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아더핑크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이 장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할 것은 이 책의 처음에서 여러 가지 적은 구분을 하기에 숙고한 위대한 진리를 우리 자신에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교리의 가치를 더욱 세밀하게 다룰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데 대한 정의를 하려 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는 다 우리에게 알릴뿐 아니라 역시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리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의 통치 원리를 설명하는 추상적 법칙 ...이상의 것이니 그것은 경건의 동기를 목적했고 또 그것은 의로운 생활을 추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졌고 또 그것은 우리의 반역하는 마음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겸손케 하지 않거나 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겸손케 하며 또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복종시키는데 따라서 우리의 의지는 버리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데서 우리로 기뻐서 행하게 한다.

주님의 주권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의 통치하는 능력을 행사하는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처음에 있는 장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은 신성을 의미한다. 가장 원만하고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의미하는 것은 기쁨과 맘대로 행하시는 분의 성격과 존재이다. 그런고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주권적인 그 자신을 겨눠보는 것이다. 그것은 위엄스럽게 높은데 계시는 존귀하신 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지닌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찰은 하나님에 대한 견해에 관한 경험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진 사람들을 알려주는 성구에서 배울 수 있다.

욥의 경험에 대하여 고찰해 본다면 주님이 친히 말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고 했다.

욥기 끝에서 욥이 하나님 앞에서 그를 대면하여 볼 때에 어떻게 그가 행했는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본다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습 곧 하나님이 놀라게 존엄하심을 계시하신 것을 볼 때에 욥이 자신을 미워했을 뿐 아니라 전능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었다.

이사야를 보자. 이사야서 6장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광경은 성경에도 그와 같은 것이 별로 없다. 선지자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보았으니 그 위에 스랍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외쳐 말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했다. 선지자 위에 나타난 이 광경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 결과는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한 말에서 나타났다. 거룩한 왕의 모습을 볼 때에 이사야는 티끌에 엎드리기 까지 겸손해지고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다니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말년에 다니엘은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 그는 당신의 종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세마포 옷을 입었고 또 허리에는 정금 띠를 띠었으니 곧 거룩하고 신령한 영광의 상징이다.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고 묘사했다.

그 다음에는 다니엘이 자기와 그와 함께 있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 이상의 결과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을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6-9)라고 하였다.

그런고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주권적 하나님의 광경은 피조물의 힘이 약해지게 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창조주 앞에서 티끌과 같이 겸손하게 한다. 그러면 최고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될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이 신령하고 영원한 것들에는 전연 무관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지 모른다. 전쟁터에서도 대중은 저희의 영혼 문제에 대하여는 그렇게 무관심한 태도다. 천국을 멸시하는 것이 더욱 공개적이요, 더욱 야단스럽고 더욱 대담하다. 그 이유는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8)고 하는 말씀이다.

또 근대에 와서는 성경의 권위가 그렇게도 저속해졌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일이 그렇게 적고 그의 규례들을 그렇게도 경시하여 쉽사리 내동댕이쳐 버리는지 모른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경외함을 받는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으니 망하리로다. 사람은 복되다.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하심과 그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과 그의 완전하신 의와 그의 불가항력적 권능과 그의 주권적 은혜에 관한 이상을 본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해야 될 사람들 다만 구원받지 못한 즉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구원 받은 사람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들의 구원을 이룩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이 충분한 답변이다. 신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으로 습관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칭호가 거의 다 없어진 것은 다만 어디서 우리가 이탈된 것을 보여주게 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아직도 기록되어 있는 대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라고 했다.

물론 우리가 경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이교도 사회에서 저희의 섬기는 신들을 섬길 때에 성행되는 것 같이 우리는 비굴한 경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호와가 축복하시로 약속하신 그 정신을 의미하는데, 그 정신은 이사야 선지자가 다음의 말씀에서 언급한 것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여호와)가 권고하려니와”(사 66:2)라고 한 말씀이다. 이 정신은 사도 베드로가 생각한 것으로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고 한 말씀에서 증명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처럼 경건 사상을 길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2. 전적으로 순종하는 태도

하나님을 발견하면 자신의 미약함과 허무함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생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론에 의하여 경건 사상이 추진되며 그 다음에는 이것으로 인하여 순종하여 행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본래의 악한 성품에 대한 신령한 해독제의 역할을 한다. 필연적으로 인생은 자기는 중요하다. 자기는 위대하다 또 자기는 자족하다는 사상으로 꽉 채워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밝힌 것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을 쳐다 볼 때에 크게 고침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겸손케 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인생은 자기를 섬기고 기쁘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불경건은 불순종을 낳는다. 교만한 애굽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하였다.

