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의학(헤르만 바빙크)

 본 책에서는 역사적으로 또는 교리적으로 종교개혁 시대 이후부터 19세기에 이르기 까지 개혁주의의 특성이 어떻게 변천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21세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의 개혁주의는 역사적인 전통도 없이 교리적으로 난무한 개혁주의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본 책을 정리하면서 역사적으로 바른 개혁주의적인 특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예정론에 대한 고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치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이미 독일 종교개혁과 스위스 종교개혁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1529년 Marburg에서 평화 조인되었으나 다만 서류 위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리고 츠빙글리가 죽고 칼빈이 루터의 존경과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 그에게 가까운 접근에도 츠빙글리의 편에 서 있었을 때, 루터주의 개신교와 개혁주의 개신교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커져 있었으며 그것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새시대가 되어 둘 사이의 특징적인 구별에 대한 역사와 연구들이 거기에 원리에서부터 기초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음을 명백히 증명하였다. 저자가 언급한 이런 차이점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될 때 보다 엄밀한 개혁주의 노선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중요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되기도 한다. 개혁주의자는 신론적이며, 역사 안에 서서 머물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까지 끌어 올라가며,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이루시느냐?"을 언급한다. 이것은 또한 이교주의, 우상에 반대하는 싸움이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의 원인을 추적하며 앞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터주의자는 인간론적이며, 구원사의 중심에서 취하고 더 깊이 하나님의 성정에까지 꿰뚫고 들어감을 필요치 않으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이고 항상 출발하는 조항이고, 이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는 것이다. 또한 유대주의, 행위 거룩에 반대하는 싸움이요, 현상에 만족하고 그가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점은 작은 차이가 아니라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됨을 배울수 있다. "인간중심"인가 ? 아니면 "하나님" 중심인 ? 가의 중요한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도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즉 개혁주의는 위의 사상에 입각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표로 우주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주의 교의학에 있어서 중요한 출발점은 쯔빙글리와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이다. 쯔빙글리의 근본사상은 다음과 같다. 신학적 출발, 인간의 완전한 의존성, 예정, 그리스도의 인성, 교회와 성례의 영적인 견해, 종교 개혁의 윤리적 정치적 의미등이 그에게 이미 현존하였다. 이런 그의 신학의 약점은 그의 사상의 판명성과 명료성이 깊이에 있어서 결여를 메꿀 수 없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하나도 완전하고 종합된 체계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개혁주의 교의학은 쯔빙글리를 시작으로 이것을 체계화시킨 칼빈으로 넘어간다. 칼빈은 모든 철학적이고 인문주의적인 이념들을 청산하고 가능한 한 엄밀하게 성경과 결합시켰으며, 그리스도적인 종교의 객관성,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경, 교회와 성례에 관한 객관성을 주장하였고 따라서 강하게 재세례파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육과 영 사이의 츠빙글리의 대립성과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루터의 대립을 극복하였고 단 하나의 견해에도 금욕적인 점이 없었으며, 그리스도적인 삶과 결합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칼빈은 계속해서 성만찬 이론과 예정론을 독자적 입장에서 끌어들였다. 이후에 베른은 제네바, 취리히, 바젤, 샤펜하우젠의 입장과 똑같이 칼빈과 관계하고 있다. 이 16세기 스위스의 교의학은 전체적으로 칼빈의 정신안에서 Beza의 신학논총(Tractationes theol 1570), Petrus Martyr Vermiglius의 보편 교의논제들(Loci communes, 1576), Muscullus의 보편 교의논제들(Loci comm. 1560, 1567), Aretius의 신학문제들(Theol. problemata 1579)에 의해 다루어 졌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은 스위스로부터 프랑스로 확장되었다. 1536년 "기독교 강요"를 한 서문을 가지고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하였고 프랑스 종교 개혁을 목적하기도 했다.

 

이 세기에 뛰어난 프랑스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Chandieu 159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de verbo Dei), 그리스도의 제사직에 관해서(de Christi sacerdotio), 속죄에 관해서(de remiddione peccaorum)

 

Marlorat 1562--> Feugueraeus에 의해 1574년에 편집된 사실과 교의들의 보편논제들로 엮은 성경보전(Thesaurus S.Scripturae in locos comm. rerumet dogmatum)

 

du Plessis Mornay 1623--> 교회론 논고(Trait de I'Eglise 1578), 기독교 진리에 관한 논고(Trait de la verite de la religion, 1581), 부패의 신비 다시 말하면 교황주의 역사(Le myste re d'iniquite c' est a dire lhistoire de la papaute 1611)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칼빈주의가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것은 로마 카톨릭과의 투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를 통하여 기도되었던 종교개혁과의 갈등이었다. 메리 여왕 아래서 대륙으로 피신 온 종교개혁 성향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칼빈, 불링거, 마르티르 등의 교리와 친밀하게 되었고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영국 종교개혁에 고심하였다. 교리에 있어서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도들은 근원적으로 하나인 특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영국 국회의 신학은 왕정회복의 17세기 초기까지에는 칼빈주의 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대학들에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가르쳤다.

