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 동안 쏟아져 내린 눈이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산과 들은 온통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지 오래인데, 회색빛 저녁 하늘이 착 가라앉은 것으로 보아서 오늘 밤에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어린 소녀의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고향 교회에서는 연세가 높으신 장로님의 인솔하에 청년들이(지금 생각하면 청년이래야 모두 중고등부 조무래기 학생들이지만...^^) 새벽송을 돌았다. 해마다 울 언니와 오빠는 새벽송 팀을 따라서 돌다가 밤이 늦어서야 상큼한 바람 향기를 몰고 들어와 잠자리에 들곤 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이 정말 많이도 부러웠었다. 따라가고 싶다고 졸라 보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한 번도 데려가 주질 않아 섭섭했더랬는데, 오늘 저녁은 함께 가도 좋다고 한다. “언니, 나 정말 따라가도 되는 거지?” 아침에 이미 가족의 동의를 얻었건만,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너무 좋아서 무엇이건 말을 자꾸만 건네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래, 먼 길을 다녀야 하는데, 다리 아프다고 징징거리지 마!” 귀찮다는 듯, 짜증스럽다는 듯, 언니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저 생글생글 즐겁기만 했다. 두 살 터울로 위인 언니는 무엇이건, 나보다 먼저 경험했기에, 내게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노래도 곧잘 부르는 우리 언니, 시쳇말로 나의 아이돌이었고 신기한 바깥세상을 미주알고주알 전해주는 꿈길의 통로였으니까. ㅋㅋㅋ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처음 새벽송을 따라갈 수 있었던 나의 성탄절 이브, 가슴이 설레어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언니와 오빠를 놓칠세라 허둥거리며 대문을 나서는 내게 어머니는 예쁜 오색실로 손수 짠 목도리를 다시 한 번 매만져주시며 “아가, 덤벙대지 마라, 그러다 눈길에 미끄러져 다칠라. 언니 손 꼭 붙잡고 잘 따라다녀야 한다 알겠지?” “네, 알고 있어요.” 따스한 털신이며, 두툼한 스웨터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을 한 채, 밖으로 나온 나는 세상이 온통 축복으로 가득 찬 듯, 두 발은 구름을 밟고 하늘을 둥둥 날아다니는 듯, 너무 행복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까만 밤하늘이 열리면서 새하얀 날개옷을 걸친 눈의 요정들이 하늘하늘 춤추며 어깨와 머리 위로 사르르 사르르 보드랍게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종국엔 발이 폭폭 빠질 정도의 심한 눈보라가 되어 앞이 보이지 않도록 휘몰아친다.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따라 교회 성도님들 집집이 찾아다니느라 밤이 깊도록 하얀 눈을 맞았고, 무섭게 쌩쌩거리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다 눈길에 미끄러져 무릎을 다치기도 했지만 아프다는 느낌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 없어..” 대문 밖에서 목이 터져라 찬양을 부르고 나면, 후덕하신 권사님들이나 장로님 댁에서는 우리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신다.

추운데 잠시 들어와 몸을 녹이고 가라시며 모두를 따스한 방으로 안내하신 후, 맛난 식혜를 끓여서 내어놓기도 하시고, 어떤 집에서는 팥죽도 끓여 주시고, 그것도 여의치 못한 집에서는 과자 봉지를 사두었다가 안겨 주기도 했다. 중고등부 남학생 오빠들이 큰 자루를 메고 다니며, 건네주는 과자를 모두 넙죽넙죽 받아서 자루 속에 집어넣는다. 한 자루 수북하게 과자가 모이면 그것을 성탄절 당일, 주일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상이란 명분으로 푸짐하게 나누어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에 두 뺨과 두 귀는 새빨개져 오고, 시리다 못해 얼얼해지는 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른들과 청년들로 구성된 새벽송 팀을 따라다니느라 어린 몸이 지치고 피곤하였을 것이나, 마음만은 그 옛날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새록새록 감동의 밤이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뿌리가 깊어지며 자라서 별이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 성탄절 이브의 아름다운 추억에 잠겨보게 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성탄절의 기원:

X-mas는 '그리스도'의 그리스어 첫 글자 Χ(키)에 mas를 붙여서 쓴 것이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기원후 336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동방교회에서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를 참배하러 왔다는 마태복음서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현일(公現日,1월 6일)과 동시에 행해졌다. -위키백과사전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의 고대 영어 (Cristes maesse에서 유래) 그리스도교의 축일(12. 25).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동시에 대중적인 공휴일이기도 하다. 로마 역서(曆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 축제는 336년경 로마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1월 6일에 하나님이 예수의 탄생과 세례 때 나타난 일을 기념했고, 예루살렘에서는 탄생만 기념했다. 4세기에는 동방교회 대부분이 점차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오랫동안 크리스마스를 반대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아르메니아 교회에서는 12월 25일 대신 1월 6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했다. 동방교회는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지키게 된 후 1월 6일은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의공현대축일로 지켰다. 그러나 서방의 주의공현대축일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온 날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異敎)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백과사전

위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유감스럽게도, 성탄의 목적과 장소는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주께서 오신 그 중요한 날짜는 기록해 두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이방 신을 섬기던 그날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날을 성탄일로 정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는 이토록 어설픈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어설픈 기원을 악용하여 기독교를 공격하는 이단 사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기독교를 정죄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며,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주위 문제를 더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다 사단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참으로 무섭고도 공교한 말로 기독교 믿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이단 단체에서 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약간은 어설픈 부분이 있다는 것을 빌미로, 그 내용을 더욱 무섭게 각색하여 아주 더러운 날을 기독교가 크리스마스로 숭배한다며 이곳저곳에서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하라

주후 300년경에, 콘스탄틴 대제가 성탄일을 지키라고 "명령"했다고 하여서, 다른 날자를 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무조건 그날은(12/25)은 이교도의 태양신 숭배의 날이어서 우리가 지키면 안 된다.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어찌 생각해보면, 정말 사단의 교묘한 방해전술일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성탄절이 되면, 그 누구의 날도 아닌, 우리 주님의 탄생일로 생각하면서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죽어주시려고 이 땅 위에, 그것도 마구간에서 낮아지신 그의 끝도없는 사랑 이야기에 얼마나 감사 감격하였던가.

