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속에 대한 교육적 통찰 - 1) 십자가에 진실함 죄의 철학 / 챔버스의 글들

  

2. 구속에 대한 교육적 통찰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9:14).

 

1) 십자가에 진실함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성령께서는 우리를 더욱 성경의 중요 주제로 이끄신다.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의미이다. 우리 자신에 관한 권리 주장은 그 어떠한 모습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단번에 제거되어 다시는 나타나서는 안된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더 깊게 깨달을 수 있도록 교육 받도록 하자. 십자가와 우리의 관계는 삶에서 뿐만 아니라 생각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어찌 .

 

거듭남으로 거룩하여진 후에 알아야 할 것이 얼마나 더 있는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깨끗하여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 우리는 십자가로 인도함을 받았고 십자가를 통하여 성결하게 되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나님을 넘치도록 섬기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된 이후의 성도의 특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서 계곡으로 내려와 그 계곡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깨어지고 찢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리 주장을 위하여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영적 축복을 누리기 위함도 아니다. 우리는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하여 이곳에 있다. 그 목적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진리를 정확하게 깨닫고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여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성이 예수님의 속성을 닮게 만든다. 그래서 점점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간다.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과거보다 오늘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죄로부터 놀랍게 해방되는 그 기이함과 사랑과 찬양에 푹빠지기 시작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닮아가면서 주님의 가족으로서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피가 .

 

이 피는 순교자의 피가 아니다. 염소나 송아지의 피도 물론 아니다. 흘리신 피는 그리스도의 피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 세상을 위하여 희생된 것이다. 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표현을 보라! ( 20:28). 완벽하신 하나님의 모든 근본적인 속성들이 그 피에 다 들어있다. 인류는 그 피에서 가장 거룩한 것들을 모두 확보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속성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깊은 죄의 자리까지 닿을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이러한 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없는 영적 차원이다. 십자가 상의 그 절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7:46)는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고통의 절규를 조금이나마 그 근처까지 가 본 사람이 누구일까? 순교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버려져 죽게 된 외로운 선교사도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를 버렸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기에 놀라운 기쁨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맛본 자가 있다면 아마 가인 같은 자들일 것이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4:13). 혹은 에서와 같은 자이다.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 27:34). 또는 가롯 유다와 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어떤 인간보다 깊게 경험하신 분이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순교자였다면 우리의 구원은 신화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절규가 의미하는 바,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지옥과 저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죄와 일치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매우 간교하게 조작된 신화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이 절규의 깊이는 그 어떤 사람도 헤아릴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절규는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온 절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얻은 구원의 깊이와 높이는 오직 보좌에 않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또한 지옥의 중심까지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측량하실 수 있다. 매우 경건하게 보이는 신자들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이 위대한 주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본다. 오직 십자가 앞에 서는 자들만이 모든 경건의 모양을 벗을 수 있다. 당신은 현대의 정신에 물들어서 십자가를 단지 죄로부터의 구원 및 거룩의 본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거룩케 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자. 그러나 또한 감사할 것은 구원과 거룩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불하셨는가를 깨닫도록 하는 통찰력을 감사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를 일치시켰던 하나님의 맥박은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나아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열정을 준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삶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묘사한다. 성령께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어떠하실 지 우리는 안다. 예수님의 깊은 의식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친히 계셨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행위 뒤에는 영원한 성령이 계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성령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사이에는 유사점도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영원하신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성육신하셨지만, 우리 안에서는 결코 성육신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 하고 거룩케 하심으로 우리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 속의 깊은 의식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 ( 3:3).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벽하게 성육신하셨던 영원한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예수님의 죽음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게 하신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19).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

 

자신을 드린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흠이 없으시며 완벽하게 깨끗하시지만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순교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개념을 단번에 제거한다. 주님은 순교자가 근처도 갈 수 없는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은 의인의 죽음이 아니라 악인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그분의 마음 속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대속적인 고통이 있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이나 입다가 자기의 딸을 희생제사로 드리는 사건을 대할 때 불쌍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불쌍하다는 차원에서 보면 안된다. 주님의 희생은 우리의 연민을 초월하는 차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그를 불쌍히 여기는 감상보다 훨씬 무한하게 심오한 차원의 것이다. 이는 너무나 깊어서 우리에게 신비한 영역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마귀에게 영감을 받은 자들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다. 주님은 인류의 끓어오르는 미움을 한 곳에 모아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성령을 의지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 주님은 성령으로 사셨듯이 성령 안에서 죽으셨다.

 

우리는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선포함으로써 십자가에 진실하여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 하나님의 타오르는 강렬한 거룩을 망각하면 안된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을 먼저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이 선포되면 사람은 죄책감을 느낀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 죄를 드러낸다. 성령께서 심하게 죄를 책망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이라도 감히 죄를 용서하실 수도, 죄를 용서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속죄함이 없이 죄를 용서하신다면 사람들의 의분이 하나님을 정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과 함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한 용서의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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