 

영국의 개혁주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장로교회적 형태의 케임부리지 교수 Thomas Cartwight가 1570년에 해임되고 1603년에 사거였으며, William Perkins1602, William Whitaker1595 가 엘리자베스 자문관인 Whitgift에게 제출하였던 람베스 9개항안에 예정론을 고집하고자 했으나 고위성직적이고 펠라기우스적인 견해들이 승리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빈주의가 죤 낙스(John Knox1572)와 죤 크레이그 (John Craig1600)를 통하여 강하게 영향을 끼쳤고, 궁극적으로 1581년 왕을 통하여서도 공인되였다.

 

독일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적지않게 칼빈에게 의존적이다. 그 신학적 특색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Pareus, Ursinus, Olevianus, Hyperius, Boquinus, a Lasco의 신학은 많은 점들에서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였다. 또한 Prof. Gooszen교수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대한 구 연구서들(1890,1893)과 Dr. Van‘t Hooft의 불링거의 신학(De Theol. van Heinrich Bullinger, 1888)을 통하여 취리히의 츠빙글리의 계승자로부터 그것에 관한 결론이 아주 잘 내려졌다. 하이델베르그에는 Ursinus, Olevianus 곁에 엄격한 칼빈주의자인 Zanchius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미 16세기 말쯤에 개혁주의 신학내에 스콜라주의적인 방법이 생겼다. 우리가 칼빈, 히페리우스, 쏘시니우스에게서 직면하는 대로 교의들의 단순한 취급은 계속해서 불만적이었다. 이 시대의 개혁교회에서는 교의학이 학술적인 방식으로 취급되었다.

 

17세기와서 영국에서는 고()교회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확실한 지반을 얻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감독주의를 옹호하면서 칼빈주의에 머물렀던 많은 신학자들이 영국국교회 안에 있었다.

 

영국에서는 국교 반대자들 사이에서든 영국 국교회주의자들 사이에서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큰 영향을 끼쳤다. 그와 더불어서 프랑스에서 아미랄드주의가 영국에 전해졌다. 두 사상은 종종 함께 흐르며 중요하고 지루한 논쟁에 동기를 주었던 신 율법주의의 이론에 있어서 그들 사이에 연합을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에 관련하여 영국신학의 중심점은 교의적인 연구에 있지 않고, 성서적이고 교회사적이며 교부학적이고 고고학적인 실제적인 연구에 있다. 저절로 정치적이고 교회적인 관계들이 거기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비교적 좀더 풍부하고 강한 교의적인 생명력이 스코틀랜드에 있었다. 여기에서는 칼빈주의가 적절한 터를 발견하였고 엄밀하고 긍정적인 정신안에서 좀더 발전되었다.

 

이런 개혁 교의학의 긍정적인 발전은 확실한 의미에서 도르트회의 결정들(1618-19)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1646), 스위스 공동고백(1675), 발크 신앙조항들(1693)에서 그 절정과 동시에 궁극점에 도달 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적 형태들은 후대에 칼빈으로 시작해서 17세기 까지의 중요한 개혁주의적 독특성을 결정하게 해주는 중요한 신학적 발전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중요한 신학적 발전 뿐만 아니라 반대적으로도 17세기에 이미 개혁주의 신학을 훼파하고 몰락시킨 원리들이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주의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종교개혁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문주의자들 즉 윤리 종교적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적이고 심미적인 원리에 의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학에 저항하였고 그로 인하여 헬라 로마문화의 부흥에서 인간의 조화적인 발전을 위한 한 방도를 보았던 자들 이외에도 다른 두 가지 분파들이 일어났다. 즉 그들은 바로 스위스, 네델란드, 영국,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에 모든 시대를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재세례바들과 소키누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신비적이고 합리적인 요소들을 종교와 신학 안에 현실화시켰다. 소키누스주의는 자연과 은혜를 궁극적으로 완전히 결합하였던 모순대당 관계로 바꾸었다. 재세례파들도 같은 근본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즉 자연적인 것과 초 자연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은 서로 조화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소키누스주의는 자연을 위해서 은혜를 버렸을 지라도 , 재세례파는 자연을 은혜에 희생시켰다. 이런 정서적인 경향들은 철학적 영역에서 데카르트주의와 결합하여 원리에 있어서 모든 권위와 객관성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전 우주를 인식이론적으로 주관과 그의 생각으로부터 세워 보려고 하였다.