그날이 사단의 날이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있던 신앙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어놓고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사단의 고등 전술법이란 생각에 씁쓰럼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른 날, 그러니까,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어느 한 날을 택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른 그 어느 날보다 이교도의 축제일로 섬기던 그날이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날짜라고 하는 것은 1년이면 365일, 모든 날이 다 창조주 하나님의 것 아닌 날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교도들이 감히 어느 한 날을 내 날이라고 부르며 빼앗아 가려 하고, 우리는 그날은 사단 경배의 날이라고 두려워하면서 그 한 날을 사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못될 것 같다. 그야말로 컨셉이 문제가 아닌가 이런 말이다.

쉬운 예로, 별이가 태어난 날이 4월 8일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날은 부처가 탄생하신 날이라고 세상이 떠들썩하게 지키기에, 너는 너의 생일이라고 축하하면 안 된다 라고 누가 나무란다면....Does it make sense? No way!

이거야말로 황당한 소리다. “그대들은 부처님의 생신으로 지키십시오, 난 내가 태어난 날, 나의 생일로 지킬 것입니다! 이렇게 고집한다면, 내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 되나요?” 물어보고 싶어진다.

여호와 증인들은, 파수꾼이란 말, 또 시한부 종말론 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 이런 성경에서 좋은 말은 다 빼앗아 가고 우리는 두려워서 그 단어를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 이제는 주님의 탄생일이라고 역사적으로 한 날을 택해서 경배하며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이런 사랑스러운 축하의 날마저 빼앗으려고 하는 사단의 음흉한 간계(?)로 보인다. 다른 어떤 좋은 대안도 없으면서.... 사랑으로 선택하면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아멘넷 게시판에 올려진 동영상, 유대 뿌리교의 지도자인 ‘짐 스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것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만큼 그는 비록 왜곡된 정보일지라도 정확한 정보인 것처럼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왜곡시키고 더하는 것이 현 기독교인 것처럼 말을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분(짐 스텐리)의 인용하는 성구는 전부 구약적인 말씀으로서, 신약시대는 적용시키면 안되는 제사법 제도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이단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헐뜯기 위해서 모든 역사적인 배경이나 성경 말씀을 자신의 어떤 틀에 꿰어 맞추기 하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그런 부패하고 깨끗지 못한 마음일지라도 주님께로 돌아가면 깨끗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하물며 날짜겠는가? 그 어떤 것이건 창조주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하다. 인간이 더럽게 만들었고, 더러워진 부분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만 하면 깨끗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더럽다면 인간의 마음만큼 더러운 것이 세상에 다시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더러운 인간의 깨끗지 못한 심령이지만, 성령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좌정하셨기에,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인정해주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비록 짐승들이 거하는 마구간이었지만,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그 순간 그 자리는 깨끗하다 못해서 순백하다. 깨끗한 천군 천사가 동원되어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리로 바뀌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더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 드려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

짐 스텐리와 그 종파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서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다른 것을 가르치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자세히 들어보니까,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이 깨끗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몰라서 지은 죄가 얼마이겠는가? 우리는 태양신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소년소녀들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행복해 했다. 주님께서 그런 그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가시겠는가? 짐 스텐리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사단의 종이란 뜻이 된다. 진리를 혼합한 사단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이 된다. 그런 억지성, 모함성 발언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더 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마음이라면, 이미 태양신을 섬기는 마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소중한 날을 더러운 태양신을 섬기는 날로 빼내어서 사단에게 내어 준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욕되게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잘못일까?.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신다.

우리는 날짜나 절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도 없지만, 그들, 이방인들이 드리는 제삿날이었다하여, 이제 와서 그날을 터부시하거나 너무 더럽게 생각할 필요 또한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온갖 추악한 죄로 더러워진 인간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변하여 새사람 되는 것이 성도라 인치심을 받는다. 날짜도 죄인들이 더럽게 제사를 지냈던 날짜라면 이제는 주님께 드려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날로 제정하여 지키면 그것으로 깨끗하여 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가하나 모든 것이 절제 되어야 한다. 그들(이방 신들을 섬기는 자들)처럼 무절제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그저 1년 12달 중 어느 한달, 한 날을 뽑아내어 이 땅 위에 죄인의 몸을 입고 구속 주로 오셔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잊지않고 기념하는 마음, 그런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택은 자유다. 이 부분에 관해서 그분의 지혜를 우리 모두에게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것 뿐이다. 모든 것이, 더욱 밝게 보여지고,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성도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명하셨지만, 탄생을 기념하라고 명하신 적은 없다. 그러니까, 너무 얽매일 필요 또한 없겠지만, 주님이 오심을 기념하는 마음을 드린다고 하여서 죄인으로 몰아가실 분은 더욱 아니시란 것을 굳게 믿고 사랑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신앙생활이었으면 좋겠다.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 17),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갈 5: 1)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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