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HOP이 있는 캔자스시티는 신사도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으로 인해 최근에 자주 거론되는 도시이다. 신사도 운동은 과거의 자유주의 신앙운동과 종교다원주의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교회에 끼치는 마귀의 운동이다.) 위의 글은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최신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IHOP에서 조용하게 하나님과 개인이 함께 하는 분위기이며 그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wholistic encounter) 영적인 만남의 장이요,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형태의 기도방(The Prayer Room, The House of Prayer)을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과 비전을 가져본다.) 이 역시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다른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 “교회내 민주주의는 반성격적, 성경으로 돌아가야," 라는 거창한 제목과 함께, 목사에게만 교회 내의 치리권도 있고 주권, 목회권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기사도 있다. 다른 한 편, 우리 게시판에는 ( “교회의 주인은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제목과 함께 평신도가 교회의, 사회적 주인이기에, 교회는 민주주의가 타당하며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인 성도들이다.) 라고 역설하는 글도 올라와 있다. 모두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한다. 극과 극, 심각한 대립현상이다. 헷갈린다.

우리의 딜레마는 이 글을 쓴 필진들이 이단의 창시자도, 그들의 교주도 아니고 모두 우리(성도)가 믿고 신뢰하며 따라야 할 소위 정통교회 목사님들이시란 데 있다. 그분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강하고 높으며 집요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더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일까?  대단히 혼란스럽다. 우리 독자들은 혼란상태에서 어제까지 믿음의 동지로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서로 등을 돌리며 “내가 보기에 이 목사님의 말씀이 더 옳다. 다른 목사님을 지지하는 네가 틀렸다.” 서로 손가락질하며 다투기도 하는 가슴아픈 헤프닝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성경을 두고 무엇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함께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자신의 신앙에 발란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고,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말씀이 주는 참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견을 먼저 뼈대로 세워놓고, 그 주견에 맞은 말씀 성구만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인용하는, 이헌령비헌령(耳懸鈴鼻懸鈴),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의 주견을 앞세우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둘 때 내 신앙에 무리가 오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며 총체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발란스가 필요한 부분과 그 해법
신앙의 발란스라고 하면, 넓게는 구원론에서부터 신론, 기도론까지 다양하고 복잡하겠으나, 아쉬운대로 좁은 의미로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발란스는 어떤 것인가, 정립을 해보면,

a) 신사도 운동은 과연 성경적인가?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란 그리스 원어의 뜻이 있다. 그렇다면, 보내는 자가 계시고, 보내시는 목적이 분명 있고서야 보냄을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다. 사도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분은 그분(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엡 4: 11절 참조), 보내신 목적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는 붓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초대 교회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도 희귀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한데 묶어져 있지않은 때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 줄 사도들이 필요했었고, 이를 위해 주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친히 불러 사도로 세우셨고 그들,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벧후 1:20절 참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완성된 정경 신구약 66권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따로 직통계시로 받아 우리에게 전해줄 사도(Apostle)직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22:18-19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말씀 외에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되었기에, 그 대답은 분명 “No!”이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이 친히 우리들 속에 임재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데, 그런 우리에게 따로 선지자나 예언자가 특별히 필요한가? 그것도 역시 대답은, “ No!” 이다.
 
b)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교회의 주인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두 주님이 주인이시다. 주인 = "주"(Lord)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 헬라어로는 "큐리오스" 즉 "주인, 상전"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Lord 이 역시 주 종과의 관계성에서 상전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지는 뜻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로서 기능과 신권정치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개인 교회건, 가시적 교회건 비가시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건) 그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인’이란 단어보다는 '청지기'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용어가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성도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서 마저 그분의 설 자리가 없고 통치권이 박탈당한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되겠는가?

(주인의 것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종) 이것이 우리, 목회자건, 직분자건, 평신도이건...성도가 주님의 몸을 섬기는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런 자세가 바로 발란스 잡힌 신앙인의 태도라고 본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

c)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마귀의 장난을 분별하는 방법

아래는 오래 전, 작자 미상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이웃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 도움을 받고 참조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롭게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비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던 크리스천들도 마귀들의 장난이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처럼 작용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장난을 성령님의 인도처럼 착각하여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런 실수의 대부분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는 마귀의 장난과 매우 다르다."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와 마귀의 장난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 인간을 미워한다! 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빌2:13)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한 통제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한다.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면, 너무나 온화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어떤 것이 성령님이고 어떤 것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나 마귀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늘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마귀들이 자신들의 잠재의식 일부의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위의 진술은 사실이다.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제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들이다. 새 시대 운동에 속한 죄의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 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며, 또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찬미하도록 한다. 교만은 마귀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10:5)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빌2:13)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능력이 크시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우리의 의식을 누르시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지만 이 때에도 깨끗하고 질서 있게 행하신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되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 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능동적이며 강력한 의식을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시키도록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고 변경하여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준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실 때, 우리를 고치시거나 통찰력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같은 일을 두 번 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틀에 박힌 일이나 혹은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습 방언과 같이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뒤 이 마귀들은 그 사람이 부를 때마다 와서 그 사람이 원할 때 치료하는 일 을 행하곤 한다. 또한 마귀들은 의식과 예식 등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영계를 많이 보여준다. 성령님의 은사를 마귀가 모방 할 때 그는 대개 이 일을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통제하에서 수행한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병 고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 을 갖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통제를 받아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이나 감정의 치솟음 등과 같은 일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계를 보여주시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병을 고칠 수 없으며, 방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단지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아뢸 뿐이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빈번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계를 보게 하며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자주 환상을 보거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우리도 의도적으로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 그분께서는 단지 조용히 뒤로 물러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형극에서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이나 로보트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밥티스마(침례)를 받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즉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 불변하며, 단지 그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즐겁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너무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에는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재빨리 징계한다. 그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으려고 힘쓰며 그것을 점령하고 통제하기에 민첩하다. 마귀들은 인형이나 로보트들을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 앞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파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한 죄값을 친히 지불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릴 것을 요구해 왔으며, 자기들을 위해서그들이 정화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피흘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성도들을 향해 마귀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신자들 스스로 부과한 모든 종류의 얽어매는 규례와 엄격한 형식에 따른 율법 조항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경우에도 마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처럼 꾸며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마귀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준수 등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거짓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항상 위기의식이나 죄의식 등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벧전 3:18)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요 14:26) 반면에 마귀들은 혼란을 가져와서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도들의 모든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자랑하길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 거짓말쟁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배우는데 능동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정보 은행으로서 봉사하길 원치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보 은행이 되어 주며, 그 결과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의지대로 정보나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기도만 하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점 같은 것은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기도, 축복성회 등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영어도 유창하게 하고 대학생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경우의 대부분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경우이다. 하나남께서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아이로 태어나 지식이 자라고 영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동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커서 잘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마귀가 떠나면, 그 아이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며, 더 이상 정보나 지식 창고로 존재하던 마귀가 없으므로 그 아이는 사회의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능동적인 의식과 자신의 뜻이 연합되어 우리 가운데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쉽게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점쟁이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예견력을 주시지 않는다.(마6:34) 반면에 마귀들의 가장 일반적인 속임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간단한 예견에 불과한 "거짓 지식의 말들"을 주는 것이다. 마귀들은 또한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한 많은 개인적인 "예언들"을 말해 준다. 성경의 예언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학 진학,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 등을 위해 소위 용하다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처럼 보이나, 사실 이들은 대부분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어서도 안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용 해석을 하려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부분적으로 치우치게되면 극단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이단사설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로 간구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앙 생활의 발란스를 유지하도록 힘쓰자!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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