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닌데, 정말 이건 아니야!” 딱딱하고 냄새나는 차가운 돌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해보지만, 억울하고 분한 생각에 도통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뒤치락 거리며, 시커먼 감옥 벽, 천장 가까이 공기통처럼 뚫어논 작은 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청색 빛 하늘 저너머, 별빛은 처량한 그의 신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명멸한다. “내게 꿈을 심어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다 헛것이었나?” 한 번만 살려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자신을 상인들 손에 팔아넘긴 무정한 형들의 굳은 얼굴이 하나씩 하나씩 주마등처럼 차례로 떠오르면서 그를 괴롭힌다..

비록 중년의 나이라곤 하나, 그녀의 완숙한 관능미는 여전히 화려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젊디젊은 그에게 다가왔지만, 그런 그녀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라고 하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마음이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에 그토록 집요한 유혹을 뿌리쳤건만, 현실은 상급은커녕, 어찌 이토록 모진 감옥에 던져졌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이러고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조차도 배신당한 느낌이다. 아니, 차라리 하나님의 실존마저도 의심스럽다고 해야만 하나.

어디 그뿐이랴, 종으로 팔려온 자신에게 집안의 대소사를 맡겨준 주인의 고마운 마음을 헤아려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충성한 댓가가 이토록 허망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를 부득 부득 갈고 시퍼런 칼을 가슴에 품고 그 칼날을 매일 같이 갈고 또 갈아도 시원치가 않을 현실이 아니든가? "으악!” 비명이라도 지르며 머리를 바닥에 찍고 죽어서라도 이 모진 현실에서 도피해버리고 싶은 충동에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가 밤이 하얗게 지새도록 그렇게 끙끙거리며 식은땀을 흘린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셉도 신이 아닌 우리네 범인들과 꼭 같은 감정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이란 점을 고려할 때,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면, 이런 환경에서 의례 겪게 되는 갈등을 이렇게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 요셉, 그는 분명히 우리네와는 현저히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신실함.’ 그리고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고 있다.”라고 하는 철저한 신앙고백이 입으로가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요셉, 그는 드라마틱한 일생을 역전시키는 통쾌한 믿음의 소유자였고,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는 담력, 원수라고 할 수 있는 형들을 품어 안는 넓고 관대한 마음, 그의 이런 거짓 없는 신앙 인품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닮은 성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요셉의 이런 참된 신앙은 어려움 중에 시달리는 성도들에게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신앙의 용기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의미와 지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하루아침에 자고 눈을 떠보니, 유명한 스타가 되어 있더라, 빼어난 미모 하나로 스타덤에 오른 유명 여배우들이 흔히 잘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목사님들마저 아무 노력도 없이 현란한 말솜씨 하나로 하루아침에 슈퍼스타 목사님이 되기를 꿈꾸는 세대가 되었다. 순전은 커녕, 진실과 정직은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고서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루아침에 눈을 떠보니 종으로 팔려버린 신세, 또 어쩌면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갈 수도 있는 흉악범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결코 그의 순전을 잃지 않았다. 이토록 드라마틱한 인생이 다시 또 있을까?

사실, 우리는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누군가 무엇을 이룬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이 온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반전할 힘을 잃고 낙담하기 쉽다. 체코의 영화 감독이며 시나리오 작가였던 ‘프랭크 다니엘’은 드라마틱한 상황(Dramatic situation)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이루려고 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을 이루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정말 그렇지 않은가?  
 