 

여기에 방법에 있어서 참으로 데카르트주의에 가까웠던 Coccejus주의가 일어났는데 그는 츠빙글리, 불링거, 올레비아누스 등에게서 일어났고, 네덜란드에서도 스네카누스, 고마루스, 그렐카티우스, 클로펜부르그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어 났으며, 언약론이 아니라 언약론주의적인 방법이었다. 그의 언약에 관한 교리대요( 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o,1648)는 성경역사적인 교의학이었고 성경을 원리로 뿐만 아니라 교의학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성경신학을 전통신학과 대조시켰고 언약을 작정에, 역사를 이념에, 인간론적인 방법을 신학적인 방법에 대조시켰다. 이 방법의 위험은 그것이 영원하고 변치아니하는 실체(substantia foederis)를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것(oeconimia foederis)의 흐름 안에 떨어뜨리고, 되어지는 것의 이념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전가시키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극복하려고 하기도 했다.

 

스콜라주의는 자신의 시대를 갖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번성은 지나갔다. 코케이우스주의자들이 대부분의 교수직 자리를 차지하였다. 1720년 위트레히트에 람페의 등용은 코케이스주의자들이 승리였다.

 

영국에서는 비국교도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장로파들은 웨스트민스터회의 이후, 수에서뿐만 아니라 영향에 있어서 몰락해 갔고, 이미 16세기에 Robert Browne, Johnson, Ainsworth와 John Robinson을 통하여 포용되어졌으며 시민전쟁 동안에 그 힘과 수에 있어서 증가하였던 독립파를 위한 여지를 남겨야 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여전히 장로파들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단지 독립파들은 소수의 분할을 얻었다.

 

침례교 역시 영국에서 이미 16세기에 드물게 일어 났었으나 1633년 이래 처음 자신의 교회들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677년에 침례교도들은 교회 정치와 세례에 있어서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사보이 선언으로부터 벗어난 신앙고백서를 내었다. 이 고백서에 기초하여 1693년 William Collins에 의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한 요리문답이 제시되었다.

 

칼빈주의적인 침례주의자들 중에는 일반적인 침례교도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 혹은 자유의지 침례교도들이 구별되고 있기도 하다.

 

아르미니우스적이고 침례교적이며 천년주의적이고 반율법주의적이며 자유사상적인 감정들조차도 출구를 찾았고 종교적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퀘이커교 안에서 이것은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 전통과 고백과 교회연합으로부터 해방이 신자마다 자기 자신 위에 기초되어 있고, 성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그 자신 안에, 영 안에, 내적인 빛 안에 그의 종교적 생활과 지식의 원천을 소유하는 것에서 성취되었다. 모든 객관적인 것 즉 성경, 그리스도, 교회, 직임, 성레는 제외시 되었다. 결국 이런 것은 이신론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위의 영향으로 대략 1750년에는 개혁주의 신학의 몰락은 어디에서나 확인되었다. 이미 전 시대에 현존하였던 결합되지 않은 요소들은 종결되었고 교의학을 손상시켰다. 네덜란드에서 코케이우스주의가 승리를 거둔 이후 1740년부터 1770년까지는 관용의 시기가 왔다. 진리의 힘은 거절되었고 사람들은 신앙 고백으로부터 성경으로 되돌아갔다. 원죄책, 행위언약, 특별한 구속 등과 같은 특별한 개혁주의 교리 내용들은 사라졌다. 다양한 항변주의적이고 소키누스주의의 오류들이 아름다운 형태와 성경적인 명목하에 등장하였다. 개혁주의 종교의 고백자들은 기껏해야 기존의 것들 안에 안주하였으나 더 이상 생명력이 없었고 소리를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옛날 교의학은 역사적 탐구의 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770년 이래 신신학(neologie)의 영향은 영국 이신론과 프랑스의 불신앙, 독일의 합리주의가 수확의 터전을 발견하였다. 혁명은 개념들에 있어서 전면적인 회귀였다. 정통주의는 합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온건한 성서적 초자연주의의 형식에서 19세기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런 것으로서 뛰어난 대표자는 신학요강의 도식(Schema Instituutionum theol. 1773-75)을 쓴 P. Cheval!lier, 이론신학요강(Instit. Theol. theor. 1788)을 쓴 Br. Broes, 12권의 종교요강(Onderwijs in den godsdienst, 1780)을 쓴 J. van Nuys Klinkenberg, 신학의 요리문답(Katechismus der H. Godg. 1780)을 쓴 Samuel van Emdre, 신적 직관(Beschouw. Godg. 1790)을 W.E. de Perponcher 등과 특별히 기독교 신학의 이론적 부분(Pars theologiae Christ. theoretica, 1800)을 쓴 H. Muntinghe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는 더 이상 특별한 개혁주의 신학이 없었다. 낭트칙령의 폐지가 나라 밖에서 최선의 힘들을 결집하였다. 18세기에서는 Paul Rabaut와 Antoine Court가 프랑스에서의 개혁주의 교회의 재건의 명예를 얻었다. 프랑스 설교자들은 대부분 로잔에서 그들의 교육을 받았고 거기에 앙투완느 큐르의 계획에 따라 프랑스 신학생을 위한 자신의 신학교를 세웠다.

