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율법의 세 가지 용도

출처:  신학자료실|2008/04/12  http://blog.paran.com/mokpojsk/25521052 

II. 율법의 세 가지 용도

 

                                                II. 율법의 세 가지 용도

 

 


                                                                                                                       권호덕 박사 (조직신학)

 

이제 우리는 율법의 세 가지 용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을 위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율법의 시민적 용도에로 눈을 돌린다. 율법의 이 시민적 또는 정치적인 용도는 한 마디로 창조주인 동시에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든 아니면 이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 간에 모두에게 유익되게 적용될 수 그 무엇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도 멜란히톤과 루터 그리고 칼빈의 견해를 점검하면서 그 의미를 점검하려고 한다.


A. 정치적 또는 시민적 용도(usus politicus seu civilis legis)


  1. 멜란히톤은 율법의 제 1용도를 paedagogicus seu politicus usus(교육적 또는 정치적 용도) 또는 civilis usus(시민적 용도)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비록 중생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규정에 따라 살기를 원하심을 지적함으로써 그는 제1 용도를, 질서를 중요시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율법은 가르치며 공포와 형벌로써 사회일원들을 규정 아래, 외적인 행위에 대한 모든 계명에 따라 지키도록 강요한다"라는 그의 발언과 통한다. 그러면 이런 질서가 유지되려면 어떤 조치가 있어야 될까? 멜란히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몸의 지체의 절제를 명시함으로써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사회의 질서를 교란하는 요인임을 암시한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를 지적했다.

⑴ 혀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분노의 말을 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이웃에게 거짓을 금하며,

⑵ 손을 남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되며,

⑶ 몸은 외적으로 비도덕적인 것을 행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멜란히톤의 이런 지적내용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에 대해 바른 관계가 무너지고 수평적인 차원에서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질 때 사회질서가 무너짐을 암시한 것이다.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이 두 가지 관계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로 기울이자 이웃나라에 붙여 전쟁으로 그들의 삶의 여건을 파괴하는 것을 보았으며 또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말 한 마디 때문에 또는 한 사람을 죽임을 통해 전쟁이 일어나는가 하면 정변이 일어난 것을 보았다. 멜란히톤이 여기 언급한 세 가지는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원인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 사회의 질서를 이루기 위해 어떤 기구가 필요할까? 멜란히톤은 정부가 이런 치리를 위해 법, 교훈, 형벌, 육체적인 제재 등을 제정케 했다고 지적함으로써 율법의 제 1용도가 일반은총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일반은총이란 인간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로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선물로 부여하신 내용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태양, 물 등 자연적인 여건이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 체제, 가정 등등 그리고 죄의 횡포를 막기 위해 주어진 것들이다. 그 중에 성도덕을 타락에 제동을 거는 성병도 여기에 속한다. 특별은총이란 인간을 구원하는데 동원된 하나님의 장치들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성경, 교회,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은혜 등등.

멜란히톤은 율법의 제 1용도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외적인 도덕을 지키는 것을 원하시며 그들이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여러 가지 재앙으로 벌주심을 강조함으로써 율법의 제 1용도의 주권자가 하나님임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는 이 제1용도가 죄용서함을 얻는데는 아무런 역할을 못함을 집고 넘어간다.

  그러면 멜란히톤은 율법의 제 1용도를 왜 paedagogicus usus(교육적 용도)로 표현하나? 그는 딤전 1:9에 근거하여 이 질문에 답한다: Lex est iniustis posita; id est, Deus coherceri vult etiam impius, ne externa delicta committant(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그는 여기서 갈 3:24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율법은 그리스도 안의 교육자'(Lex est paedagogus in Christum)라고 대답함을 통해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기능을 율법의 제 1용도와 연관시킨다. 멜란히톤이 복음 곧 성령이 이를 통해 복음을 가르치고 듣는 것을 제 1용도에 포함시키는 것은 루터와 다른 점이다.


