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얼마 전, 촬스 스윈돌 목사님이 ‘Sincere’라는 단어를 아주 재밌게 해석한 것을 '사모님사모님' 카페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기억 나는 대로 이곳에 잠시 옮겨보면, 라틴어 ‘Sine Ceras’가 영어 ‘Sincere의 어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Without Wax’ 즉 ‘왁스가 없다’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Sincere’란 ‘정직하다’ ‘진실하다’라는 뜻인데 무엇 때문에 ‘왁스가 없다’라고 하는 뜻을 담고 있을까?

그 유래는 이렇다. 우리나라도 그랬겠지만, 아주 오래 전, 유럽에서는 도자기가 무척 귀한 물품이었다고 한다. 질이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늬, 색감, 모양, 모든 것이 좋아야 했지만, 무엇보다 금 간데가 전혀 없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금이 간 곳이 있으면 그 도자기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폭락해버린다.

그럼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일부 정직하지 못한 상인들은 금이 간 도자기를 깜쪽 같이 속여서 파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진주 같이 투명한 왁스를 살짝 바르면 도자기의 금을 감출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교묘한 위장술로서 당시 상인들 사이에 이 방법이 아주 성행했다고 하니, 어디든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매일반, 가짜와 진짜가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반인의 눈에는 전혀 알 수 없는 이런 교묘한 방법도 전문인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깜쪽 같이 속여 칠한 왁스를 전문인이 알아 내는 방법은 무엇일가? 그것은 도자기를 밝은 햇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라고 한다. 밝은 햇빛에 도자기를 들고 비추면, 제 아무리 깜쪽 같이 발라둔 왁스라고 하더라고 햇빛에는 그 실체가 모두 들어나기 때문에, 이 ‘Sincere’의 헬라어 어근은 또 다른 말로, ‘Suntest’, 즉 ‘햇빛에 실험하다’ 라는 뜻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무엇이건 귀한 것은 반드시 모조품이 있고, 모조품 즉, 가짜와 진짜를 가려러내는 햇빛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특히, 우리 성도는 ‘Sontest’ 즉, 하나님 아들의 실험대 앞에서 살아야 한다라고 찰스 스윈돌 목사님이 말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인가?

금도 그렇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순금보다 도금한 금이 더욱 번쩍거리지만, 가짜 금, 도금을 드러내는 불이 있다. 금은 불 속에 들어가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요즘처럼 가짜와 진짜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시대가 다시 없을 것이란 생각마저 든다. 가짜 예수, 가짜 구원자, 가짜 메시야가 우리나라만도 부지기수이고, 게다가 요즘은 가짜 성령의 은사, 가짜 성령의 역사마저 흥왕하는 시대이니 다시 더 말해서 무엇하랴.

최근, 우리 게시판에 "여보 제발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요"라는 예쁜 제목과 함께 대대로 믿음의 가정이요, 장로교의 뿌리로 신앙생활(본인의 고백대로라면 '종교인 생활')을 착실히 해 나오던 한 성도님 가정이 순복음?(조 아무개 목사님)의 스타일 교인으로 바뀌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 성도님의 신앙이 가짜 신앙이란 것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주요 흐름의 맥을 짚어보자면, 당신 가족이 믿음의 뿌리를 가진 신자로서 지금껏 성장해 나오던 장로교에서 가르침 받지 못했던 '예수님 이름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순복음 교회의 조아무개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이란 책에서 배움을 받았고 그 책에 서술된 대로 따라 했더니 생활 속에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이야말로 "제대로 믿는 믿음"이란 지론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딱히 그 책의 내용을 비판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또 비판할 자격도 없다. 다만, 우리 게시판에 올라온 글, 그 내용을 토대로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침 고비야 목사님께서 별이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셨으니, 그분의 뜻을 존중하는 뜻에서 답변을 댓글로 남길까 생각도 했으나, 기도하는 중, 이곳에 올려 더 많은 분들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에 따로 정리해 본 것이다.)

