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 내에는 믿음생활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면 가차없이 이단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심지어는 교회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공간인 인터넷 카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주로 시인하여,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주인과 종의 관계로)연합된 새생명으로 거듭났다면, 필연적으로 믿음의 행위가 삶속에서 나타나서 입증되어 지게 되어 있는데...그렇지 않는 경우, 스스로 구원을 확신할지라도 구원의 착각일 뿐,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라는 성경적인 주재권 구원론을 행위구원론으로 몰아가고 있다.
수단방법 안가리고 많은 사람을 끌어모아 목회의 성공(?)을 염원하는 목회자나 진정한 거듭남이 없이 착각의 구원의 확신속에 사는 교인들의 입장에서 볼때 열매(선한 행위)의 입증을 말하면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에 의한 행위구원론이 된다.
그래서 구세주로 믿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게 되며, 주로 시인하지 않더라도 구원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비성경적인 논리마저 내세운다. 교인이 자신의 선하지 못한 행실앞에서 마음의 찔림이 오고 갈등이 오는것이 성령이 내주하는 구원받은 증거아니겠느냐는 분도 있다. 그러나 옛사람일 때에도..이교도에게도.. 누구에게나..도덕성과 양심이라는 것은 있지 않은가?
또한 영성훈련을 강조하는 한 목회자가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라'는 자신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은 구원을 이뤄 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것은 믿음의 구원을 부정하는 행위신앙이고 이단 요소라며, 모 이단 전문가가 정죄하기도 했다.
이처럼 '삶 속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는 믿음의 행위 조차도 이단사상으로 배척하는 분위기는 성도의 성경적 행위 마저도 부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성경은 물론 개혁신학에도 무지한 결과이다.
정통 신학자들은 '믿음의 행위'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행위'라는 말만 나오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이단 전문가들과는 달리 개혁 신학자들은 구원과 관련한 성도들의 '인격적인 반응' 즉 믿음의 행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캘빈은 그가 작성한 제네바 요리문답 126번에서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함이 없이 의롭게 만드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훈택 교수(총신대)는 '하나님의 구원도 행위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필수적인 것, 하나님의 뜻을 승화시키고 천국의 떼어낼 수 없는 한 요소로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다(마 7:21)'라고 말한다. (하나님나라와 교회, 생명의 말씀사, 1993, 40쪽).
박형룡 박사도 '진정한 신앙은 선행에서 그 자체를 나타낼 것이니 선행은 사람들 앞에 이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의 생명의 의에 대해 증언할 것이다. 의인의 행함에 의한 칭의는 신앙에 의한 칭의를 굳게 한다'고 말한다. (조직신학 제5권 구원론, 1972, 294쪽).
개신교가 행위를 경시하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도 한몫을 한다. 종교개혁이란 '행위' 또는 '공로구원'을 강조하며 성경에서 빗나간 천주교에 대해 '오직 믿음'을 외치며 반기를 든 혁명이었다. 말틴 루터는 롬 1:17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외쳤고, 이러한 '자기 교리'를 근거로 믿음의 행위로도 의롭게 된다는 '성경말씀'(약 2:24)을 무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또한 생명되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인 '행함의 의'를 경시하는 풍조는 한국 땅에 복음이 전래될 때에 , '이 땅 위'에서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유교와 차별되도록 '사후 천국' '오직 믿음' 만을 외쳤다.
신광은 목사는 메가처치 논박이라는 글에서 “죽은 다음 천국이라는 좋은 곳과 지옥이라는 무서운 곳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천국 들어가는게 너무 쉽기에 은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교회 다니면서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내고, 성가대나 교사로 봉사하고, 목사님 잘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받고 복 받는 비결이다.”라는 통속적이고 저급한 구원론이 오늘날 개신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는 주범 중 하나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런 한국 기독교의 실태를 보면서 변종 행위구원론을 떠올려 본다.
1) 전통적인 행위구원론: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 본성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영혼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하는 극단적인 펠라기우스주의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구원 이후 행위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구원론이다.
2) 변종 행위구원론
A 형 :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한다. 버림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값싸고 쉬운 구원론을 비판하며 , 행위라는 비싼 대가가 필요함을 말한다.
버림받는 신자란:
그리스도 닮은 새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은 주일 낮 예배만 겨우 참석하는 사람, *인색하여 십일조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 *주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 등 교회생활에 열심있는 행위를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본다.
극단적인 신비주의인 신사도운동으로 사도의 계시권을 주장하여, 여러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된 변승우 목사의 경우이다. 버림받지 않기 위한 믿음의 행위를 선한 행실이나 성령의 열매라기 보다는, 목사가 제시하는 율법에 따라 열심히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교주 맹종형 행위구원론이라고나 할까?.
B 형 :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만을 강조하며 믿음의 행위는 매우 경시한다. 목사가 말하는대로 사영리만 따라 외우기만 하면 천국 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 완전 생략되더라도 영화(구원)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어 죄인을 멸망으로 인도한다. 중세 카톨릭시대의 면죄부보다 훨씬 저렴한 현대판 개신교 면죄부이다. 거듭남의 변화를 교회에 출석하고, 술, 담배 멀리하는 정도로 본다. 그리고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 집회, 일천번제, 봉사, 전도, 목사 순종 등의 '율법적 행함'을 믿음의 열매, 거룩한 행실로 간주한다.
또한 그러한 믿음의 열매로 인하여 구원 +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급 속에는 내생의 상급 뿐만 아니라 이생에서의 만사형통의 상급도 포함된다. 구원에 개념 속에도 이생에서의 질병, 가난, 실패로 부터의 구원을 포함시킨다. 지금 많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복주의, 번영신학에 뿌리를 둔 이런 저질스러운 구원관을 “다목적 종교행위 구원론”이라고 부르면 어떨는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에 모두 구원받을 수 없는 행위구원관 이지만 전통적인 행위구원관이 변종보다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은 훨씬 적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