  2. 그러면 루터는 율법의 제 1용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우리는 루터의 주장을 그의 갈 3:19 주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율법의 제 1용도를 civilis usus(시민적 용도)로 표현한다. 루터의 주안점은 "하나님은 시민법, 진실로 모든 법을 제정토록 하시어 죄악을 어거하게 하셨다. 따라서 모든 법은 죄를 방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는 말 가운데 나타난다. 루터는 세상과 타락한 인간의 문제점을 깊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 악하고 미친 세상과 인간을 묶고 어거할 '밧줄'이나 '사슬' 등과 같은 용어를 반복해서 말한다. 또 율법의 제 1용도와 연관하여 루터의 발언 속에는 '어거하다'(cohercio)라는 단어가 매우 자주 나온다. 그러면 이 죄악을 어거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루터는 "정부, 부모, 선생, 법, 수갑 그리고 모든 시민 규정"(Magistratus, Parentes, praeceptores, leges, vincula et omnes ordinationes civiles)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멜란히톤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 수단을 지적한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루터가 이런 수단을 통해 죄악을 어거하는 것이 사단을 어거하는 것과 연관됨을 지적한 것이다. 루터는 자연 속에 사단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음과 또 이 세상이 사단의 지배를 받아 온갖 범죄를 저지르게 함을 주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멜란히톤보다 인간 문제를 더 깊이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루터의 이런 인간관 곧 인간이 외부의 어떤 권세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간관은 철학적인 인간관 내지 세속적인 인간관과 구별되는 것이다. 이 후자들은 인간은 단독적인 존재로서 판단하고 자의로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루터의 이런 발언은 바울 신학의 중요한 면을 드러낸 것이다. 사단은 육신이 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모두 육인 것이다. 육이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단절되어 자기 마음대로, 인간의 이성의 추구함에 따라 사는 인간을 의미한다. 이런 육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육인 인간은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사는 자들을 의미한다. 성경은 사단이 이런 육인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은 시민법을 설치하셨을까? 루터는 '공공의 평화, 만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또 복음이 전진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루터는 율법의 제 1용도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지만 칭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확실하게 말한다.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인 Elert에 의하면 루터는 율법의 정치적 용도usus politicus(정치적 용도)가 악 그 자체 그리고 악한 인간을 붙들어 매어 이것들이 우리의 지상생활의 삶의 조건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게 하는데 있음을 지적함으로서 이 세상 법질서가 하나님의 통치 기관임을 지적함을 볼 수 있다.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1용도를 하나님의 통치의 시각으로 해석했다면 루터는 복음의 확산의 관점에서 해석함을 볼 수 있다.


  3. 칼빈은 루터나 멜란히톤이 말하는 율법의 시민적 용도(제 1용도)를 자기의 기독교 강요 초판은 물론 최종판에서도 두 번째 용도로 다룬다.

칼빈도 위의 두 사람의 경우처럼 그 출발점을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둔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정치적 용도의 이념은 실제적인 인간본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라고 칼빈을 해석한 Donald MacLeod의 말은 정확한 것이다. 칼빈은 자연인을 가리켜 "제멋대로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 간직하는" "날 뛰는 정욕을 공공연하게 발산하고자 하는" "자기를 억제할수록 정열의 불길은 강하게 되며, 마음속이 뜨겁게 끓어오르는"(II,7,10) 존재 등으로 표현한다. 칼빈은 심지어 이런 인간은 율법 자체를 미워하며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함을 주목한다(ibid.). 바로 이런 인간에게 율법이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죄를 억제한다는 것이다(II,7,10[1]). 또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버려두면 한정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II,7,10[10])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의 시민적 용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칼빈은 율법의 이러한 용도를 통해 야기된 의를 '억제된 또 강요된 의'(coacta expressaque iustitia)라고 표현한다(ibid[8]). 이로써 어느 정도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시민적 또는 정치적 용도와 연관하여 칼빈은 멜란히톤과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우선 이 용도의 근거를 멜란히톤 처럼 딤전 1:9-10에 두는 것이며(II,7,10[11])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을 이것과 연관시키는 것이다(II,7,11[1]). 칼빈은 율법의 시민적 용도가 자기 義사상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케 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정욕이 날뛰는 인간에게 굴레를 쒸어 아직 중생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한 때까지 안전하게 보존하심을(ibid., [6]) 말하여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의의를 지적했다. 이런 '교육적 용도'의 발언은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부르심을 받기 전에 또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롬 1:4) 어리석은 육의 정욕대로 날뛰는 동안은 이런 감독을 받는 것이 유익하다'라는 말과 통한다. Inst II,7,10[9]). 라틴어 원전은 "여기 감독을 받는다는 말"을 paedagogia exerceri로 표현해서 교육의 의미를 드러낸다.

