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이란 무엇인가?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4. 6. 9. 13:52

 





긴 세월을 두고, 교회와 교회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방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본다.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님들도 있고, 반대로 방언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방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은사주의', 심지어 '신비주의'로 몰아가며 방언은 초대 교회로서 중단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더 심하게는 현대 방언은 모두 사단에게로서일 뿐이다. 라고까지... 서로서로 경계하며 손가락질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무엇보다도 말세적 징조의 하나겠지만, 성령을 가장한 사단의 장난 또한 극심한 것이 사실이다. 하여, 필자는 오늘 "방언의 유익과 주의점" 에 대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같이 생각하며 나누어 보려고 한다.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혼과 이성(理性)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장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 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실제 성령님의 역사로 주께 올리는 영의 기도는 결코 무아지경이 되거나 정신을 잃거나 혼절한 상태에서 중얼거림이 아니다. (현대 입신이란 것은 혼절 상태로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 28절 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 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 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 (이성(理性)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He's the Planner)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 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 全能) 하나님 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나 분명한 영적 언어임이 확실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든 은사의 주체이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셨으니, 영언 "ability"를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인 잔치  (0) 2014.06.21
성령의 사람이란...  (2) 2014.06.10
성령의 은사 지금도 계속 된다  (2) 2014.05.27
비빔밥  (0) 2014.05.25
충성, 그 시금석...  (6) 2014.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