스위스에서는 1675년의 스위스 공동고백(Consensus Helveticus)이 합리주의를 방해할 수 없었다. 바젤에 있었던 J.R.Wetttstein과 그의 아들, 취리히의 J.C.Suicerus와 그의 아들 Henricus, 제네바의 Mestrezat와 Louis Tronchin이 이 고백에 대한 모든 오류들을 주장하였다. 이미 1685년에 그들을 열외시키고자 하는 기도들이 진행 중이었다. 18세기 와서 이들이 제네바, 바젤, 아펜젤, 취리히, 베른 등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Neufchatel의 설교자인 J.F.Osterwald가 17세기적인 정통주의로부터 18세기의 합리주의에 이르는 전환을 이루고 있다. 그의 오늘날 그리스도인 안에 지배되고 있는 부패의 원천에 관한 논고(Traitte des sources de la corruption, qui re gne aujourdhui parmi les Chre tiens, 1700), 요리문답(Cate chisme,1702), 기독교 신학의 편람(Compendium theol. Christ. 1739)등에서 그는 죽은 정통주의와 아름답게 엮어진 교의들에 대해서 탄식하였고 많은 교리내용들, 예를 들면 선택론을 취소하며 도덕의 회복을 추구하였다.

 

영국에서는 교의학이 이신론에 의해서 정돈된 예언과 이적, 계시에 대한 의문들에 의해서 취급되었다. 변증학은 종종 합리적으로 채색되었을지라도, 그것은 많은 대표자들을 가졌고 그들 중에 역시 어떤 뛰어난 대표자들이 있었다. S. Clarke, N. Lardner, J. Butler, R. Bentley, W. Whiston, A.A. Sykes, T.Sherlock, D. Waterland, J. Coneybeare, J. Leland, J. Foster, W. Warburton, R. Watson, 기독교 변증(Evidence of Christianity,1794)과 자연 신학(Natural Theol, 1802)을 쓴 W. Paley(1805) 등이다.

 

18세기 스코틀랜드 신학자들 중에서 선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총체](A complete body of divinity, 3 vol., 1773) 4차원의 국가(Fourfold state, 홀란드 번역 1742), 은혜언약에 대한 견해(A view of the covenant of grace, 꼼리에에 의한 홀란드 번역 1741)를 쓴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 아담 깁(Adam Gib), 첫 번째 다섯 분리주의자들이며 그들의 저서들이 역시 화란어로 번역된 피셔(Fisher), 윌슨(Wilson), 몽크리프(Moncrieff), 형제인 랄프와 에벤에젤 어스킨(Ralphen Ebenzer Erskine) 등이다.

19세기 초기에 개혁주의 신학은 어디에서나 슬픈 몰락의 길로 돌아갔다. 네덜란드에서는 신학이 초자연적인 형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실행되었다. V. Palm, V. Voorst, Borger, Clarisse, Kist, Hengel, Abresch, Cheval!lier, Muntinghe, Ypey, Heringa, Royaards, Bouman, Vinke, Dermount, Broes, D. Curtius, Senden, Egeling 등과 같은 유능하고 뛰어난 설교자들과 스톨피아 특사(1787년)를 통하여 실행되었다.

 

이런 초자연적인 경향은 이성적이기를 원하였지만, Wegscheider, Rohr, Paulus의 의미에서 합리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시를 주장하였고 다양한 합리적이고 역사적인 근거 위에서 그것의 필연성과 가능성과 진리를 증명하였다. 그것은 성경적이기를 원하였고, 반고백적이고 반철학적이고 반칼빈주의엿다. 그것은 신학에 있어서 이신론적이고, 인간론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적이며, 기독론에 있어서 도덕적이고, 교회론에 있어서 동료적이며, 종말론에 있어서 쾌락주의적인 교의학을 가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점점 신학 영역에서의 발전을 불신앙쪽으로 나가게 했던 것이다.

 

급기야는 현대신학에는 더 이상 교의학이 없을 정도로 치달았다. 마지막 시대에 사는 많은 현대주의자들의 경우에 교의학에 있어서는, 결핍이 있고 스스로 신앙고백과 교회조직체에 눈이 띄었다.