  칼빈의 주장을 요악한다면 율법이 공포심이나 수치심을 불러 일으켜서 인간의 야성을 조금이나마 꺾어서 사회를 평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침내 구원을 얻는 싯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칼빈의 경우도 죄를 어거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의 용도가 드러난다.


   인간이 이 세상을 인간답게 살려고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질서일 것이다. 우리는 L.A. 폭동이나 전쟁을 통해 사회 질서가 파괴되었을 때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근래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절감한다. 필자는 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피난온 보스니아 도는 코소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눈 앞에서 부모 형제가 적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가 하면 가옥이 불타고 갑작스러운 피난명령 때문에 빈털털이로 도망온 사실이나 피난 행령에 자녀들을 잃어버려 목이 쉬도록 울부짖던 일 등은 사회질서 체제가 무너졌을 때 당하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 질서가 파괴된다는 것은 사실상 사망의 상태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생존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더더구나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비로 범죄하고 타락했어도 정상적인 삷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4. 루터는 율법의 제 2용도를 legis usus Theologicus seu Spiritualis(율법의 신학적 또는 영적인 용도)로 표현했다.

루터는 모세 율법의 첫째 목적이 율법을 통해 죄가 성장하고, 특히 양심에, 번성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본다. 루터에 의하면 바로 율법의 제 2 기능이 이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율법의 고유의 직분은 사람들에게 그의 죄, 맹목, 비참, 악함, 무지, 하나님을 미워하고 무시함, 사망, 지옥, 심판 그리고 잘 예비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는데 있다". 루터는 멜란히톤처럼 제 2의 용도가 율법의 고유의 으뜸되는 직분으로 본다.


  위의 단순한 정의만으로는 루터의 의도하는 바를 다 이해할 수 없다. 루터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괴물이 있고 이 괴물을 쳐부수는 무기 내지 망치가 있는데 이 망치가 이 괴물을 어떻게 처치하는지 그 과정이 루터의 말하고자 하는 바의 내용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① 이 괴물은 무엇인가? ② 어떤 점에서 이 괴물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인가? ③ 이 망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④ 이 망치는 그 기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⑤그 결과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될 것이다.


-① 이 괴물은 무엇인가?:

루터는 이 괴물을 외식자들 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궤변자들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義(의)나 자기 자신의 義(의)의 외람됨에 따라 사는 모든 자들을 가리켰다. 루터는 이런 자들을 좀 심하게는 "자기 자신의 의의 외람됨에 술취한 자기 義(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페스트병과 같은 외식자들이다. 여기에는 물론 일반자연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해당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이나 의식주의자들 그리고 행위의 의에 따라 사는 승려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와 연관하여 루터는 매우 주목할만한 발언을 한다. 즉 이런 괴물들은 결고 율법의 제 2용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外飾하는 자들이 뻔뻔스러운 이유는 율법의 제 2용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현대교회 내에 외식자들이 많다는 것은 현대 교회가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지도자들의 무지로 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어떤 점에서 이 괴물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인가?:

루터는 이 괴물들의 이성이 이런 외람된 인간적인 義(의)사상으로 오만해져서 이 의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공상함을 지적했다. 또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외적인 죄는 범하지 않지만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체, 자신의 선행에 의존하며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맹세함을 지적했다. 루터는 또 이런 자들 속에 자기 義(의)사상이 남아 있는 한, 매우 교만하고, 자기를 신뢰하며, 잘난 채 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동시에 은혜와 자비를 멸시하며 약속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했다. 루터는 심지어 이런 인간을 사나운 짐승(bestia)이라 부른다. 루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마음과 오성 속에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죄사함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거대하고 단단한 암벽과 같은 자기 義사상에 둘러싸여 하나님의 사역이 임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기 義사상을 거대하고 소름끼치는 괴물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또 거역적이며 고집이 세며 목이 곧은 짐승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이런 자들은 자기 스스로 성(城)을 쌓고 그 성 속에서 하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겠다는 자율성의 인간이라는 말이다. 사실 성경이 정죄하고 타도하는 인간은 바로 이런 육신(싸르크스)인 인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율법이 저주하는 부패한 인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③ 이 망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바로 율법인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이 괴물과 같은 짐승을 공격하기 위해 어떤 헤라클레스와 같은 것을 파견하신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말이다. 루터는 율법이 견고한 바위와 같은 이 '옛 자아'를 파괴하는 것을 예레미아의 말을 이용해서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다. "내 말이 불같이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셔뜨리는 방망이 같이 아니하냐"(렘 23:29) 루터에 의하면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거대하고 강력한 망치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망치로 자기義-사고방식을 파괴하신다는 말이다. 루터는 견고한 성채와 같은 외식자들의 자아의 城을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제 2용도라고 한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이런 외식자들을 죽이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루터에 의하면 이들을 죽이시는 이유는 거짓선행과 자기 의(義)사상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내지 경외가 없는 곳에는 은혜와 생명에 대한 갈증도 없는 법이다고 한다. 루터가 옛사람의 자아의 城이 이렇게 견고하다는 사실을 매우 깊이 알았다는 점에서 그는 종교개혁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운동은 사실상 인간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인간을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④ 이 망치는 그 기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루터는 율법이 죄인들에게 공포와 전율이 엄습하도록 함을 통해 자기의 비참함을 깨닫게 만드고 겸손하게 만든다고 했다. 루터는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번개와 천둥과 나팔소리와 벼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어 자기 義사상이라는 짐승을 불태우고 분쇄하는 것 같이 율법이 우리에게 그렇게 임한다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밝히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나 의 그리고 생명이 아니라 죄, 사망,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음 우리 모습 그리고 지옥을 보여주고 밝히는 불빛과 같은 것이다. 요컨대 루터의 경우 율법의 제 2용도는 인간의 죄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분노의 사역을 수행하며, 죄를 고발하고, 공포에 떨게 만들며, 인간의 마음을 절망의 지점까지 가도록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MacLeod가 율법의 직분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동사로 표현한 것은 어울린다: accuse, terrify, condemn.


-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루터는 우선 율법의 제 2의 용도를 통해 시민적인 범죄에 제동이 걸린다고 본다. 영적이지 못하며 미개한 사람들의 방종을 율법의 두려움으로 어거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경우 제 2용도는 제 1용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루터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없는 사람에게 이런 주장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민 생활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제 2용도가 도우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영적인 범죄를 고발하기 때문에 인간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의 제 2용도는, 루터의 경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루터는 그 이유를 성경의 신관을 언급하여 설명한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 겸손하게 된 죄인을 높이시는 분으로서 마침내 죄인을 칭의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제 2용도가 칭의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임을 본다. 사실 루터의 경우 율법의 용도는 세 가지 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칭의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론'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열거한 멜란히톤의 주장과는 달리 인죄론 중심적이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내용은 율법의 공포에 질려 살다가 마침내 구원의 은총을 맛본그 자신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성경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육의 문제를 공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루터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율법의 으뜸가는 기능 내지 고유한 기능으로 본 것도 그는 이 속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총체적으로 조직화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론은 현대인들의 값싼 은혜를 매우 강력하게 비판한 본 회퍼를 생각나게 한다. 왜 이들은 값싼 은혜론에 빠지게 되었을까? 이는 방망이처럼 두둘기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존이 무너져 보지 않는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귀중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타락하는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또 루터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신자들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현대 교회에 경종을 주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제 2용도는 기독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며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을 받은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내용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이런 점에서 루터의 경우 율법의 제 2용도는 제 3용도와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죄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가르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 기독인들이 이해하는 죄개념은 무속종교가 말하는 죄 또는 일반 자연종교가 말하는 죄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 이런 죄에 대해 하나님의 분노의 반응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일에 등한히 한 것 같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율법의 제 2용도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B. 신학적 용도(usus theologicus legis)