하늘에서 10전짜리 동전이 차 안에 떨어졌고 그 동전에 의하면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는 US 달라로 10전의 가치도 없는 교회다, 그러니 나와 내 가족은 그런 교회, 미련 없이 훌훌 떠난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다 좋다.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계속 그렇게 점치는 듯한 작은 기적을 체험하고 거기에 내 진로를 맡기고, 이런 태도가 과연 “제대로 믿는 믿음, 바른 믿음의 표상일까?” 왠지 가슴이 답답하고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적을 따라가는 자는 결국 그 기적 속에 자신의 신앙을 걸기 때문에 매우 위험해 진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필자는 기적을 체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 소리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마시기 간곡히 바란다. 하늘에서 10전 짜리 동전 하나가 떨어진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그러나 필자 역시 글자 그대로 amazing, wondrous 한 기적을 수없이 많이 체험했음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그들은 선민이었다. 그들 앞에 가로막혔던 홍해, 넘실거리던 요단 강이 쫘~악 갈라지는 기적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철통 같은 여리고 성이 그들 눈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적도 체험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만큼 놀라운(wonderous) 기적을 많이 체험한 백성이 다시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하나님 섬기기에 실패한 백성”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기적이란,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고, 사이비 교주들이 가장 많이 팔아먹는 것 또한 유사한 기적이다. 모세의 지팡이로만 뱀이 나온 것이 아니라, 둘러선 거짓 영성가들이 들고 있던 지팡이 역시, 뱀으로 변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소히 작은 기적이건, 엄청나게 큰 기적이건, 기적을 너무 사모하거나 너무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말씀보다 기적을 우선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수많은 기적을 베푼다는 소문이 자자하였고, 하늘 기적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우리나라의 그 유명한 조 아무개 목사님, 그리고 그 가족의 가는 길이 어떠한가? 
 
또한, 성령님의 능력이나 기적이 성도의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초대교회로서 중단되었다는 말도 따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22: 23~30)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작금의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말씀이 주는 참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견을 먼저 뼈대로 세워놓고, 그 주견에 맞은 말씀 성구만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인용하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의 주견을 앞세우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둘 때 내 신앙에 무리가 오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며 총체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 우리(성도)에게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다. 그렇다면 생명을 구하는 것이 무엇으로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어디로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로마서10:16-21) 그러니까, 일생에 기적은 단 한 건도 체험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이 확실히 믿어진다면, 그는 최상의 것, 가장 귀한 보배를 소유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제 죽을 생명에서 건짐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이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복하며 복종하는 것이 남았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것, 여기에는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고, 내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릴 때도 있고, 내 눈앞에 죽음의 강이 놓여져 있을지라도 묵묵히 순종하고 따르는 마음가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불러 내려, 십자가를 벗어던지는 것은 큰 기적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셔야만 하셨던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는 귀신의 영과 성령의 역사를 분별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드리는 말세적 현상이 극에 달한 때이기에, 이상한 일들이 곳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적, 기적을 더 강조한다. 말하자면, 본질보다 비본질을 더 크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과 이사를 추구한 나머지 성경을 넘어서는 것도 아무런 꺼림도, 두려움도 없고, 직통 계시, 거짓 영성을 마구 남발하고 심하게 말하면, 속여 팔아 먹는 자도 있다.(지송~^^)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거짓 영성을 팔아먹는 한심한 자들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간음을 한 목사도, 성폭행을 상습적으로 하다 들통이 난 목사마저도, 용서라는 이름으로 덮어주자며(누가 하나님인지...), 말만 잘하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든다는 것이다!

2)우리(성도)의 주인은 누구시며 그분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교회(성도)의 주인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두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주인 = "주"(Lord)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 헬라어로는 "큐리오스" 즉 "주인, 상전"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Lord 이 역시 주 종과의 관계성에서 상전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지는 뜻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로서 기능과 신권정치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개인 교회건, 가시적 교회건 비가시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건) 그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인’이란 단어보다는 '청지기'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용어가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성도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서 마저 그분의 설 자리가 없고 통치권이 박탈당한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되겠는가?

