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아 2: 10절 말씀).” 아가서는 솔로몬 왕의 사랑노래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 노래야말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이 햇살처럼 곱게 퍼지며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영혼의 노래, 아름다운 나도향기를 발하는 샤론의 수선화 같이 고운 사랑, 우리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핏빛 사랑 노래임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듯, 필자는 아가서의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 그리스도의 그 절절한 사랑이 가슴을 파고들어 온 밤을 지새우며 감동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다.

모진 겨울은 영원하지 않다.

모진 겨울비가 그치고 언 땅이 풀리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시면 이 어두운 역사를 끝내고 주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미한다.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야가 구속 주로써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다. 그 주님이 이제는 고난의 주가 아니라, 왕 중의 왕으로, 심판 주로 재림하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봄날같이 우리 앞에 화사하게 펼쳐질 것을 예언해 주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 또한 같은 이치일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때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고 모질게 추운 겨울 날씨처럼 어렵고 고달픈 때가 있을 수 있다. 예기치 않던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되는 수 있고, 그런대로 잘 이끌어 가던 사업체가 한 순간의 실수로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도 있다. 건강에 적신호가 올 수 있고 가족간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 고통받을 때가 있다.

우리들의 가는 길은 언제나 화창한 봄날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 만큼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의 신부, 주님께로 사랑받는 자요, 주님이 어여삐 보시는 성도들에게도 겨울의 혹한 같은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닥쳐온 이 모진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새봄이 오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내면을 갈고 닦고 착실히 준비하는 기간임을 믿으며, 다가올 새봄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힘껏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격려의 음성이며, 영적 전쟁의 전투장은 그리 녹록지가 않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소망을 잃지 말고 힘써 싸우라 격려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라.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 2: 15절 말씀)” 여기에서 포도원을 허는 여우는 과연 누구인가? 영적으로 사단을 의미한다. 이 여우는 옛날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던 낙원에 들어가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어떤 여우를 잡아야 하는가?

1. 뒤를 돌아보는 여우를 잡아내어야 한다.

여우의 습성 중 하나가 뒤를 돌아다 본다는 것이다. 여우는 앞으로 잘 가다가도 뒤를 휘딱휘딱 돌아보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장망성인 세상을 한 번 빠져나왔으면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악습, 구습, 더러운 행습, 이런 것들에서 돌이켰으면, 그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키고 두 번 다시 뒤돌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여우가 들어온 것을 속히 잡아내지 않으면 그 여우가 나를 뒤돌아 보게끔 계속 충동질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성지 순례 길에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 사람 형상을 한 큰 소금 기둥 한 개가 세월의 풍상에 녹아내려 어슬픈 몰골에 더러운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 쓴 채, 초라한 모습으로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가련함을 보면서, 세상으로 되돌아 간 수많은 성도들이 떠올라 내 마음이 심히 어두웠던 기억이 있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의 지도하에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약속의 땅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이유를 들어보라. 모든 원망의 말 속에는, 그들이 방금 빠져나왔던 애굽을 뒤돌아보며 그 노예생활을 그리워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의 병폐로 떠오르는 것 역시 뒤를 돌아보는 나쁜 습성 때문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로, 한 번 빠져 나온 죄악 세상을 되돌아가고 싶도록 유도하는, 뒤를 돌아보는 여우가 내 마음속에서 자리잡지 못하도록 속히 몰아내야 앞으로 전진이 가능하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9: 62절 말씀)."

2. 유혹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여우의 또 다른 습성은 간사하고 교활한 것이다. 여우가 짐승 중에 가장 교활하고 간사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여우는 하룻밤에 열두 번도 더 변한다고 한다. 사단 마귀의 속성이 그렇다. 사단은 변신의 명수다. 사단이 나타날 때, 내가 사단이다 하고 나타나면 누가 넘어지겠는가? 뱀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용으로 변하기도 하고 광명의 천사로, 아름다운 절색 가인으로 가장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정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어 한 번 재미를 본 사단은 지금도 영적인 낙원인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고 가정에 들어가서 파괴의 역사를 조장시킨다. 그는 광명한 천사로 변신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 ‘드릴라’로 변신하기도 하고, 거짓 선지자, 거짓 능력자, 거짓 치유사역자로 변신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영혼을 사냥질 해 가는 것이다.

삼손에게 나타난 사단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여인 ‘드릴라’였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삼손은 그 유혹의 여우를 잡아내지 못해 일생을 망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건장한 남자가 두 눈을 다 뽑히고 목에 맷돌을 매달고, 두 발은 죄악을 상징하는 쇠사슬에 묶여 버렸다. 이런 슬픈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하려 함이니(고전 10: 5절).” 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다서 1: 7).”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삼으라고 경계해 주신다는 것이다.

유혹이란 것은 처음에는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고전 6: 12-20절 참조) 돈의 유혹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 10절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지만 여전히 돈을 사랑하다 믿음에서 떠나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 심하면 목숨까지 끊어 버리는 것이다.

하늘나라에도 품계(品階, rank)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권고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국 시민이 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기에 그는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겼다. 모든 것이 거울로 주셨음은 영적인 이스라엘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늘나라 시민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 의지해서 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리의 의나 옳은 행실이 첨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국 시민권자들에게도 품계(品階)가 있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리라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눅19:16-19절 말씀)."

주님은 열 고을 권세 자와 다섯 고을 권세 자를 나누시겠다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열 고을 권세 자와 다섯 고을 권세 자가 같은 품계(rank)라 볼 수 없다. 분명, 주님의 나라에서도 그 종의 충성 여하에 따른 품계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천사장 미가엘을 선두로 천사들이 각종 임무를 맡아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받들어 섬기듯, 우리 구원받은 백성 또한 품계(品階)가 있다고 성령께서 오늘 아침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며 전하라 명하셨다. 부활한 육체도 그 아름다움이 모두 다르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1절 말씀).” 성도들이, 심지어는 가장 올바른 자세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목사님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속에 파고들어오는 유혹의 여우를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가르치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이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치유사역 등등…번영신학에 물들어 그쪽 방향으로만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날,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예수쟁이들이 뻔뻔스럽다고 손가락질 한다. 무엇 때문인가? 오늘 죄짓고 내일 회개하고 다음 날 또 그 죄악을 여전히 짓는 파렴치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일은 또 왜 일어나는가? 구원과 죄와 상관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만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때문이다.

물론, 구원 받는 조건과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시민권자들에게도 엄연히 따르는 보상도 다르고 품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구원에도 영광스러운 구원이 있고, 불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도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고전 3:13-15절 참조). 이런 사실만 분명히 알면 성도가 죄와 더불어 짝하기보다 죄를 멀리 하고 그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기려 할 것이다.

우리는 내 교회에, 내 가정에, 내 마음속에, 가만히 들어와 우리를 유혹하며 우리의 수고를 부끄럽게 만드는 저 여우를 잡아야 한다. 한순간의 유혹이 영원토록 부끄러운 수욕을 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때가 임박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읽고 바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많이 배출되도록 우리 모두 힘을 다해 중보기도 해 주어야 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리라(단 12: 3절 말씀)." ,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 13- 15절 말씀)." (마 5:19, 마18:4, 마20:20~28, 마23:11, 눅9:48,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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