       

1. 멜란히톤은 '율법의 제 2용도'를 proprium legis divinae et praecipuum(하나님의 율법의 고유의 특유의 용도) 또는 usus Legis divinae et praecipuus(하나님의 율법의 특유힌 용도)로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는 율법의 제 2용도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용도로 여긴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루터와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면 멜란히톤이 말하는 율법의 제 2용도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는 '부패한 본성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죄를 보여주고, 고발하며, 공포에 질리게 하고 또 정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멜란히톤은 이것을 끝나지 않고 이 용도가 어떻게 수행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다.

  사실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멜란히톤의 발언은 救贖史(구속사) 전체를 요약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분노, 죄에 대한 심판, 원복음, 그리스도의 구속, 설교' 등이다. 이 중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멜란히톤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고 그 분노를 쏟아 부으심을 먼저 열거한다: 사 38:13; 롬 4:15; 신 4:24; 시 58:11; 시 62:12; 시 50:3,6; 나 1:2; 습 1:12; 욥 9:2; 전 8:12,13; 전 12:13,14.

 

  멜란히톤은 이 하나님의 공의가 죄인에게 마치 화살이 과녁을 꽂듯이 죄인을 공격함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악의 마음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자기의 율법을 사용한다". 그러면 이런 율법이 죄인에게 전달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인가? 멜란히톤은 여기서 설교의 직분을 언급한다. 그는 이 설교의 기원을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첫 인류에게 원복음을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에게 둔다. 그 선포 내용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죄에 대한 사망의 언도(창 3:13)와 이 사망에서 구원(창 3:15)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설교의 직분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또 그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얼마나 고귀하게 취급했으며,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하나님을 떠나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으며 죄 안에서 더 이상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음 등에 대한 것이다.  멜란히톤은 이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만일 멜란히톤이 율법의 내용을 이것으로만 끝냈다면 인간에게는 비극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에게 퍼부을 자기의 진노를 퍼부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의 속성을 언급한다. 멜란히톤이 lex moralis(도덕법)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한 지혜와 의로움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멜란히톤이 설교의 직분을 통해 율법이 선포될 때 한편으로는 율법의 제 2용도가 책망하는 기능을 발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이 전해짐을 지적한 것은 도덕법이 지닌 이런 내용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십계명을 설교하고 해석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의 죄악을 책망했지만 사도들도 십계명을 설교함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맹목적이고 거짓된 안전감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멜란히톤은 이 두 가지 내용을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으로 요약했다: "(Luk 24:47)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사함을 모든 이방인에게 전파하라, 다른 사본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그의 이름으로 모든 이방인에게 전파하라)". 즉 이것은 책망인 동시에 위로의 복음이다.

  그러면 멜란히톤은 율법의 이런 책망과 고발 정죄의 기능의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마음의 이런 슬픔을 잘 느낀 사람은 누구나 다 그것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를 다시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죽음임을 안다"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의 제 2용도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암시했다. (사실 한국교회가 알고 있는 율법은 바로 이 제 2용도인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2용도와 더불어 성령의 사역을 결부시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가 지적한 성령의 사역은 율법을 거울처럼 이용해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무능을 보게 만드는 사역이 아니고 죄인을 책망하는 사역이다. 그리고 율법의 제 2용도와 더불어 중생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로 선행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재세례파(Anabaptist)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루터가 이 재세례파들 때문에 율법의 제 3용도를 고려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특이한 것이다. 멜란히톤이 루터와 더불어 율법의 제 2 용도를 최고의 용도로 여긴 것은 바로 여기에 복음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멜란히톤에 의하면 이 율법은 하나님의 분노의 책망인 동시에 위로인 것이다.


3.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 가운데 이 '신학적 용도'를 첫 번째로 논한다(II,7,6-9).

