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교회의 고민과 진로 /서창원목사|개혁파 신학

 

개혁파 교회의 고민과 진로 / 서창원목사

교회가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인가? 요즘처럼 시대적 소명에 충실하자는 외침이 많았던 때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과연 교회의 시대적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원수인 불신자들, 하나님의 뜻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육체적이요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동정심(?)을 얻고자 미혹의 손짓을 과감하게 벌이는 것이 시대적 사명인가? 아니면 외딴 섬처럼 세상이라는 바다하고는 상종할 이유가 없이 독자적 행보를 가야하는가?

개혁파 교회 성도들도 분명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의 여파에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외면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의 요구와 기대하는 바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교회여야 하는가? 아니면 하늘에 속한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의 본질에 충실할 것인가? 과연 성경은 이에 대해 뭐라 교훈하는가? 또 과거 기독교 역사는 우리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라고 권면하는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자.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430년을 그것도 상당한 세월을 노예로 굴종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다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을 통해서 출애굽의 대 역사를 창출하였다. 40년이라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집트에 깊이 물든 사람들 거의 전부가 광야에서 숨지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 사람들만이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였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외였었다. 그들의 올곧은 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자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셨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살 때 과거 조상들이 살았던 이집트 땅의 풍속과 유행을 따르지 말라. 그리고 가나안 땅의 풍습도 따라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이 너희에게 일러준 규례와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로 인하여 살 것이다(레 18:1-5).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집트에서 온 몸에 익숙하게 박혀있는 풍습을 제거하길 원하셨다. 그리고 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그 현지의 유행과 풍습도 본받을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지적하셨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바알 신을 비롯한 각양 잡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로 둘러쌓여 있다. 작은 나라 사람들이 주변 나라들을 살펴보는 것은 국가를 견고히 세워가는 일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은 충분히 이웃나라들과 교류를 했어야만 했고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은 주변 나라들의 삶과는 달라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야 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다. 이 일에 잘 순응하였던 시절은 강대국이 되었고 풍요로움을 누렸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분명하게 경험하였다. 그런데도 때로는 주변 나라들과 손을 잡고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들을 받아들이는 죄를 범하였다. 어쩌면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역사가 혼합 종교를 지지한 시대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역사의 교훈이다.

신약시대라고 다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들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 것을 요구하셨다. 사도들도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가르쳤다(롬 12:2).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약 4:4). 땅에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구하라고 하였다. 아니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라고까지 말한다(골 3:5). 왜냐하면 그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이 세상에서 성도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해 주고 있는 답은 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거스리는 길이 아니라 오직 진리를 위한 길이다(고후 13:8). 그것이 종종 핍박을 받게 되고 심한 환난에 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더 좋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택한 길이었다.

이것은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을지라도 결국 그러한 교회들은 망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왕성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유토피아 건설과 유지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간직하였을 때였다. 교권이나 왕권과의 결탁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로서의 마땅히 내야할 진리의 소리를 외치는 시기가 교회가 왕성했던 때였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것과 교회로서의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에 매몰된 것은 세상의 부와 영화가 교회를 지배할 때였다. 종교개혁은 그런 교회를 벗어나 교회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진리의 재발견이었다. 그것은 교권이나 왕권과의 결탁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광야에 홀로 서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 결과 전 유럽을 놀랍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었다.

지금의 유럽의 교회가 쇠퇴하고 그야말로 세속국가로 전락된 것은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주의의 영향이라 할지라도 세상과 호흡을 맞춘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WCC운동이 추진했던 길이다. 지금은 그렇게 활동할 돈을 낼 만한 유럽의 교회들이 없기 때문에 아직은 여전히 부를 누리고 있는 한국 교회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국 교회는 우리의 위세를 자랑하고 싶어 그들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아 그들의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그 역사가 보여주는 길을 답습하고 있으니 그 수명이 얼마나 될지 참으로 난감하다. 지금 한국 교회는 돈 자랑할 때가 아니다. 숫자나 크기를 내세울 때가 아니다. 서구 교회의 몰락의 원인을 찾고 다시 원초적인 복음으로 되돌어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주의 자들의 주장과 실천을 반대하는 보수주의 교회들에게는 소망이 있는가?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기 힘들다. 개혁파 교회도 위기에 처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보편적으로 교회가 누려온 세속적 가치를 조금이라도 붙들고 있는 한 교회로서의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숫자적 가치, 크기와 부피의 위용을 내세워서 교권을 행사하려는 자들의 횡포는 개혁파 교회를 추구하는 곳에서도 그 미세한 진동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개혁파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단 돈이 없다. 그리고 숫자도 미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단계에 있지 않다. 그 보다 더 아픈 것은 개혁파 교회들의 모래알 특성이다. 이상하리만큼 하나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신 주님의 기도를 외면한다. 개혁파 교회들이 하나되지 못하는 신학적 차이는 극히 일부분들이다. 그런데도 서로 협력하려고 않는다. 자기 주도적인 일이 아닌 이상 비개혁파 교회들이 가는 길을 그대로 한다. 공동전선을 펼쳐야 할 것도 그냥 방치한다. 격려하고 협력하는 일은 도움이 절실할 때 뿐이다. 스스로 일어설 때가 되면 혼자 몸부림치는 일이 대부분이다.

