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아드님을 저희 교회 교육 전도사로 모시고 옵시다. 아드님은 이중 언어에 능통하니, 우리 교회의 청년부를 맡깁시다. 청년부를 맡아서 가르치는 동안에 목사님의 목회 방법도 익히고, 그렇게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이다음에 목사님께서 은퇴하시는 날, 목사님의 아드님을 우리 교회 담임 목사로 내정해 둔다면 교회가 안정되고 더욱 든든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목사님들이라고 하여도 너무 이상한 사람이 많으니까 믿을 사람이 있어야지요. 우리는 목사님을 주님의 참된 종으로 믿을 수 있고 목사님의 아드님 또한 믿을 수 있으니 교회의 미래를 보아서 다시 없는 훌륭한 적임자입니다.

목사님 편에서 생각해 본다고 해도 나쁠 것 없는 것은, 우리 교회는 목사님께서 개척하셨고, 그동안, 고생 많이 하신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가 이 정도의 성장을 하였는데 이토록 잘 짜여진 좋은 교회를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목사님, 아드님을 후임으로 세우고 이곳에서 아드님과 함께 목회하시면서 주님 나라에 가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시다.”

오래 전, 우리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대표급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 위원장 장로님과 재무부장 안수 집사님께서 우리 부부를 불러내어 맛있는 점심을 사주면서 간곡하게 권면하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웠고 무언가 울컥 하는 것이 올라오면서 뽀얀 안개로 갑자기 눈 앞이 흐려옴을 느꼈다. 아, 사탕처럼 달콤한 이 유혹(?)의 목소리, 멋진offer를, 남편 목사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는 잠시 숨을 죽이고, 남편 목사님의 답변에 집중했다.

“그건 절대로 안될 소립니다. 그런 일은 제가 제일 싫어하는 세습입니다.” 두 번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서 대답하는 남편 목사님의 답변에 두 분께서는 무척 상심이 되신 듯,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셨고, 우리 목사님의 단호한 결단의 대답도 몇 번이고 꼭 같은 톤으로 일관하셨다.

그렇다. 세습, 그 달콤한 유혹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교회와 목사, 양쪽의 욕심(?)이 작용하게 된 사례라고 본다. 입술로 주인이라고 고백하던 그 하나님께서 전혀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인간적인, 극히 인간적인 욕심 말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여서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학교, 우리 지역 최고 비싼 사립 학교에 풀 아카데믹 장학금을 받으면서 전교 학생회장을 하던 장한 내 아들, 중고등부 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설교 원고를 받아서 영문으로 번역하던 아이(물론, 어려운 모국어는 엄마인 나의 지도 아래였긴 하지만...),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유명 대학에서 아카데믹 풀 장학금을 주고 데려가더니 대학 4년 내내 장학금을 지급받으면서 공부하던 아들, 대학을 졸업하자 곧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대기업이 놀랄만한 초봉으로 스카우트해 데려간 내 아들…이토록 고마운 아들놈이, 제 부모를 존경한다면서 자기도 목사가 되겠다고 한다.

낮엔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이면 또 야간으로 신대원을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틴에이저 나이에는 부모의 속을 썩인다고 울상들을 짓는데 내 아들놈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내 속을 썩여본 적이 없는 장한 놈이다. (자식 자랑은 팔푼이라던가, 구푼이라던가? ㅋㅋ) 하나님께 감사함을 이렇게라도 고백하는 맘이다.

우리 교회의 식구님들이라면 우리 아들의 이런 장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하던 그 교회 담임 목사의 아들을 후임목사로 모시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담임에 대한 신뢰감이 자리한 때문일 것이고, 신뢰할 수 있는 목사의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자란 아들 목사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낯선 목사님보다 마음이 편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때는 담임 목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세습 그 허와 실

세습이란 사전적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세습(世襲,世習)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한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가)자손에 의해 대대로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자자손손 그 왕권이 세습돼 내려오다가 고종 황제 때 나라의 멸망과 함께 세습도 끝나게 되었다.