칼빈은 여기서 이 율법의 용도의 명칭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는 모세 오경주석에서 usus theologicus(신학적 용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칼빈은 전형적인 명칭인 usus elenchticus(책망의 용도)를 기독교 강요는 물론 제네바 신앙교육서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칼빈은 갈라디아 주석에서 '교육적 용도' (paedagogicus usus)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는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율법을 파이다고스 (교육자)라 표시함으로써 '교육적 용도'를 암시할 뿐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교육자'를 '몽학선생'로 표현하고 있다.


  칼빈이 멜란히톤이나 루터의 경우 두 번째 로 다루던 내용을 왜 첫 번째로 언급하는지 우리는 직접적인 근거를 알 수 없다. 짐작컨대 기독교 강요의 내용 목차 순서의 논리적인 흐름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우리의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의 義 --즉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유일한 義--를 밝힘을 통해, 우리 각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며, 알리며, 책하며, 결국 정죄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세오경 주석에서 율법이 분노의 사역을 수행하며 우리의 불의를 들춤을 통해 사망을 가져온다고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적절하게 요약했다. 칼빈 전문가 Michael Horton은 칼빈의 말을 적절하게 잘 인용했다: "율법의 생명은 인간의 사망이다.……… 율법이 그 자신을 우리 앞에 나타나자마자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진다. ……… 이것이 율법의 신학적인 용도이다"(모세오경 1권과 3권).


  그러면 칼빈은 율법이 신학적 용도를 어떻게 수행한다고 보는가? 한 마디로 그는 루터와 비슷한 構圖로 율법이 신학적 용도를 수행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차이점은 표현방식이다. 루터의 표현이 공격의 대상에 원자탄을 떨어뜨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면, 칼빈은 상당히 온순하면서도 치밀하게 공격의 대상의 목을 죄는 법학자적인 징후를 드러낸다. 즉 그는 ① 율법의 공격 대상인 인간의 문제를 설명한 다음 ② 이런 인간에게 율법이 어떻게 간섭하며 ③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순서로 열거한다.


⑴ 칼빈은 율법의 공격대상으로서 인간의 문제점 세 가지를 지적한다(Inst II,7,6).

그것은 교만, 자만 그리고 탐심이다. 칼빈에 의하면 교만(prius)은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 정신이 마비되어 자기의 능력에 미친 나머지 우쭐해 있으며 자기의 판단기준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는 상태를 말한다.  칼빈은 율법의 제 2용도의 공격 대상을, 후자 곧 모세오경 주석에서는 "인간은 헛된 자만심으로 부풀어 있으며 의롭게 사는 공로를 자기에게 돌린다"라고 묘사했는데 교만과 자만을 말한 것이다. 그 다음 자만(superbia)은 위선을 의라고 가장하고 가짜인 여러 가지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을 반역하며(Inst II,7,6[10]) 자신은 죄악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상태를 말한다. 세 번 째는 탐욕의 죄인데 칼빈은 이 탐욕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 무엇으로 표현한다. 칼빈이 묘사한 인간의 이런 상태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의존적이 되지 못하고 자율성적인 존재로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바로 육이다. 사실 루터가 공략했던 그 대상도 바로 육인 것이다. 루터가 묘사한 인간을 고집스러움으로 거역하는 거친 존재라면 칼빈이 묘사한 인간은 교묘하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을 말한다.


⑵ 그러면 율법은 이런 인간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칼빈은 루터처럼 망치로 분쇄하는 그런 묘사를 하지 않고 율법이 거울의 역할을 수행하여 인간의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나는 듯이 묘사한다. 우선 칼빈은 우리가 거울에서처럼 율법을 통해 우리의 무력함(impotentiam)과 무력함에서 생기는 죄악(iniquitatem)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maledictionem)를 본다고 한다. (칼빈은 주석에서 부패한 인간의 특징이 '연약함'과 '무능'(아두나미아)로 본다.) 율법은 이렇게 개입하여 죄를 크게 만든다(롬 5:20). 즉 인간은 율법을 통해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고 또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닫게 되면 죄가 더욱 커진다고 한다. 이는 율법의 개입과 더불어 입법자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율법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무장시킨다. 율법이 이렇게 인간을 압박하면 두 가지 방향으로 결과가 나타난다.


