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도 톡, 빠지직!’ 
꽁꽁 얼어붙었던 산개울의 두꺼운 얼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온풍(溫風)에 녹으면서 깨어져 내리고 겨우내 조였던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 마냥 즐거운 듯 ‘졸졸 조르르~’ 얼음장 밑에서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서곡(序曲)으로 냇가에서는 버들강아지가 사브작 거리며 움트기 시작하고 기나 긴 겨울 동안 어디에 숨었다가 모두 뛰쳐나오는 것인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작고 귀여운 새들이 짝을 찾느라 재재거리며 이리 폴작 저리 폴작 아직은 엉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폴작 거리는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리고....
 
각종 곤충과 식물들이 기지개 켜며 깨어나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부산스런 숲 속의 이른 아침, 새하얀 안개 너울은 마치 천사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산허리를 감싸며 흘러내린다. 그토록 모질고 매섭던 겨울 冬장군의 혹독함도 살랑이며 불어오는 춘풍(春風) 아기씨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게 되고 봄은 그렇게 우리 곁을 찾아오는가 보다. 
 
봄이 오는 소리, 그것은, “죽음이 끝나고 생명이 살아나는 소리” 이다. 저만치서 힘차게 달려오는 봄의 발걸음 소리는 그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활기찬 ‘생명의 선율’이 되어 꽁꽁 얼어붙은 마음마저 녹여주고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게 하는 힘이 있기에 좋다.

‘희망’이라고 하니까 오래전, 필자가 처음 러시아 선교지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젊음 탓인지 그때는 그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ㅋㅋ) 반짝(?)이는 별이의 눈에 비친 러시아 어(語) 사전에 ‘희망’이란 단어는 있는데, ‘소망’이란 단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70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사회주의 사상, 그 무서운 장벽 속에 갇혀 있던 지하교회 성도들, 그들에게도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또 하나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성경에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 빌 3 : 20절 성구가 통째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두 눈을 씻고 잘 살펴보았지만 성도들에게 큰 소망과 위안을 주는 그 뜻깊은 구절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다!

아하, 그럴 테지,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상가들이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시킨 사람들이기에“하늘나라 시민권자”란 구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눈엣가시 같았을 것이고 그 성구를 삭제시키는 것이야 하등 이상할 것이 없겠지… 하지만, ‘소망’이란 단어가 구소련(러시아 語) 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필자로서는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명쾌하게 이해되지가 않아서 당시 우리에게 러시아 어(語)를 지도해 주시던 교수님, 극동대학에서도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지도 교수님 (러시안 정교회 실세님)을 찾아가 그 사실을 여쭈어보았지만, ‘소망’이란 단어가 ‘러시아 語’ 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고만 대답하셨지 그분 역시도 그 이유는 잘 알지 못하시는 듯했다.

흠~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과 ‘소망’에는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들은 ‘소망’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싫어한 것일까? 이것은 분명히 낯선 젊은 이방인의 호기심과 궁금증 신경세포를 간질거리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하여, ‘희망’과 ‘소망’이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뜻을 생각하느라 밤이 늦도록 그 단어에 몰입해 본 기억이 새롭다.

물론, 영어도 ‘희망’과 ‘소망’ 두 단어를 모두 ‘hope’로만 표기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한국인들의 정신세계가 더 복잡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국어에는 분명히 두 단어의 뜻이 다르게 사용됨을 알 수가 있다. 1. 희망 (希望) = 앞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함. 또는 그러한 기대. 2. 소망 (所望) = 바라고 원하다. 간곡하게 바라다. (국어사전) 그러니까, 희망을 이야기할 때 개인이나 단체의 감정이 기대하는 것으로 어떤 막연함이 배어 있다면, 소망을 이야기 할 때는 개인과 단체의 감정이 기대를 넘어 더욱 간절함, 즉, 더욱 강렬한 뜻으로 사용된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희망’은 절대적일 수 없고, ‘소망’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내가 앞일에 대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희망’이라면, 내가 앞일에 좋은 결과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 이 둘의 차이점은, 내가 ‘기대하는 어떤 결과는 ‘이루어져도 그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만으로서 희망하고 기대만 한다면 막연한 것이고, 내가 ‘소망하는 어떤 결과를 더욱 간절함과 간곡한 마음이 ‘소망’ 이란 단어 속에 함축돼 있다면, 소망한다는 단어 속에는 그 어떤 보이지 않는 힘, 즉 神의 힘을 의지하도록까지 집약되고, 이런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神)을 찾게 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기에 합당한 단어는 막연한 뜻을 지닌 ‘희망’이 아니라 더욱 확실한 표현으로서의 ‘소망’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소견이다.^^ 아마도 이런 뜻을 잘 알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구소련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단어가 ‘소망’이기에 그들이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삭제하였으리라고 하는 것이 필자의 연구(?) 결과이다. 그 정확도는 확실하지 않지만…ㅠㅠ

이 시대는 과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것을 희망(기대)할 만한가?