바로에게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은 단지 잡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여 경외하거나 봉사할 필요가 없는 무능자에 불과했다. 바로가 얼마나 잘못했고 얼마나 그것 때문에 고배를 마셔야 한 것은 그는 미구에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가 경외심이 없는 결과로 교만하게 되었고 또 그의 불경건은 신성한 존재의 왕권과 권위에 대하여 무식한 탓이었다.

만일 불경건이 불순종을 낳는다면 진정한 경건은 순종심을 낳고 또 그것을 추진시킬 것이다. 성경은 가장 존귀한 분이 주신 계시요 그의 생각을 알게 하고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정의해 주시는 것으로 아는 것은 실제상 경건의 첫걸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법도를 전능자의 법도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할 것이다. 성경은 창조주가 친히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우리 영혼에게 말하는 것으로 환영하는 것은 시편기자가 외친 것과 같이 우리도 외치게 할 것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소서”(시 119:36,133). 한번 그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당신의 말씀에 있는 규례와 법도 가운데서 사람에게 맞는 것으로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절대적으로 전심으로 그것에 순종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3.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은 모든 불평을 제외한다. 이것은 분명하나 그 사상은 고려할만 하다. 환란과 손실에 대하여 불평을 품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마음이 끌리는 것들을 빼앗긴 때문에 불만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유물은 무조건 내 것이라는 버릇이 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잘 알고 부지런히 실천시킬 때에 성공할 수 있고 힘써서 일해서 [재산]을 저축한 때에는 그것을 보관하며 즐길 수 있고 또 우리가 행복된 가정의 분위기에서 살고 있을 때에 아무도 합법적으로 침입해서 사랑하는 식구를 구타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 또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에서 실망이나 파산이나 또 사망이 실제로 올 때에는 잘못된 인심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반항하게 된다.

그러나 은혜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불평은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또 우리가 전연 받아야 될 환란을 받지 않게 함을 알게 된다.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은 하나님에게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다루실 권리가 온전히 있는 것을 공공연하게 시인할 것이다. 전능자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대로 우리를 대하실 절대적 권한이 그에게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만일 그가 가난이나 질병이나 가정적 사별을 보내시기로 하거나 심지어 마음이 매우 고통을 당할지라도 세상 모든 것의 심판장에게 잘못하심이 있겠는가 하고 우리는 말해야 될 것이다.

때때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은 신자들에게 육에 속한 마음이 이 세상 순례 생활의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 충돌이 있을지라도 참으로 이 진리에 굴복한 사람에게는 옛날 거친 게네사렛 호수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요 또 그의 속마음에서 노도와 같은 홍수라도 잔잔해 질 것이요 또 순종하는 영혼은 눈물과 신앙으로 가득찬 눈을 들고 이르기를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순종한 사람의 놀라운 실례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엘리의 사적에 의하여 제시된다.

삼상 3장에서 알려진 대로 하나님이 소년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그는 엘리의 두 아들이 악행한 것 때문에 죽이려고 하신 것을 그에게 알리셨다. 그 다음 날에 사무엘이 이 소식을 연로한 제사장에게 전달했다. 경건한 부모의 마음에 더욱 무서운 소식이 들림에 대하여는 상상하기 곤란하다. 여하한 경우에서든지 그의 아이가 갑자기 죽을 것이라는 말은 어떤 아버지에게든지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이 젊은 나이에 전연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는다는 것은 반드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비참한 소식을 사무엘에게 들었을 때에 엘리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는가? 그때에 그가 어떻게 대답했는가?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라고 대답했고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놀라운 순종이요 뛰어난 순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의 가장 강한 애정을 주관하시고 반역하는 생각을 굴복시켜서 여호와의 주권적 의지를 불평 없이 알게 하는 데에 귀한 실례이다.