 

Ds. Fleischer가 1902년 4월 현대신학자들의 모임에서 그것을 천명하였고 Dr.J.van den Bergh는 1903년의 모임에서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하나의 새로운 교회의 연합에 이르는 조직화에 대해서 변호하였고, Dr. Knappert가 현대고백을 선호하는 소리를 높였으며, Dr. Goenewegen은 종교철학 안에 형이상학의 권리와 철학적 교의학을 설립하였고, Dr. Bruining은 교의학의 방법에 관한 연구를 썼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증명을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의학을 향한 이런 열망이 빨리 만족될 것 같지 않다. 지성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사이의 차이가 현대인 사이에서도 계속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모든 교의학적 물음에 관해서 ( 신론과 인간론, 인간의 근원과 불멸성, 죄와 그리스도의 인격, 구원관 등) 견해들이 멀리 벗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혼합주의 양상에 빠지고 일반 종교적 입장 때문에 기독교의 특별한 입장을 포기하였던 일 자체가 이미 일어났었고, 1903년에 암스테르담 자유주의자들의 회의에서 더 명백히 밝혀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이 점점 더 몰락하게 되었다. 계몽주의가 일어났을 때, 칸트, 슐라이어마허 등의 철학 영향의 결과로 1718년 연합교회가 생겼고 독일에서의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을 완전히 몰라케하였다. 이 세기의 초기에 개혁주의 의식으로부터도 몇 가지 깨달음이 일어났다. 에어랑겐으 크랍트, 엘버필드의 크롬마허, 뤼벡의 가이벨, 브레먼의 말레트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아주 크지 않다.

 

에러랑겐의 에브라르트(1888), 마르부르크의 헤페(1879)와 같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멜란히톤주의를 통하여 개혁주의적인 것에 큰 해를 끼쳤다. 할레의 비켈하우스(1858), 프랑크푸르트의 칼 쉬드호프(1865), 비인의 뵐, 스투트가르트의 짠, 데트몰의 텔레만, 엘버펠트의 콜브루게1875)와 기타 다른 사람들이 개혁주의의 기초 위에 서 있었던 인물들이다. 지금에는 독일에 개혁주의 신앙고백 위에 서 있는 어떤 신학대학이나 학교가 없다.

 

스위스와 프랑스에는 스코틀랜드로부터 거기에 심어진 부흥을 통하여 재생이 일어났다. 그 부흥은 강력한 정신적인 운동이지만, 원래 비교회적이고 반고백주의적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기독교 기초 위에 있고 좀더 개인적이고 귀족적이며 감독주의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성격을 통하여 인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선택(C?sar Malan1864, 그의 전기는 Malan Jr. Amst. Hoveker 1874에 의해서 됨)과 영감(Merle d' Aubigne', 1872, Gaussen, 1863)에 강조를 두었다.

 

Alexandre Vinet(1797-1847)는 신학적으로 생의 원리는 기독교와 신앙의 조화였고, 계시가 인간에게 종교적 도덕적 필요들을 선물하신 충만한 만족이었으며 복음의 엄밀한 '자연성'이었다.

 

기독교의 주된 진리들 위에 확고히 서서 강하게 교의와 도덕의 연합, 진리의 윤리적 편에 강조를 두었다. 그러나 그를 통하여 그가 기독교의 진리성을 기독교적인 경험의 기초 위에, 양심의 증거 위에 의존하도록, 그리고 선택을 버리고 신인협동설 위에 서서 일반적으로 중심점을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 넘어가도록 하는데 점점 더 이르렀다.

 

E.Scherer는 처음에는 엄밀한 전통주의였으나 점점 더 자신의 마지막 것과 결별하여 완전 불신앙 속에서 그의 생을 끝마쳤다.

 

1849년 E.Scherer의 등장 이래 자유주의와 정통주의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그 원리들이 비네로부터 철저히 연구되고 그리고 후에 칸트와 리츨의 영향이 연구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중용적이고 온건한 정통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유주의는 Pressens?, Asti?, S?cr?tan, Sabatier, Leopold Monod, Chapuis, Dandiran, Lobstein

 

정통주의는 Godet부자, Porret, Berthoud, Martin, Doumergue, Bertrand, H.Bois, Gr?tillet

 

두 파벌 사이의 논쟁은 하나는 종교에 관한 권위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즉 이것이 성경에 있는 것인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는 것인지 혹은 이성과 양심에 있는 것인지에 관련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련된 것으로서, 즉 아무리 역시 다른 이들에 따라 영지를 통해서 분석될지라도 그가 참된 하나님이신지 그렇지 않으면 혹은 그는 다만 인간이었는지, 그가 역시 완전하게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에 있어서 전형 흩어짐이 없이 나누어진 한 인간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영국에서 감리교회의 형태는 다음과 같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John Wesley(1703-1791)는 과학적 신학자가 아니라 복음을 개인주의화하고 매 사람에게 영생물음을 묻게 하였던 능력 있는 설교자였다.