이런 안목으로 볼 때, 목회자가 대물림하는 것을 무조건 세습이란 용어로 비난 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세습의 정의가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물려받는 것이라면, 목회자의 가정에서 무슨 물질과 명예를 물려받을 수 있기에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 그 자체만을 놓고 세습이라 비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말이다. 

교회 재산은 분명히 아버지 목사 개인의 재산이 아니다. 재산이나 직위를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을 전수한다면,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구두 수선하는 아버지, 혹은 요즘 한창 인기 절정인 드라마에 나오는 극 중 인물, 김탁구, 그 아버지의 빵을 만드는 기술과 직업을 그 아들이 물려 받아 대대로 이어가는 것을 세습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하여 크게 칭찬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대를 이어 목사의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요 복된 자리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날,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수행하던 목사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되는가? 세습, 그 허와 실은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 보자.

1. 우리나라 특성상, 지금 한반도의 북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3대 세습의 부정적 이미지가 교회로 파고들어 온 때문일 수 있다. 국가 최고 원수의 자리에 애송이 청년 (20대 ~ 30대 초반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파랗게 젊은이가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3대 째, 권력의 최고위급으로 급부상한 데 대한 암묵적 반항심은 우리를 철저한 세습반대자의 입장에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다.

2.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 요인이랄 수 있는 1% 미만(그렇다. 확실히 1%미만일 뿐)의 대형교회 담임 목사들의 횡포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은 자신들을 글자 그대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착각하는 듯, 그들은 교회 재산을 사유 재산인양, 남용하기도 하고, 착복(?)하기도 하고, 그 아들들에게, 또는 부인에게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마구 물려주어도 좋은 것처럼 착각한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야 당연히 그 직분과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니 ‘세습’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3. 아버지가 피땀 흘려 이룩(?)한 교회를 이어 받으려는 것은 사명자의 자세가 아니라, 물량주의자로 변질된 자세일 뿐이다. 그런 마음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 안일한 길, 평탄한 길, 넓은 길의 목회를 하겠다는 것, 발람의 교훈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진정한 목회자라면, 교회 재산은 사유 재산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부르심’ 즉 위로부터의 calling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Calling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면 다음은 그분의 양 떼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그에게 부여되고 그 부여된 책임을 인지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명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부르심이나 사명의식이 없는 목사라면 교회를 하나의 기업으로 치부하게 되고 그 기업의 총수가 자신의 전 생애를 투자하여 이룩한 자산이랄 수 있는 기업체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자신의 아들을 지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거기다, 85 vs 14, 주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낸다면…ㅠㅠ. 그러나 그 99명 중 14명, 소수의 약한 목소리 속에서, 당신의 설곳을 빼앗긴 교회를 향해 탄식하시는 우리 주님의 아픈 음성이 섞여있음을 알아야 하고, 변질된 교역자를 향해서 우뢰처럼, 벽력같이 질타하시는 그분의 책망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야만 하지 않는가?

아들아, 광야로 가라

불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 가도 가도 끝없는 황량한 벌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바싹 메마른 땅, 시뻘건 모래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그곳, 끝없는 들판에는 짧고 앙상한 가시나무 떨기가 듬성듬성 어른의 주먹 뭉치만 하게 군데군데 엉겨붙어 있는 것 외에는 생명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그곳, 광야로 가라.

너는 오직 그곳에서만 하늘의 만나를 먹을 수 있고, 광야의 모진 가시 떨기 나무 아래서 너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광야의 불뱀과 전갈이 너를 해치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너의 앞길을 가로막는 홍해가 너의 간구로, 네 눈 앞에서 좌~악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곳, 그곳은 오직 광야에 들어섰을 때뿐이란 것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네온싸인이 휘황찬란한 곳에서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그곳에는 안일함과 평안함이 너의 영혼을 좀먹게 할 것 뿐이다. 아들아, 광야로 가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 8)“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 7-9)




글: 별똥별/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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