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신조 2012. 11. 2. 02:28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3. 3부로 구성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내용적 특성

1부(1-11장)에서


인간의 죄 속에서 비참한 모습을 오직 율법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점을 다룬다. 율법은 우리들의 죄성과 부패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율법의 제 2용법).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신자의 감사의 삶과 관련해서 율법의 3용법인 시민적/책망적/교훈적 용법을 강조한다.

루터는 '죄있는 인간은 율법의 망치로 두드려 맞기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율법과 복음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 있는 율법적인 면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동시에 은혜적인 면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 우리들은 죄의 형벌을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의 죄와 형벌을 깨달을 수 있다. 복음 안에는 은혜적인 요소와 율법적인 요소가 함께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뜻을 나에게 명령하시고, 그 뜻을 능히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죄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갈수록 은혜의 높이를 더욱 잘 깨닫게 된다. 인간이 죄의 비참함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율법 즉 십계명을 통해서 무엇이 죄인지를 안다. 인간이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은 인간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반대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미움이 우리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인간은 완전히 이룰 수가 없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다. 오직 성령의 빛을 받고 거듭난 사람만이 인간에 대한 이 통찰력을 가질 수가 있다.

2부(12-85장)에서

구원을 다루고 있다. 먼저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s)으로만 얻는 구원론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안에 있는 종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성령의 은밀한 역사하심으로 일어나는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2000년 전에 이루신 예수님의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역을 우리의 마음에 주관적인 믿음으로 실현시키신다. 성령이 우리를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게 함으로 예수님의 지상에서 이루신 구원사역이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 안에 새겨진다. 하이델베르그 문답은 성령이 우리 안에 죄를 깨닫게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깨닫게 하심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이 충만할수록 우리의 부패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다. 감사의 삶은 계명을 지키는 삶, 기도하는 삶이다. 성령의 체험은 무엇인가? 첫째는 죄에 대한 애통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것이다. 곧 성령 충만은 기도의 영이 소생하는 것이며, 결국은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나타난다.

로마 카톨릭은 거룩함을 구원의 조건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거룩함은 구원의 결과임을 말한다. 로마카톨릭의 이 같은 교리로는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구원의 조건으로 거룩함만을 강조하면, 우리의 모습은 더욱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루터는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불안과 두려움이 더욱 가중되었다고 고백했다. 인간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다. 도리어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있고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3부(86-129장)에서

감사의 부분이다. 첫 번째 감사의 부분은 십계명을 따르는 참된 선행이다. 참된 선행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감사의 표현 방법이다. 십계명을 따르는 것은 감사의 표현이다. 하이델베르그 문답은 신자의 삶을 우선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이해한다. 개혁주의 신자의 삶은 울법적인 삶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는 삶이라는 것이다. 즉 율법의 참된 의미인 사랑을 이루는 삶이다. 십계명은 신자의 삶의 가이드라인과 같은 것이다.

십계명을 다루는 데 있어서 114항에 보면 '하나님께 회개한 사람이라면 이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질문에 대답이 '아니오.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순종을 시작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마지막에서는 십계명을 결국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개혁주의 성화론의 특징은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성화의 불완전성도 강조한다. 왜 그런가? 로마카톨릭의 비난은 개신교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이 개신교 신자들을 방종과 나태함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답의 초두에서 신자의 거룩함(성화)의 중요성을 먼저 강조한다. 그러나 성화가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로마 카톨릭의 견해에 대항하여 성화의 불완전성을 또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완전히 거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완전한 거룩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칭의)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완전하신 의로움이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보수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화의 불완전성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성향은 개신교 교인들에게 우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깊이 심어주었다. 이것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패배주의적인 신앙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화의 불완전 개념은 도리어 우리가 현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도리어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기 쉽다. 이에 대한 반발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을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 따라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로서 개혁주의 신자들에게 새로운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러므로 성화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개혁주의는 이것을 지혜롭게 적용해야 한다. 성화의 불완정의 개념에 대한 장점은 우리에게 겸손의 자세를 배양한다.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삶을 산다고 할찌라도 '나는 완전하다.'라고 말한다면 교만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비록 아무리 거룩하지 못한다 할찌라도 예수님의 거룩함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겸손한 죄인들을 받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성화에 대한 패배주의적인 신앙을 탈피하여 지혜롭게 성화의 불완전성을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 감사의 부분은 기도다. 김사는 기도의 바탕이 된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구원의 감격을 체험한 사람은 감사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권세를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아직도 무엇인가 충분히 받지 못해서 무엇인가를 얻고자만 기도를 한다면 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기도는 감사로 충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조건들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감사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이델베르그 문답은 우리의 삶의 실존적인 갈급함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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