 

George Whitefield(1714-1771)를 통하여 생긴 감리교회는 우선 39개조항들에서 한 두 가지 점에서 벗어난 점에 있지 않고, 기독교 진리 전체를 두 가지 점 즉 죄와 은혜의 갑작스럽게 의식된 경험, 다시 말하면 개인적 회심과 두 번째로 전혀 새로운 형태로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이 다른 사소한 일들로부터 회심함과 다양한 사소한 것으로부터 그만두는 것을 통하여 표현하였고 이생에서 이미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에 있다. 이런 일방성이 점점 더 다양한 교의들이 논쟁되고 변경되거나 종속적인 가치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식이 되었다.

 

감리교회가 성공회와 장로교회, 독립교회, 침례교회에 끼친 영향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웨슬리는 영국 미국 개신교형(het Engelsche en Amerikaansche Protestantisme)의 창시자요, 그의 등장 이래 계속 개신교 안에서 반복하게 된 대각성운동의 중개역할자이며 "빈민굴의 대주교"요, 내적 선교의 아버지요, 기독교 사회운동의 기초자이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주로 민중에 제한되었다. 좀더 높은 사회층에서나, 정치, 철학, 인문학에서는 차디찬 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그와 반대로 교회적이고 신학적인 영역에서 옥스퍼드 운동 내에 옮겨진 로마 가톨릭(W.Scott, Southey, S.T. Coleridge,1834)으로부터 반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6세기로부터 기원하여 상당히 강화된 고교회적인 정파를 갖고 영국 국교회 안에 로마 가톨릭 교리와 의식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Spencer Jones는 1902년 런던에서 Right Hon. Viscount Halifax 자작의 서문을 가지고 출판된 영국과 교황청(England and the holy See)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공적으로 영국 국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세상의 빛(Lux Mundi, 1890)의 저자, Canon Holland, Moore, Illingworth, Talbot, C.Gore 등이 퓨지주의를 새롭게 하고 동시에 기독교 교의들을 새 시대의 빛에 삽입시킴을 통하여 그럴싸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고교회적인 종파 곁에 수평교회적인 종파가 등장하여 이미 17,18세기에 광교주의(het Latitudinarisme)를 통하여 준비되었다.(Thomas Arnold(1842), Hampden(1868), Maurice(1872), Ch.Kingsley(1874), Whateley(1863), F. W. Robertson(1853), A.P.Stanley(1881)) 저교회적인 종파의 감리교를 꺼려 그들 모두가 진지하고 고상한 방식에서 기독교와 문화와 화해를 향하여 노력하였다.

 

의식주의, 다양한 이단들과 분파들, 거대 사회의 필요와 특별히 이미 Colenso주교를 통하여 영국땅에 입성하게 되었고 Rob. Smith, T.K. Cheyne, S.R.Driver를 통하여 선전되었던 고등비평이 수평교회적인 경향에 우위를 제공하였다.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수석사제인 F.W.Farrar, 침례교회주의자인 J. Clifford, 구 복음주의와 신 복음주의(The old Evangelicalism and the new, 1889)를 쓴 회중교회주의자인 R.W.Dale, 런던에 있는 Joseph Parker, 현대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치(The place of Christ in modern theology, London 1893) 기독교 종교철학(Philosophy of Christian religion)을 쓴 맨스필드 대학의 Dr. Fairbairn, 장로교 성직자들 중에는 영적 세계에 있어서 자연법(The natural law in the spiritual world) 최고 선(Summum bonum) 등을 쓴 Prof. Henry Drummond, 성경, 그 근원과 본성(The Bible, its origin and nature, Edinburgh 1905)을 쓴 Marcus Dods, 변증학 혹은 변호적인 진술된 기독교(Apologetics, or Christianity defensively stated, Edinburgh 1905」를 쓴 A.B. Bruce, 현대 기독교사상의 진보성(The progressiveness of modern Christian thought, Edinburgh Blackwood, 1892)을 쓴 James Lindsay,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카르타고 신학(Alexandrinian and Carthaginian Theology, Edinb. Clark)을 쓴 J.B. Heard, 훌시안 강의(Hulsean lectures)를 펴낸 Clark, 성육신에 집중된 대로 하나님과 세계에 관한 기독교적인 견해(The Christian view of God and the world, as centring inthe incarnation, Edinb. Elliot 1893」를 쓴 James Orr 등이 속해 있다.

 

스코틀랜드의 국교회(de Establ. Church)의 Flint, Milligan, 자유교회의 Brown, Rainy, Davidson, Salmmond, Laidlaw, G.A. Smith, 연합장로교회의 Cairns, Muir, Thomson, J. Smith가 속해 있다.

 

스테아드는 그가 사회 전체개혁을 인도하고 극장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체를 자신 안에 수용하고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종말의 교회'를 소망하였을 때, 참으로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다. 그 때 종종 무덤 저편에 있는 만물을 회복하는 소망이 이것을 수반하고 있다.

 

엄밀한 칼빈주의는 땅에서 날마다 잃어가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글래스고의 헤이스티 교수의 저작은 참으로 중요하고 주의깊게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신학적 학문 안에 칼빈주의 재흥으로서 영접되기 보다는 크게 라이덴 교수인 스콜텐 교수의 영향하에 서 있다.