주인이 원하시는 것은, 첫째도 말씀 증거요, 둘째도, 세째도 모두 그분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전하는 것, 이것 뿐이다! 주인의 것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종, 이것이 우리, 목회자건, 직분자건, 평신도이건...성도가 주님의 몸을 섬기는 자의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런 자세가 바로 발란스 잡힌 신앙인의 태도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 기적과 이사는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분께서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분의 방법으로 나타내시고,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기적을 추구하며 따르다가 사단의 거짓 기적, 거짓 영성에 미혹받을 수 있음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마귀의 장난을 분별하는 방법(부록)

아래는 오래 전, 작자 미상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이웃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 도움을 받고 참조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퍼왔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롭게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비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던 크리스천들도 마귀들의 장난이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처럼 작용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장난을 성령님의 인도처럼 착각하여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런 실수의 대부분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는 마귀의 장난과 매우 다르다."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와 마귀의 장난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 인간을 미워한다! 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빌2:13)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한 통제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한다.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면, 너무나 온화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어떤 것이 성령님이고 어떤 것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나 마귀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늘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마귀들이 자신들의 잠재의식 일부의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위의 진술은 사실이다.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제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들이다. 새 시대 운동에 속한 죄의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 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며, 또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찬미하도록 한다. 교만은 마귀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10:5)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빌2:13)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능력이 크시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우리의 의식을 누르시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지만 이 때에도 깨끗하고 질서 있게 행하신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되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 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능동적이며 강력한 의식을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시키도록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고 변경하여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준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실 때, 우리를 고치시거나 통찰력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같은 일을 두 번 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틀에 박힌 일이나 혹은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습 방언과 같이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 뒤 이 마귀들은 그 사람이 부를 때마다 와서 그 사람이 원할 때 치료하는 일 을 행하곤 한다. 또한 마귀들은 의식과 예식 등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영계를 많이 보여준다. 성령님의 은사를 마귀가 모방 할 때 그는 대개 이 일을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통제하에서 수행한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병 고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 을 갖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통제를 받아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이나 감정의 치솟음 등과 같은 일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계를 보여주시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병을 고칠 수 없으며, 방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단지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아뢸 뿐이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빈번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계를 보게 하며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자주 환상을 보거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우리도 의도적으로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 그분께서는 단지 조용히 뒤로 물러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형극에서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이나 로보트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밥티스마(침례)를 받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즉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 불변하며, 단지 그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즐겁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너무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에는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재빨리 징계한다. 그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으려고 힘쓰며 그것을 점령하고 통제하기에 민첩하다. 마귀들은 인형이나 로보트들을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 앞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파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한 죄값을 친히 지불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릴 것을 요구해 왔으며, 자기들을 위해서그들이 정화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피흘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성도들을 향해 마귀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신자들 스스로 부과한 모든 종류의 얽어매는 규례와 엄격한 형식에 따른 율법 조항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경우에도 마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처럼 꾸며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마귀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준수 등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거짓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항상 위기의식이나 죄의식 등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벧전 3:18)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요 14:26) 반면에 마귀들은 혼란을 가져와서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도들의 모든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자랑하길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 거짓말쟁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배우는데 능동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정보 은행으로서 봉사하길 원치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보 은행이 되어 주며, 그 결과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의지대로 정보나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기도만 하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점 같은 것은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기도, 축복성회 등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영어도 유창하게 하고 대학생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경우의 대부분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경우이다. 하나남께서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아이로 태어나 지식이 자라고 영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동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커서 잘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마귀가 떠나면, 그 아이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며, 더 이상 정보나 지식 창고로 존재하던 마귀가 없으므로 그 아이는 사회의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능동적인 의식과 자신의 뜻이 연합되어 우리 가운데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쉽게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점쟁이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예견력을 주시지 않는다.(마6:34) 반면에 마귀들의 가장 일반적인 속임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간단한 예견에 불과한 "거짓 지식의 말들"을 주는 것이다. 마귀들은 또한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한 많은 개인적인 "예언들"을 말해 준다. 성경의 예언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학 진학,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 등을 위해 소위 용하다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처럼 보이나, 사실 이들은 대부분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어서도 안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용 해석을 하려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부분적으로 치우치게되면 극단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이단사설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로 간구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된 삶이란 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이고 내 귀에 아무 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말씀)위 굳게 서서 나가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복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능력이다. 죄악 중에 죽었던 내 영혼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는 것, 이 것이 기적 중에서도 가장 큰 기적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 17)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선교사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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