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선 자리는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8. 5. 29. 02:02

 



주인님의 사랑받는 아들 이삭을 위해, 가나안 땅에서, 주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가야만 하는 그 광야 길은 멀고도 험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메마른 광야, 불 붙듯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사막의 햇볕은 모래를 핥으며 그 열기를 더해 마치 찜통처럼 후끈거린다.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가려 줄 것 하나 없는데, 낙타 등에 뎅그러니 올라앉은 늙은 종의 얼굴은 쏟아지는 불볕에 벌겋게 타들어가고 덴 자국은 화끈거리다 못해 쓰리고 따겁다. (그 옛날 무슨 썬스크린이나 챙 달린모자가  있었으랴.)

집을 나설 때 가지고 온 몇 통의 물마저도 그 많은 날을 광야에서 지나는 동안 약대 열 필과 함께 모두 마셔버리고 바닥이 난지 이미 오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햇볕에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건만, 물을 구할 수 있는 동네를 언제쯤이면 만나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늙은 종은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터벅거리는 낙타 등에 올라앉아 꾸벅거리는데, 어느 듯, 광야의 붉은 바위산이 더욱 붉어진다 싶더니, 휘몰아치는 모랫바람이 해를 서산으로 폴작 밀어붙인 듯, 갑자기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털석 잠겨버린다.

광야의 밤기온은 낮과는 달리 무섭도록 춥다. 들판에 돌을 베개 삼고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멀건히 바라보고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주머니에는 주인의 집 재산 중, 제일 좋은 것들, 금 은보화가 그득하다. 이것만 가지면 어디에 가서도 한평생 잘 먹고 잘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 보석을 가지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면 하는 유혹도 들었지만, 주인의 그 신임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천신만고 끝에 주인님의 고향인 나홀 성에 닿았다. 나홀 성에 도착하긴 했는데, 이제 어딜 가야 주인님의 친척을 만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막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를 꿇어 앉혀놓고 맥없이 앉았자니 주인님이 다급할 때면 언제나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그리고 여차여차히 해주십사 빌었다.

기도가 끝나자 그 기도대로 한 소녀가 물을 길으려 동이를 들고 나오는데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따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소녀가 그의 기도 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주인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란 것이다. 그 소녀에게 건넨, 금고리와 금손목고리를 증표로 보게 된 소녀의 가족은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그 늙은 종을 믿고 맡긴다. 늙은 종은, 엄청나게 많은 보석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낙타 열 필과 함께 광야 길을 지나 주인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 길, 천하절색(天下絶色)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모든 금은보화를 훔쳐서 달아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충성했고, 수많은 날들과 밤을 광야에서 그토록 아릿따운 소녀와 함께 지내야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눈동자처럼 잘 지키고 보호하여 끝내 주인 집 아들 이삭에게 정결한 신부로서 무사히 넘겨주었다. 이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창 24장,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의 이야기이다.

이쯤해서, 우리에게 그 어떤 느낌이 오지 않는가? 이 정도에서 우리는 그 어떤 느낌이 와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주인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설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것이 그가 종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는 분명히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주인의 진실한 종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거나, 자기 눈에 보기 좋다 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취하려고 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주인 아들의 신부감을 데리고 와야하는 사명이 종에게 주어졌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영적으로 현대 우리들, 성도들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 행하여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모두 자기가 설 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자기가 설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명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겨진 양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 내기도 하고, 그 양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동시에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 아멘넷에도 한 젊은 목사님이 자신이 당한 불이익과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는 많은 독자들의 의견이 설왕설래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리다. 누가 저토록 순수한 한 젊은 목사님을 저렇게까지 몰아갔다는 말인가? 그 원인제공자가 미워지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된데는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 제공자들끼리 믿음으로, 기도로, 사랑으로, 대화로, 서로 아름다운 해결을 보아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 “너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절 말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절 말씀).”말씀하고 계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실천실행해야 할 때이다. 선(善)은 무엇을 상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빛이 어두움을 상대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빛은 빛의 선 자리를 굳게 지키기만 하면, 어둠은 그 빛 앞에서 맥없이 물러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상대해서 싸우지 않는다. 사랑은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힘이 없어서 잠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기 원하셔서 오래도록 참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벧후 3:10절 하 참조)

그대가 선 자리는 만왕의 왕을 대신하는 자리다.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예절과 품위로 그 이름을 명예롭게 빛내야 하리라.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왕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실추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왕께 부끄러움을 끼칠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 비록, 조금 어렵고 힘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신임하여 내게 직분을 맡기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것인지…되돌아 보아야 한다.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 그대 선 자리는 왕을 대신한 거룩한 자리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아무 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7-21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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