⑶ 그 결과는 무엇인가?

칼빈은 악인들의 경우 그들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결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마음이 완강하기 때문에 공포심을 일으키며 율법은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화는 결과를 초래한다(II,7,7[13])고 지적했다. 칼빈은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이들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됨을 지적했는데 그 이유를 여기서는 설명하지는 않는다. 즉 율법이 우리 앞에 명백히 지시하는 복된 삶을 우리가 누리지 못한 것은 우리 자신의 사악과 부패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사망의 상태' 속에 있기 때문에 율법이 제시한 복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다음 율법은 중생한 자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칼빈은 이들이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 또는 율법이 그들에게 개입하면 "자기의 힘에 대해 어리석은 견해를 버리고 자기는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칼빈이 여기서 묘사한 것은 사실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온건하게 대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안에서 제공된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련하고 무가치한 우리 죄인들을 대해서까지 은총과 인자로 빛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이라는 상태에 있으면 율법이 부드럽게 대한다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칼빈은 이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는 데까지 인도함을 지적한다. "주여, 행동하소서, 자비하신 주여, 행동하소서, 완수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소서, 아니, 당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을 명령하소서, 사랍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입이 막히고 아무도 자기를 큰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이 작은 자가 되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알게 하소서"(II,7,9,7-8) 


  우리는 다음과 같이 칼빈이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요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위대한 체하는 우리를 작게 만들며, 우리 자신에게는 의를 얻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빈궁한 우리가 은총으로 피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한다" 율법의 신학적 용도에 대한 칼빈의 이런 발언은 그가 제빨리 성화론으로 나아가려는 인상을 준다. 만일 Beeke가 말한대로, 칼빈의 경우, 율법의 신학적인 용도가 자기 義사상과 불경건한 자기 義사상이 다시 일어서지 않도록 예방해 주며 매일 우리의 성화가 빈약함을 드러내 주고 우리 속에 육과 영 사이의 싸움을 인식시켜 준다면 이 용도는 율법의 제 3용도 내지 성화론에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 율법의 공격의 대상인 육을 말하면서 그것과 긴장 관계에 놓인 성령을 언급한 것은 성령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칭의에 관심을 집중시킨 루터와 구별되는 것이다.


  위의 세 개혁자들은 율법이 구원을 얻는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함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신학적 선상에 있다. 이들은 인간의 육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모두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언급하면서 교회 내에 있는 외식자들의 문제를 언급한 점이다. 이 사실은 현대교회가 주목해야 할 점이다. 겉으로는 기독인인데 그 삶의 방식이 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면 육신인 외식자인 것이다. 이것은 마음 구조에 변화를 받지 못했다는 말인 동시에 율법의 신학적인 용도의 심각한 공격을 경험하지 못하고 단순한 종교인으로 산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외식자 때문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는 것은 물론 선교적인 차원에서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외식자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이런 교인을 길러낸 목회자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나아가 이런 목회자를 배출한 신학교가 책임을 져야 하며 동시에 신학교에 진리가 자유롭게 연구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큰 것이다. 이데올로기 신학에 갇히어 종교개혁자들의 발언까지도 자유주의신학을 내어 몰아 세우는 풍토가 되었다면 이미 그 교단은 이단적인 기질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왜곡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옹호하는 교회지도자들 속에서 이런 위험을 보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신학을 견지하려면 적어도 신학교 내에 정직한 신학 작업이 육성되어야 할 것이다. 왜곡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말만 믿고 그들의 견해에 추종하다가 교단은 생명이 없는 카톨릭화 될 것이고 나아가 세상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다. 율법의 신학적인 용도를 배우기 위해 성경의 죄개념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필자의 눈에는 이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보인다. 만일 율법의 용도가 둘째로 끝나버렸다면 기독인의 삶은 진퇴양란에 빠져 고민할 것이다. 이제 기독인의 삶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는 제 3용도로 들어간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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