안타깝지만, 그 대답은 ‘No! 희망은 없다.’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런데 ‘희망’은 없지만 ”우리에게 ‘소망’은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너무 역설적인가?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현 세대는 글자 그대로 한 치 앞도 가름하기 어려울 만큼 캄캄한 암흑기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무서운 冬장군이 장악하고 만듯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버린 혹독한 때다. 지금은“역사의 마지막 때”이며, 한 마디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때란 것이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마태복음 24장 예언이 성취되어가는 시점에 놓였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와서 평화를 노래하고 새 시대(New Age)가 이 땅 위에 도래할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로서 성도의 영혼을 미혹하기 위해 꾸며내는 간교한 이단자의 거짓 미소일 것뿐이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살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식어지고, 남자나 여자가 性을 순리대로 쓰기를 싫어하고 역리로 사용하며, 자기를 사랑하며, 자고(自高) 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무정하기 그지없다. 상식 실종 시대, 윤리 실종 시대, 표리부동 불법이 성행하는 시대다.

과학문명이 우리를 건질 수 있다고? 지금 와서 누가 그런 헛된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인가?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문명의 이기(利器)는 인간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극한 위기를 몰고 왔고, 인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인지(認知)하고 있다.

폭발하듯 늘어나는 인구, 자연고갈, 식량부족, 각종 유해물질에서 방출되는 독 gas, 방사능 먼지, 이런 과학 물질의 공해로 말미암아 지구는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그 오만하던 과학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에다 세상을 단숨에 불태우고 한순간에 산산조각으로 흩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을 지닌 무시무시한 공포의 핵무기의 양만 늘렸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경을 근거로 살펴보면, 세상을 수십 번 불태우고 남을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핵무기가 만들어진 것마저도 성경적 예언이 들어맞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소리란 것이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을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명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벧후 3: 6-7)

과거에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불로서 세상을 심판하시려 계획(plan)하셨고 그 계획하심을 따라 이 세상 과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핵무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죽음의 겨울은 영원하지 않다.

필자가 즐겨 읽는 성경 말씀 중에서, 아가서가 있다. 그곳에 보면, 모진 겨울비가 그치고 언 땅이 풀리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다고 예언해 준다. 이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이 어두운 역사를 끝내고 주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미한다.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야가 구속 주로써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다. 그 주님이 이제는 고난의 주가 아니라, 왕 중의 왕으로, 심판 주로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봄날같이 우리 앞에 화사하게 펼쳐질 것을 예언해 주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 또한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때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고 모질게 추운 겨울 날씨처럼 어렵고 고달픈 때가 있을 수 있다. 예기치 않던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되는 수 있고, 그런대로 잘 이끌어 가던 사업체가 한순간의 실수로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도 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고 가족 간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 고통 받을 때가 있다.

우리들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격려의 음성이며, 영적 전쟁의 전투장은 그리 녹록지가 않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잃지 말고 힘써 싸우라 격려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부활절이 가까워오면 다시 오실 주님의 발자국 소리, 언땅에 새봄이 찾아오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절이 4월이다. 아니다.” 어리석은 변론을 즐기는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가 있다. "죽음의 겨울 저너머 새봄이 찾아올 것을 소망하는 예표가 부활절이다. 4월이면 어떻고 춘삼월이면 어떠리...!!"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종말을 맞지 않을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사람도 먼저 가고 나중 가는 차이는 있지만, 개인적 종말이던지, 역사적 종말이던지, 반드시 한 번은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숙명 아래 놓여 있다.

죽음, 역사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종말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면 죽음 그 자체가 그리 두려울 것 없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한다면, 지금처럼 절망할 수밖에 없는 캄캄한 역사의 흐름도 그리 절망할 일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절망이란 소망의 반대 현상이라면, 환경의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낙담할 이유가 없다.
새로운 세상이 이 땅 위에 도래할 것이라며 꼬드기는 말은 모두 WCC, 뉴에이지 사상 그리고 각종 사이비들의 부질없는 속임수일 뿐이다. 결코 새로운 신세계는 도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신이 종국에는 같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이 땅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음에도 새세계가 이땅 위에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이 새로워진다는 WCC가 다원주의가 아니라고? 눈감고 야옹 하지 마시기 바란다. 우리 중 어제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다고...

봄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이다.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죽음의 터널, 절망적인 어둠의 세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모질고도 긴 혹한의 冬雪을 지나고서야 소망의 봄이 오는 것이다. 성경에서 1518번이나 재림을 약속하고 있으니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인류의 봄이 되신 그리스도, 그분께서 저만치서 오시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이 땅이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는 속임수에 귀기울여서 흔들리는법 없어야 하고, 어느 때, 어느 시에 오신다고 하며 성경에도 없는 말로 사람을 미혹하며 몰아가는 극단적 종말론 자들의 거짓 예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적 세계가 혼탁해질수록 성도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그대,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가....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3:1-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 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5-27).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 20)


USA 아멘넷: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