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전4권 중 제1권)

하이델베르크 신조 2013. 7. 24. 18:24

출처:  http://sybook.org/newsletter/read.asp?ccode=503&No=55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전4권 중 제1권)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교의학)

 

드디어 김헌수 목사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서가 나왔다. 400년이라는 요리문답 설교 역사를 지닌 외국의 개혁파 교회의 목사들은 이미 많은 강해서를 출판하였다. 개혁교회의 역사가 길지 않은 이 땅에서 우리 목사의 설교와 작업의 결실로 나온 포괄적인 첫 강해서이기에 그 의미가 크며,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다.

  

장로교회도 개혁교회이다. 그렇지만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요리문답 설교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가한 청교도 목사들은 대소요리문답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의 교리, 예배와 교회 정치에는 인간의 전통이 지배하고 성경의 가르침에서는 벗어났다고 투쟁하였다. 이 투쟁 과정에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도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고, 결코 설교단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졌다. 이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은 설교의 본문이 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요리문답이 잊혀지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러나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는 요리문답이 비록 인간의 작품이지만 말씀의 복창이요 성경 교훈의 요약이라는 입장에서 매 주일 설교하는 전통을 교회법적으로 확립하였다. 그 결과로 개혁교회 교인들은 자신의 비참과 그리스도의 구원과 감사의 삶을 잘 안다. 이 삼중 지식은 요리문답의 제1문이 말하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몸도 영혼도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위로를 알고 고백하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보혈로 우리를 비참에서 해방하심으로 아버님의 사랑과 성신님의 확신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심이 위로의 내용이다. 그래서 저자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이심을 부제로 삼았다.

  

저자는 2006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을 내면서 요리문답 교육, 특히 요리문답 설교를 반대하는 의견을 염두에 두고서 그 필요성을 세 가지로 차분하게 반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였었다. 저자는 본서에서 이 세 가지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첫째로, 목사 개인의 한계와 성향에 좌우되는 강해 설교와는 달리 성경의 교훈을 요약한 요리문답을 설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오직 성경’은 ‘성경 전부’라는 확신이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위로 전부이시다(33). 이 때문에 비참함도 전체적이며, 타락도 전체적이라고 해설한다(40; 380). 이 확신을 따라 저자는 성도가 성경을 전체로 받아들여 참된 믿음을 갖도록 돕고 있다(178).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구속·성화의 사역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전부 받든지 아니면 전부 잃게 된다고 단언한다(201).

  

나아가 성경의 일부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받고 믿고 따르는 교회가 개혁교회라고 정의한다(381). 개혁교회 목사인 저자는 성경 전부를 균형 있게 정리하여 개혁교회 교인들에게 잘 가르친다. 성경과 예수님의 사역에 인간의 생각이나 제도를 더하거나 부분적으로 가르치면 항상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성경의 교훈을 떠나 예수님의 사역에다 인간적인 공로를 더하는 것이 로마 교회의 역사에서 잘 나타난다(265 이하). 현재에도 복음에다 무엇을 더하여 복음을 부인하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을 지적하고 경고한다(271 이하).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위험으로는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재세례파를 든다. 이들은 육신 자체를 죄의 본질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육신은 하늘에 속한 육신이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탄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선한 창조를 부인하고 기독론도 부분적으로 가르치고 유아세례도 부인한다(380-1).

  

둘째, 요리문답 설교는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 본서는 위로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성도가 살아가야 하는 삶을 잘 보여 준다. 즉 믿음의 내용을 잘 설명하면서 그 믿음대로 살도록 인도하는 실천적인 배려도 잊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포괄적인 은혜를 베푸시려고 비참함과 죄의 깊은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면 성도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이것은 사람인데도 짐승처럼 싸우는 사회와는 다른 언약 백성의 모습이다(51 이하).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는 가정을 아름답게 가꾸며, 사회에서도 모범적일 수밖에 없다.

  

요리문답 설교가 신자들을 신실하게 살도록 이끈다는 구체적인 예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설명에서 잘 나타난다(91 이하).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의 기능이나 종교적이거나 지적 능력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역동적으로 가르친다. 즉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이 먼저이고, 그 사명을 이루도록 주시는 자질은 뒤따라온다. 또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심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사회적 특성도 이끌어낸다. 또 그리스도의 삼직(三職)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삼직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빌어 직분을 설명하는 것이 아주 돋보인다(308 이하).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분자라는 것을 가정생활에서 잘 보여 주고, 나아가 교회의 직분도 설명하면서 한국 교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을 닮은 성도로 이루어진 사회이다(206-210).

  

셋째로, 요리문답에 요약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기여한다. 징계를 받고도 승복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옮겨 가는 것은 ‘교회적 믿음’을 버리는 일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지 않으니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고,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는 보편적 교회도 하나이다(186).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연합한 사람은 말씀의 직분자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187; 289).

  

저자는 이전에 밝힌 대로 요리문답 교육이 지닌 세 가지 유익한 점을 신실하게 설교하였고 잘 정리하여 책으로 선물하였다. 그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신실하고 의롭다.


이와 연관하여 저자가 사용하는 ‘파악의 태도와 경배의 태도’라는 용어가 눈길을 끈다(162; 198). 삼위일체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이단의 중요한 특징으로 합리적이고 사변적인 설명을 든다. 교회사에서 교인들이 이런 ‘파악의 태도’를 물리쳤다고 말한다. 교회사를 사상사(思想史)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로 보는 역사 이해가 그 배경에 있다. 물론 위대한 신학자들이 이단의 잘못을 잘 지적했지만, 교인들이 ‘구원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믿었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중보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배의 태도’를 취한다. 이단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비도 다 분석하여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파악의 태도를 지녔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것을 믿고 ‘세 하나님의 한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는 ‘경배의 태도’를 취한다. 이런 성도는 결코 오만하지 않을 것이다.

