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주제

p.26

서신 전체가 아주 체계적이기 때문에 서두 자체마저도 기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바울은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이것으로부터 복음을 소개하는 데로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한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한다. 그래서 그는 전체 서신의 주요한 주제를 다룬다. 그 주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그가 5장까지 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장들(1-5장)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유일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 그 은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공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납됨”.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졸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자만심이 깨져 그들이 낭패당하기까지는, 그들은 믿음의 의가 그들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짓된 의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추어 주며 속이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이 강하게 느끼기까지는(p.27), 그들은 욕정의 쾌락에 아주 도취되고, 무사 안일한 생활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금방 잠에서 꺠어나 의를 구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두 가지 것을 하고 있다. 하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사악함을 확신시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해 가지고 그들을 졸음에서 깨워 일으키는 것이다.

첫쨰로 그는 세계 창조때부터 온 인류를 그들의 배은망덕을 인하여 정죄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탁월한 창조 사역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는데도 창조주이신 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인정하게 되는 때에도, 그들은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위엄을 높여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허망하여져 그의 위엄을 더럽히고 손상시킨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이 불경건죄로 비난한다. 그런데 이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 중에 가장 가증스런 죄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입증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디서나 범하기 쉬운 더럽고 가동할 죄행들을 바울은 기록한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상실했다는 분명한 논증이다. 왜냐하면 이 죄행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들이요,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어떤 이방인들은 그들의 내면의 사악함을 외형적인 거룩의 외투를 가지고 가리웠다. 그리고 이 죄행들을 인하여서는 결코 정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정죄는 면제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위장된 성결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이 거룩의 가면이 자칭 성자들로 행세하는 사람들에게서 제거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숨은 욕망까지도 보실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도는 그의 강화에 구분을 짓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로따로 세운다.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무지를 핑계로 삼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율법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그들을 고발했고도 남는다고 그는 말한다. 유대인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것인 성경을 받아들일 것을 그들에게 바울 사도가 강력하게 탄원한 악함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입으로 이미 그들에 대해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이 만들어 낼 수도 있었던 예(p.28)상된 반대를 미리 막고 있다. 그 반대는, 만일 그들과 다른 이방인들 간에 아무런 구별도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다른 이방인들 간에 아무런 구별도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거룩의 표시이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깨뜨려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먼저, 그들이 언약을 소유한 것이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게 해 준 것이 없음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불충실로 인하여 그것을 상실해버렸기 떄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이 제거될까 염려하여, 그는 또한 그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이 약간의 특권을 누리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그들 자신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특권을 들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죄인들임을 증명한다. 그는 또한 여기서 율법의 효용을 약간 언급한다.

사도는 인류에게서 그들 자신의 선과 그들이 우쭐대는 자기 의에 대한 신뢰를 분명하게 박탈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성을 들어 그들을 낭패시킨 연후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그의 이전의 명제에로 이제 되돌아 온다.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를 얻게 되는 가를 그는 설명한다.

그는 3장의 끝 부분에서 이것에다 훌륭한 결론을 덧붙인다. 이는 인간의 자만심의 만행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거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 큰 은총을 그들 자신의 민족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도록, 그는 그것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4장에서 그가 아주 분명한 것으로 단언하고, 그러기에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한 실례를 들어 그는 논증한다. 아브라함이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는 한 유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 연후에, 우리가 바로 그 길을 좇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바울은 정반대 되는 것들을 대조하여, 우리가 좇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바울은 정반대되는 것들을 대조하여, 우리가 믿음의 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 행위의 의가 물러나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덧붙인다. 다윗은 인간의 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행위에게서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능력을(p.29) 그는 뺴앗아버리고 있다. 즉, 인간이 그 자신의 행위로는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다윗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그가 간단하게 다루었었던 주제를 보다 충분하게 다룬다. 즉,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이방인들보다 높일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 이것은 이 축복이 둘 다에게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 주제를 보다 충분히 다룬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그가 의를 얻었다고 증거한다. 바울은 이 문구에서 할례의 효용에 관해 몇마디를 언급할 기회를 갖는다. 이렇게 한 연후에 구원의 약속이 하나님의 선(善)에만 달려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약속은 성취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도록 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만을 생각해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들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점에 있어서 자기의 시선을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에로 돌렸던 아브라함의 본을 우리는 따라야 한다. 4장의 끝 부분에서 유사점을 가진 두 가지 것들을 비교한다. 이는 그가 인용한 실례를 보다 넓게 적용시키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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