 

이신론이 이미 이적들, 예언들과 계시에 대한 방대한 비판을 시도한 이후 다윈이 종 이론, 스펜서의 불가지론, 스튜어트 밀의 경험주의, 틴달의 물질주의의 영향하에 이런 종교적 변질과정이 좀더 계속되었다. 기독교 교의들의 비판과 회유하며 화해하는 관계를 확증하였다.

 

미국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은 원래 아주 다른 형식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교회들이 영국과 유럽의 모교회로부터 미국과 캐나다에 계속적으로 전수되었다. 1607년 버지니아로 이민온 감독교회가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교회이고, 허드슨과 맨하탄 섬이 1609년에 발견된 이래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거기에 확증되고 있다. 독립교회주의자들 혹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처음 1620년에 Plymouth에 상륙하였다. 퀘이커교도들은 1680년 윌리암 펜을 통하여 펜실베이니아로 안내되었다. 침례교도들은 1639년 Roger Williams를 통하여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에 확고한 발을 딛었다. 루터교 독일교회와 같이 개혁주의 독일교회도 18세기 중엽 이래 확증되고 있다. 장로교회는 다양한 그룹들으로 구분되고 있다. 거의 모든 이런 교회들과 그 안에 있는 종파들이 칼빈주의 근원으로부터 왔다. 모든 종교적 운동들 중에서 칼빈주의가 미국에서는 가장 힘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한 교회에 제한된 것이 아니었고 다양한 변화에도 회중교회, 침례교회, 홀란드 및 독일 개혁교회들 안에 생명을 불어 넣는 기본요소이다. 모든 방면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홀란드, 독일로부터 그것이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그것이 식민지 시대 동안(1620-1776)에 뉴잉글랜드의 성격을 형성하였다.

 

미국에 웨슬 리가 이르기 전 1734년에 노샘프턴에 있는 그의 교회에서 놀라운 각성이 일어났다. 후에 그의 친구 휘트필드와 함께 여러 번 같은 각성운동을 주도하였고 변호하였다. 신학적으로 그는 특별히 뉴잉글랜드에서 Daniel Whitby와 John Taylor의 저서들을 통하여 유입된 그 아르미니우스주의와의 싸움을 주도하였다. 그는 그의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사변들을 통하여 칼빈주의를 강화하였으나 실제 이미 Cameron에게서 일어났던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중대성과 의지의 자유, 원죄와 속성에 대한 특별한 이론을 통하여 그것을 약하게 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대한 칼빈주의적인 교리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소무르학파의 경우와 같이 원죄의 거절과 속죄의 보편성을 그것과 연합시켰던 어드워즈주의자들, 새신학의 사람들, 새 빛들의 아버지였다. 그의 아들 조나단 에드워즈(1745-1840)는 속죄론에 있어서 사실의 본질에 있어서 그로티우스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나다니엘 에몬스(1745-1840, Works, Boston 1842)가 홉킨스주의의 가장 뛰어난 옹호자였다. Timothy Dwight,(1752-1817)와 Nathaniel W.Taylor, 1786-1858)의 경우 에드워즈의 체계가 펠라기우스적인 의미에서 변경되고 있고 '신학파'의 이름을 얻고 있다.

 

1808년에 세워진 앤도버의 신학교에서 교회사교수 에그버트스미스의 지도하에 그것은 진보적인 정통주의와 내세 시련에 관한 교리로 인도되었다. 뉴잉글랜드의 신학에 있어서 구학파는 무엇 보다도 구칼빈주의를 변호하는 Dr. Bennet Taylor(1783-1858)와 Dr. Leonard Woods(1774-1854)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

 

그러나 청교도주의는 점점 더 도르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수준으로부터 떨어졌다.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미국의 회중교회 대회에서 12개조항의 새고백이 준비되었는데 그 안에서 특징적인 개혁교회 교리들이 빠졌다. 이 새로운 교리성명은 25인 신학자들의 위원회에 의해서 발생되었다. 유명한 두 설교자인 W.E. Channingg(1780-1842)과 하트포드의 Horce Busnell(1802-1876)이 청교도주의에서 떨어져 나갔다. 채닝이 미국에서 유신론주의의 가장 유명한 대변자가 되었고, 부쉬넬은 삼위통일성에 관한 사벨리우스의 교리를 새롭게 하였고 속죄를 다만 하나의 도덕적 행위로 파악하였다.