  

곧 저자는 요리문답을 사용하여 오직 성경을 전체적으로 가르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성도들이 갖게 하고, 이 믿음을 따라 삶이 변화되며, 말씀 앞에 겸손하도록 인도한다. 혹 어떤 독자들은 본서를 너무 무게가 나가는 딱딱한 책이라고 평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독자들은 성경 전체를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인 이름뿐인 강해 설교에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참된 믿음은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이다. 신뢰하면 확실한 지식에도 이른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그분을 확실하게 알려고 애쓴다. 이것은 동시에 객관적 지식만으로는 믿음이 빈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보여 준다.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는 하나님의 향한 전인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다. 저자는 예배에서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받을 때에 확실한 지식과 굳은 신뢰도 생긴다고 강조한다(181). 이 공적 예배가 약화되면 신앙이 개인주의적이 되고 삶도 힘이 없어진다고 한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이 점에서 저자가 독립개신교회의 찬송을 인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요리문답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론으로 가르치지 않고 성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것은 성경 말씀의 가르침이요 예배 끝에 선언하는 복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먼저 나온다(24). 성자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알고 또한 성자를 통하여 성신 하나님도 안다. 그러면서 저자는 독립개신교회의 『찬송』에 나오는 경배송 XXXI을 인용한다. 1절은 ‘우리 주님 예수님 나를 이뻐하시니’로 시작하고, 2절의 ‘내 아버지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니’를 거쳐, ‘보혜사인 성신님 나를 인도하시니’로 3절이 시작한다. 이처럼 계시와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찬송을 통해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시편의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다. 동시에 이런 찬송을 부르는 이들에게 본서가 결코 어렵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가 아주 평이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아주 신실하게 요리문답을 가르쳤다. 특정 청중이 아니라 성인과 어린이를 모두 포함한 회중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저자의 언어 사용은 간결하다. 그러면서도 전달하는 내용은 아주 알차다. 원래의 청중을 잘 배려하였다는 증거이다. 교사로서 청중을 배려하고 소통과 전달에서도 성공했다. 아이들에게 참된 지식과 거짓 지식, 기독론적 삼위일체가 조금 어렵겠지만, 숙제에 대한 답을 보면 이들도 위로를 삼위 하나님 안에서 찾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25).

  

본서를 보면 저자가 말씀을 깊이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요리문답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 본문을 아주 깊이 궁구하여 그 깨달음이 깊고 넓다. 간혹 필요하여 성경 원어를 직접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 성경 말씀을 원어로 읽고 준비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성도의 선지자 직분은 주님을 고백함이라고 설명하면서 부인함과 시인함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0:32-33절을 인용한다(306). 저자는 언급하지 않지만, 시인함이 고백이다. 이는 원어를 알지 못하고는 인용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 삼위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세례 받는다는 번역은 원문을 살린 정확한 번역이다(194-211). 세례가 삼위 하나님과의 접붙임, 곧 연합이기 때문이다. 세례의 성격을 잘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변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깨닫도록 인도한다. 저자는 삼위일체론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역사와 신학』에서 언급한 바가 하나 더 있다. 즉 매년 같은 주제로 설교하면 자칫 판에 박힌 ‘지루한 설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비판이다. 이미 그때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바르게 깨달은 자에게는 자주 시행하는 성찬도 지루하지 않지만,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한 번의 성찬도 지루할 것이요, 요리문답의 내용을 바르게 배우지 않은 사람은 요리문답 설교가 지루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한다고 반박한다.

  

저자는 이 점에서도 성공했다. 깊은 말씀 이해와 성경 전체라는 포괄성, 그리고 간결한 문장력과 실천적인 배려 등으로 본서는 딱딱하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다. 저자는 이미 요리문답 전부를 5회나 강해했다(8). 이 땅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의 선구자이며, 경건 서적의 새로운 장르를 계발하였다. 한국 교회 안에는 ‘절기 설교’에 부담을 갖는 설교자들이 많다. 절기의 독특성은 말씀 선포에서 편파성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른바 ‘헌신 예배 설교’에도 해당된다. 이런 상황에서 요리문답 설교가 지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을뿐더러, 본서는 그런 기우에 불과한 반대를 말끔하고 멋지게 씻어 낸다.

  

앞으로 독립개신교회의 신학교에서 교의학을 강의할 저자는 본서에서 교의학적 주제들을 아주 잘 다루고 있다. 이미 말한 삼위일체론과 기독론과 하나님의 형상론 외에도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직분론 등의 주제를 이른바 ‘교의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말씀의 해명으로 녹여 낸다. 좋은 교의학자의 자질이 있고 충분히 훈련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신학의 길이다. 설교로 하나님을 말하고, 그 하나님을 교인들이 본받아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유일한 위로를 받아 살아가는 신학의 길이다. 이런 설교에서 진정한 신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범적으로 보여 준다.

  

어디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에 저자에게 당부하는 식으로 서평을 마치려고 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기독교 학문 운동을 초기부터 주도하다가 목사가 되었다. 본서는 이 운동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기초도 잘 놓았다. 바로 직분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저자는 이 형상을 가정과 교회 안에서 설명한다. 아쉽게도 첫 권에서는 가정과 교회 밖에서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계속될 요리문답 설교와 다른 저작에서 이 빚도 꼭 갚아서 교회에 기초한 개혁 신학이 포괄적인 문화 운동의 주체라는 것을 보여 주기 바란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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