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적 사고 (Christian Thinking) - 1) 구속 주의 형상을 본받아 / 챔버스의 글들 스데반 황 역

 http://blog.naver.com/thebloodofx/20101151435

 

 

1. 기독교적 사고 (Christian Thinking)

 

< 주님 보여주시는 높이까지 오를 수 없어도

주님 계시하는 깊이까지 내려갈 수 없어도

높은 것은 알수록 좋고

깊은 것은 느낄수록 좋다. > - 진 인젤로 (Jean Ingelow (1820-1897), 영국 시인이며 소설가)

 

기독교적 사고에 있어서 가장 안전한 자세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더 깊은 깊이가 있다는 것과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높은 높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를 공손하게 만들며 자신에 갇혀 옹졸한 마음으로 강퍅하여지는 것을 막아준다.

 

사고(Thinking)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자연적인 생명이던 영적인 생명이든 생각으로 생명이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적 사고란 종교적인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건을 근거로 하는 사고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하지만 사건을 근거로 하여 사고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건들이 발생하면 혼동에 빠진다. 만일 기독교적 사고를 하기 원하고 또한 개인적인 체험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기 원한다면 영적인 훈련 뿐만 아니라 지적인 훈련도 해야 한다.

 

1) 구속(Redemption)

 

< 내게 복음이란 단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정욕으로 가득차고 교만과 질투와 악의와 미움과 자기 의로 가득찬 나에게, 모든 비참을 다 당해야 마땅한 나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성령의 중생케 하심과 깨끗케 하심은 단지 내가 거부할 수 없는 복음이다. 나는 여자로부터 난 모든 죽을 영혼들이 왜 동일하게 불가항력적인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  - 파스칼

 

구속은 기독교 믿음의 가장 위대한 외부적 사건이다. 구속은 각 개인의 구원의 체험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사고의 바탕에도 영향을 끼친다. 구속의 계시가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곳에 오셔서 십자가 상의 죽음을 수단으로 하여 모든 인류를 구속의 바탕에 둠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요 17:4).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신 것인가? 세상의 구속을 이루셨다. 사람들은 구속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구속 받았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이는 당신과 나의 개인적인 구원을 이루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속의 바탕 위에 서게 되었다는 뜻이다.

 

당신은 구속을 믿는가? 당신이 아는 가장 악한 사람을 생각해 보라. 조금도 애착이 가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라. 당신의 삶에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 가시 같은 사람을 떠올리라. 가장 비열한 사람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사고를 시작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정말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악한 사람을 만날 때 .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라고 말은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 속에는 그에게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불신앙이 우리 주변의 영혼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마 13:58). 그러나 자신의 더딘 믿음을 극복하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게 되면 그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을 전달하는 발전기가 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무도 예수님의 유일한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당신은 구속 위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죄와 잘못들을 방관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살시키는 것은 아닌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8). 즉, 구속에 기초한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아직 자신들이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자들이 깨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

 

우리는 구속의 계시와 중생의 체험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은 체험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 때문에 살아있다. 마찬가지로 구속 그 자체는 체험이 아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중생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인간의 속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곧 그 사건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구속은 사람이 의식하는 차원을 훨씬 초월한다. 구속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주를 위한 것이며 물리적인 이 땅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죄와 마귀가 건드려서 망가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전하게 구속된 것이다. 구속이 현실 가운데 완전하게 드러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새로운 인류와 함께 새하늘과 새땅이 임하는 날이다. 만일 구속과 중생을 혼동하면 우리는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생의 체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지만 이 중생을 가능케 한 구속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구속의 위대한 계시적 사건을 설명하면 오해를 한다. 각 사람이 체험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체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놀라움과 경이함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성경은 인생의 깊은 저변에 흐르는 근본적인 것들을 다룬다. 이러한 근본적인 것들 중에 하나가 모든 사람에게는 죄의 성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연대(solidarity)라는 의미는 입장이 같다는 뜻이다. 인류의 연대성이라는 표현은 인간 생명의 저변에는 공통적인 연결이 있다는 뜻이다.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연결은 죄의 유전을 말하는 것인데 이 유전은 마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롬 5:12).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롬 6:6)이라고 말할 때 그는 죄의 유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속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성향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며, 우리의 옛사람에 의하여 연결된 죄의 본체로부터 끊어지게 된다. 즉, 우리는 완벽히 그리고 온전히 죄의 성향과 굴레에서 구원 받게 되는 것이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롬 6:18). 죄의 보편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구속의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구속이 다루는 것은 각 개인의 죄악이기 보다는 전인류의 죄다. 즉, 죄의 유전이라고 불리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다룬다. 가짜 복음주의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따로 떼어내어 그것을 구속이라고 부름으로 구속의 의미를 왜곡 시키고 있다.

 

기독교적 사고의 기반은 하나님께서 죄의 유전으로 인한 저주의 가능성으로부터 세상을 구속하였다는 사실이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고후 5:19). 계시에 해당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형벌을 받으셨다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책임을 묻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죄의 성향을 물려 받은 것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내 자신의 출생 및 죄의 유산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만일 잘못된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내게 책임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잘못된 성향에서 건지시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알고도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이 빛을 보고도 어두움을 좋아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참조, 요 3:19).

 

상식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당신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결코 분별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신대로 되돌려 놓으시기 위하여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알게 되면 당신은 구속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구속의 가장 놀라운 계시는 구속은 모든 사람을 속죄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깨달으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제자도는 구원을 얻는 것과 다른 문제다. 자기 자신을 준비하여 제자도의 조건을 만족시킨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일들이 이 세상에 있다. 구속을 바탕으로 하여 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나의 삶은 현실 속에서 제자의 삶을 살게 된다. 즉, 나는 예수님의 생명을 나의 죽을 육체를 통하여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샘명수 쉼터/한아름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