시끌거리는 한국의 대형 교회 C목사님과 그 가족의 비리, 시끌거리는 교계 소식,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런데 답답한 가슴이 더 답답해 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어쩌구…” 하시는 말씀들이다. 답답한 가슴을 달래어도 볼겸, 가까운 바닷가를 찾았다. 연신 하얀 파도를 일으키면서 쉴 새 없이 출렁이는 작은 파도가 사르르 사르르 사르륵 거리며 일렁일 때는 더없이 평온해 보이기만 한 바다, 그러나 그 평온도 잠시뿐, 장엄하던 해가 수평선 아래로 폴싹 떨어짐과 동시에, 부드럽던 물결이 무엇에 화가 난 것일까, 갑자기 사나운 기세로 으르렁 거리며 뭍으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시커멓게 어두워진 바다 저편 어디로 서부터인가 세상을 온통 집어삼켜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산더미 같은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다가 떡 버티고 서 있는 바위를 넘지 못하고 바위를 들이받으며 산산이 깨어져 버리고 만다. 작은 파도가 깨어질 때보다 큰 파도가 깨어지는 소리는 더욱 무섭고 요란한 것 같다. 그러나, 그토록 기세 등등하던 파도가 결국 바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그 순간, 파도는 힘을 빼앗기고 어느새 하얀 물거품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험의 물결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것, 작은 물결이 일어날 때는 그런데로, 무료한 생에, 활력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집채만 한 큰 시험의 물결 앞에서는 당황하게 되고, 더 심하면 그 앞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고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또 이름도 없는 소자 하나가 실족하여 넘어지는 소리보다 큰 어른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소리는 그 넘어짐의 소리가 더 요란하고, 이름 없는 성도 한 사람이 실족하여 넘어지는 소리보다 유명세를 타는 목사님들의 넘어지는 소리는 더 요란하기도 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그래, 그런 것이지, 바다가 있는 한, 작은 파도, 큰 파도, 파도는 계속 일어나겠지,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고해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 요셉의 참된 신앙을 본받고 배우라고 권면해 주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드라마틱한 인생역전과 반전을 기대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 삶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고, 오히려 믿음에서 이탈하거나 혹은 대인 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큰일(Dramatic)을 해낸 사람이라는 칭찬과 환호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결코 들을 수 없다. 안일한 믿음,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누리는 상급이라고 잘못 가르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야 산다. 이런 Theory가 위험한 것은, 세상에 자신을 묶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믿음, 올라가려고 하는 마음, 진실함이 없는 현란한 언어의 유희,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표면적 유대인이 되어서 외식하는 지도자들, 이렇게 허황된 신기루 같은 거짓 믿음을 따르는 마음이 자기 자신과의 분열, 대인 관계에서 분열과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되고, 더 나아가 감정을 와해(瓦解)시키고, 결국 모든 것을 공중분해(空中分解)시켜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공중분해(空中分解)란 사전적 의미로는 다음 두 가지 뜻이 있다. 1.비행 중인 비행기 따위가 어떤 원인에 의하여 공중에서 폭파되어 분해되는 일. 2.계획 따위가 진행 도중 무산되는 일.

여기에서, 2번을 보면 참 재밌다. 계획 따위가 진행 도중에 무산되는 일이라고 한다. 계획 했던 일이 무산 되는 것, 이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이되기에 비행 중인 비행기 따위가 어떤 원인에 의하여 공중에서 폭파되어 분해되는 일과 버금가는 위치에 두는가 하는 것이다. 그만큼 안타깝다는 뜻일게다. 천국을 목표로 주님을 믿노라 고백하며 일평생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왔다갔다 하던 발걸음이, 천국 문 앞에서 무산 되는 것, ‘공중분해’(空中分解)가 되어버린다면 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이 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 개인의 일생도, 소속된 단체나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만날 수 있다. 그 어려움을 믿음으로 헤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세상과 짝하고 살다가, 개인의 삶도, 소속된 단체나 공동체 마저도 ‘공중분해’(空中分解)될 수밖에 없다. 주위를 잠시만 살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지 않은가? 별로 그리 크지도 않은 파도와도 같은 작은 시험을 만나, 그 문제 하나를 선으로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공중 분해” (空中分解) 시켜버리는 개인, 가정, 공동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시대가 아니고 은혜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짓고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고 싸구려 구원론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요, 요셉처럼 신실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진실한 믿음으로 단장하여, 내 삶이 그분 앞에 서기 전에 ‘공중분해’(空中分解) 될까 삼가 조심하여 매일, 매 순간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 17-18)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고후 1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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