오직 하나인 진리를 추구하는 개혁파 교회는 이 상황에서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 성경과 역사가 말해주는 답을 붙들어야 한다. 황량한 광야의 시련을 자원해서 겪어야 한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있으나 죽어가는 세상을 위한 살아있는 진리로 존재할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진리에 목말라하는 자들을 붙여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를 듣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개혁파 교회 목사들은 사람들의 소리, 심지어 교회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라. 오직 진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현실적 외침이 강력하다. 세상살이에 개혁파 교회라고 해서 물만 마시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물조차도 사 먹어야 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참된 생수는 진리이신 하나님만이 주신다. 그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자가 되라.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라고 여기라. 그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고 흔들림이 없이 나아가야 한다.

목회현장에서 함께 하고 있는 성도들도 그들이 사는 세상 주변을 다 보고 있다. 성도들이라고 목사들도 아는 길이와 크기와 부피가 가져다주는 달콤함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그들이나 목사들이나 다 턱밑까지 차있다. 누군가 조금만 물꼬를 터주는 일이 되면 왕창 쏠리는 현상이 드러날 것이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다. 그러나 목사들이여 정신 차리자. 그렇게 쏠려서 당장 목마름이 해결되고 당장 배고픔이 사라진다고 한들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겠는가?

이교도들도 배고팠을 때 더 도를 잘 닦았다. 교회가 배고파야 한다. 그런데 나도 그 배고픔을 자청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개혁파 목사라고는 하지만 실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청빈한 삶은 과거 17세기 청교도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었지 지금 경제대국의 반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에서는 자랑할 일이 아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노숙자들이나 하층민의 사람들에게서 복음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도리어 세상 부와 영화를 누리는 곳에서 찾아진다고 믿고 있다. 아니 복음의 출발은 가난에서부터였을지라도 복음의 결과는 소유의 많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 세상에서 낮은 곳으로, 가난하고 헐벗고 힘없고 고통 중에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해서 누가 따르겠는가? 혹독한 겨울철에 은혜의 꽃이 활짝 핀다고 주장한들 누가 그 매서운 겨울을 환영하겠는가?

개혁파 교회가 안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진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목사인 내 자신이 구별된 길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보다 안락한 도시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리이신 주님과 씨름하는 복된 시간보다 세상에서 안주하는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더럽히는 일들에 더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의 모세, 광야에서의 석청을 먹으며 고독하게 지냈던 선지자들이 걸어간 것은 더 이상 흠모의 대상이 아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좋은 집에서 살며 종종 여가 선용에 가담하는 고즈넉한 삶을 추구하는 한 구별된 성직자 상은 허울 좋은 개살구이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목사 내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그곳에서의 탈출이 쉽지 않다. 내려놓기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찬송을 쉽게 부르지 못하는 데 진리의 일군이라고 말하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다. 주님보다 귀한 것이 실제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입으로의 고백과 손과 발의 고백이 다른 삶을 사는 한 진리의 영향력은 꿈도 못 꾸는 것이다.

개혁파 교회를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까마귀를 동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지금의 우리의 목회사역을 신중하게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지금 대한민국 땅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 곳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시작도 우리가 일할 수 있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다 만드시고 그 속에서 일하게 하시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실 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도 아무에게도 문안하지도 말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평안을 빌며 그 집 주인이 주는 것을 먹고 마시되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눅 10:1-9참고). 주님께서 일군이 삯을 받아야 함을 잘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일하는 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직접 마련하시겠다는 약속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 자리 펴려고 기웃거리지 말고 환대하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개혁파 교회의 시작은 언제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그들의 헌신으로 귀한 열매를 맺었다. 안락한 교회당과 넉넉한 먹거리가 제공되는 것을 버리고 들판에서 비바람 맞으며 눈보라 휘날리는 곳에서 외로이 진리를 순종하는 성도들의 헌신 때문에 사람들 영혼 깊이 파고드는 진리의 역사를 남길 수 있었다. 그들의 수고에 후손들은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혜택을 입었다. 그러나 후손들은 그 혜택을 잡고만 있었지 나누는데 인색하였다. 더 많은 것을 탐하였다. 그것은 곧 진리를 버리는 자리로 나아갔다. 또 다시 교회는 황폐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니 찾아도 그대로 행하는 것은 더 어렵다. 바알에게 절하거나 임 맞추지 않은 남은 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은(렘 5:1)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은(미 6:8) 어떤 사람들일까? 그런 무리를 만나고 싶고 또 내가 그런 사람이고 싶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자신도 죽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그릇보다 못한 내게 복음을 맡기신 것은 살리는 영이신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필수인 것 같다. 거룩한 복음의 광채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 오 주여!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주를 인하여 기뻐하게 하소서(시 85:6).

개혁교회의 미래는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주님의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워 가실 것이다. 누가 더 주님을 잘 아는가가 우리 교회의 미래의 열쇠이지 않겠는가? 오라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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