 

미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병행적으로 발전해 갔다. 여기에서도 구빛과 새빛의 신학자들 사이에 뿐만 아니라 필라델피아 대화와 뉴욕대회의 교회들(1741-1758)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다. 첫 신학자의 한 사람은 John Dickkinson(1688-1747)으로서 그의 유명한 저서는 항변파에 반대하는 5개 조항에 대한 변증이었다. 특별히 구학파는 1812년 총회에 의해서 세워진 프린스틴 신학교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거기에서 Dr.Archibald Alexander(1772-1851), Dr. Charles Hodge(1797-1878)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London and Edinb, 1873, 3 vol.)을 통하여 대변되었다. 찰스 하지의 계승자는 그의 아들인 Archibald Alexander Hodge(1823-1886)로서 신학개요 (Outline of Theology, ed. by W.H. Gold, London, Nelson 1866)와 복음주의 신학(Evangelical Theology, 1890)을 썼다. 이러한 형태는 17세기 칼빈주의의 재생으로 평가할 수 있다.

 

프린스턴 신학은 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스위스 공동고백에 기록되고 특별히 F. Turretinus의 담화신학(Theol. Elentica)을 통하여 보급된 대로, 17세기 칼빈주의의 재생이었다. 같은 체계가 역시 남부 신학자들인 James H. Thornwell(1812-1866), Robert J. Brekinridge(1800-1871), Robeut L. Dabney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

 

구학파의 대표자 한 사람은 교의신학(Dogmartic Theology, 2 vol. New-York, Scribner 1888)을 쓰고 1890년 이래 뉴욕 유니온 신학교 은퇴 교수인 W.G.T. Shedd다. 그러나 하지와 쉐드 사이에는 놀라운 차이가 있다. 전자는 언약론주의자요, 창조론자였으나, 후자는 실재론자요 유전론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선택을 아주 넓게 파악하고 그 아래 요사한 어린이들을 포함시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하고 있다.

 

교의학은 기독교 신학 체계(System of Christian Theology, ed, by W.S.Karr, 4 ed. New-York Armstrong 1890)를 쓰고 구학파와 신학파 사이의 중재를 기독론적인 입장에서 찾았던 Dr. Henry B. Smith(1815-1877)를 통하여 배웠다. 그의 제자인 Lewis French Stearns(1892)는 1893년 뉴욕에서 출판된 현대신학(Present da Theology)이란 작품을 써서 그 안에서 영감, 섭리, 영지(kenosis), 예정, 축복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을 제시하였다.

 

프린스턴 장로교 신학교로서 전혀 독립적으로 대학과 함께 거기에 존속하여 교회 고백과 결합되어 있었고 교수들의 특별한 결속(Warfield, Vos, Dick Wilson, Greene)이 있었으며 신학잡지(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안에서 영예로운 개혁주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정신이 북장로 교회 안에도 침투되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질서 속에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개정은 1903년에 결정되었다. 거기에 단지 적은 변경들이 제안되었을지라도, 첨가된 것들과 삭제된 것들, 수용된 성령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한 두 개의 새로운 장들, 개혁주의 교리의 몇 가지 잘못된 견해들을 다시 헛되게 부정하는 선언문 모두가, 신앙고백 가운데 가르쳐지고 있는 특수은총론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 구속, 복음의 선포, 은혜의 제공, 성령의 역사, 어릴 때 죽은 모든 어린이들의 축복의 보편 은총론을 아주 강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시 제공된 개정은 두 측으로부터 논쟁되고 있다. 클락스빌 신학교 교수인 Dr. R.A.Webb와 같은 몇몇의 개혁주의자들과 Reev. Dr. S.M.Templeton와 같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개정의 보편은총론이 원 신앙고백의 특별은총론과 충돌이 되고 있다는 주장에 일치하고 있다.

 

각각의 경우에 주목할 것은 개정이 결정된 2년후 1905년 5월에 이루어졌던 북장로교 일반대회에서, 1770년 각성운동으로부터 태어났고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던 컴벌랜드 장로교회와 교회연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진지한 위기에 들어선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과 무능력, 제한된 구속, 선택과 유기,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의들은 은밀히 부정되거나 역시 공공연히 거절되고 있다. 칼빈주의에 대한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위에서 처럼 종교개혁에서부터 분명하게 들어난 개혁주의는 17세기를 넘어서면서 점차로 그 독특성이 변질되어져 갔으며 급기야 19세기 미국에 와서는 전혀 다른 개혁주의적 특징을 드러내게 되었다. 몇몇 학자들을 통하여 17세기적 개혁주의 독특성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시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흐름의 맥이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개혁주의적 특성을 이어 받은 한국의 기독교도 엄밀한 개혁주의적 전통을 상실하고 변질된 개혁주의적 특색을 갖게되엇다고 생각한다. 본 책을 통해서 개혁주의적 독특성이 어떻게 시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났었는지 또한 그러한 독특성들이 어떻게 해서 단절되게 되었는지를 배우면서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고 신학을 배우는 나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어디에서부터 출발을 해야 할 것인가?와 또한 어떻게 그 방법을 취할 것인가?가 무엇 보다도 매우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