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그가 온전히 충만케 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렇다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그에게 적용된 충만이 가리키는 것으로 계속 충만케 된다는 것이 된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는 것이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충만은 그리스도 안에 영속적으로 거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엡 4:10). 이것은 최소한 나눠 주심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능동적인 의미를 택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물 안에서 만물'은 우주적 관련성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이다(엡 1:22). 그리고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엡 4:10). 그러나 '만물 안에서 만물'은 단지 교회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는 교회를 온전히 충만케 하신다. 문제가 되고 있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하기란 어려운 것 같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충만'의 선행사는 무엇인가? 22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교회인가?

그리스도가 선행사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거의 유지될 수 없는 견해다.

(1) 구문론적으로, '충만'의 선행사를 22절로 소급해 찾는 것은 조악하다. 그러므로 다른 견해들이 극복되지 않는 난점을 갖기 전에는 이러한 구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2) 그리스도 자신이 '충만'이라면, 이어지는 문맥을 보아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또 다른 위격의 충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셔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경의 관념, 특히 바울의 관념에 이질적인 개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성부의 충만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충만이 거한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또 다른 위격의 충만으로 얘기되지는 않는다.

(3) 이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그 위격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바울에 따르면, '만물 안에서 만물'이 우주를 가리키든지 교회를 가리키든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같은 서신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엡 4:10). 그러므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방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특히 두번째와 세번째의 이유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는 해석은 기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대안은 교회를 '충만'의 선행사로 보는 것이다. '그의 몸 된 교회'가 밀접하게 선행한다는 사실은 이것을 자연스러운 구성이 되게 한다. 그리고 강력한 증거가 다른 해석을 요구할 때까지는 이것을 논쟁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충만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어떻게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교회가 그리스도를 충만케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 특히 바울의 가르침에 반한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받는다(요 1:16).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골 1:19; 2:9). 그리고 교회는 때를 따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엡 4:13). 하지만 충만은 온전케 하는 것 즉 보충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참고. 마 9:16; 막 2:21). 경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자격과 직분은 결코 그와 연합된 자들과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다. 몸과 분리된 머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항상 서로에 대해 보완적이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은 이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충만'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통해 보충 관념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

 

'충만'은 또한 어떤 것을 저장해 두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서신에서 이 의미는 두 번 나타난다(3:19; 4:13). 그리고 이 두 경우에 유일하게 적절한 의미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라는 요한복음 1:16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4:13) 된다고 인식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이 그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를 때, 이 상태는 그리스도가 구현한 은혜, 덕목, 진리, 지혜, 의로움,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다. 이러한 전달은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신 자의 형상을 닮아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1:23의 바울의 가르침의 유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분여(分與)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회는, 영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이 동일한 전달의 목적과 실현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경륜에 의해서 그 안에 거하는 의로움, 지혜, 지식, 권능, 은혜, 선함, 인내, 사랑, 진리, 자비의 충만의 수혜자다. 이 충만을 신자들은 분리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통일성과 교제 안에서 받는다.

 

그러므로 점진적 성화가 수반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외적으로 모방하는 동화(同化)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충만의 분여, 우리가 지상의 삶 속에서 익숙해 있는 유기체나 생물보다 무한히 높은 차원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하여 흘러 나오는 분여에 의해서 획득된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과 특권에 적용될 때, 그것은 점진적 성화에서 기본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연합과 교제 또 그로부터의 전달의 의미들을 점점 더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의 필요, 그리스도 예수 안의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에서 연유하는 절박한 요구, 그의 몸의 지체가 됨으로써 생기는 요구,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는 데서 행해야 할 직분 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부터 제공된다. 성화의 목표가 수반하는 모든 요구의 실행에 있어서 그의 은혜의 총족성을 의심하는 것은 모든 충만이 거하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맏아들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즉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궁극적인 성취의 소망과 자신감을 생기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충만뿐이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에서 발췌(307-318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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