똑같이 놀라운 실례가 또 하나 있으니 욥의 생활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잘 알려진 대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미워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일찍이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기를 기대할만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욥이었다. 얼마동안 그에게 운(運)이 터졌으니 주님이 그에게 칠남 삼녀의 대가족을 허락하셨고 그가 큰 부자가 될 때까지 이 세상 물질로 풍성하게 하셨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생애에 액운이 덮여졌다. 그래서 하루 사이에 욥은 재산뿐 아니라 그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다 잃어버렸다. 그의 가축이 다 도둑을 맞았고 그의 자녀들은 다 큰 폭풍에 의하여 살해됐다는 비보에 접했다. 이 소식을 들을 때에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의 놀라운 말을 들어 보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그는 여호와의 주장하시는 뜻에 순종했다. 이것은 곧 그가 당한 환란을 그렇게 되게 하신 분을 더듬어 찾아낸 것이다. 그는 자기의 가축을 도둑질한 스바 사람들의 배후와 그 자녀들을 죽게 한 폭풍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봤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또한 만족했으니 그가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으니 이것은 놀라운 순종이요 완전한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인정하므로 우리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보류해두게 한다.

저자는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생긴 한 사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별세하고 그의 장자 에드워드의 대관식 일자를 1902년 4월로 정했다. 이에 대하여 발송된 모든 초청장에는 즉 “D.V -Deo Volente, 하나님의 뜻이면”라는 이 두 자가 빠졌다. 이 큰 예식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세계 각국의 군왕들은 다 이 초청을 받고 영국 왕의 대관식에 참예하려고 했다. 왕자의 선서문도 다 인쇄하여 비치해 두었다. 그러나 이 저자가 아는 대로는 이 D.V.라는 두 문자는 그 어느 한 문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가장 훌륭한 예식 차례가 다 예비 되어서 정한 시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여왕의 장남이 대관하고 에드워드 제 7세라 칭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이 간섭했으므로 사람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적은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네가 나를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했을 때에 왕자는 맹장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니 그의 대관식은 여러 날 동안 연기되었다.

이미 설명한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보류해 두게 된다. 그래서 거룩한 토기장이는 절대권으로 가지시고 진흙을 가지고 당신의 왕권적 임의로 그릇을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된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 교훈에 주의하게 된다. “너희 가운데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 4:13-14)는 교훈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살든지 저기에 살든지 내가 사는 한계를 정하신 이는 그분이시다(행 17:26). 가난하게 살든지 부하게 살든지 건강하든지 않든지 내가 살 환경도 그분이 결정하신다. 내가 들의 꽃과 같이 소년 시절에 요절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70년을 계속하여 살든지 얼마나 오래 살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그분이시다. 진정으로 이런 교훈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학교에서 고등 교육으로 얻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배웠다고 생각할 때에도 재삼 재사의 교훈을 다시 받지 않으면 안될 것을 발견한다.

4. 깊이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태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 가장 복된 진리를 알아보는 것은 할 수 없이 경외하는 것과 매우 질이 다르다. 이 멸망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철학에 의하면 악 조건을 잘 이용하는 것 이외에 별도리가 없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 세계관이 훨씬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므로 우리에게 경외심과 전적 순종과 온전한 순종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시편 기자와 함께 “내 영혼아 영호와를 찬송하라 내게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기 위함이라”라고 말하게 한다.

사도 바울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심령 상태가 매우 자주 시험을 받는 것이 이 점이다. 우리 각자에게 자행(自行)자지(自止)-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아니 함- 하는 일이 매우 많으니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원대로 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매우 감사함을 돌리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이 우리의 계획과 소원에 반대로 될 때에는 어떻게 하는가?

참 신자가 기차 여행을 할 때에 그의 목적지에 도달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의당 할 일로 안다(그것은 물론 그가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차의 기관사와 화부와 신호사 등등에도 마땅히 감사해야 된다). 또 사업에 있어서 잘 팔린 주말에 가서는 모든 좋고(세상에서) 또 모든 온전한(영계에서) 은사를 주시는 분에게 감사한다(그것은 또한 그가 모든 고객을 당신의 상점으로 인도했다는 의미이다).

여기까지는 좋고 또 그런 경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탄 기차가 연착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다른 기차와 충돌이 되어서 내가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자. 또 내 사업에 수지가 없다거나 점포가 벼락을 맞아서 홀랑 타버렸다거나 도둑을 다 맞았다고 하자. 그때에는 어찌할까?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내가 아직도 보고 있는가?

욥의 경우를 또 한 번 생각해 보자. 손해에 손해가 꼬리를 물고 그의 앞길을 가로 막을 때에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의 불행을 괴로워하고 있었는가? 도둑놈들을 욕하였는가? 하나님께 불평을 말했는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고 순종하였다. 우리는 모든 것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것을 배울 때 까지는 진정으로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반드시 계속해서 역사해야 된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맹목적 인정인가 치명적 묵인인가 그것과는 퍽 다르다. 신앙은 확실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한다. 그러니 신앙은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활동하는 신앙은 “항상 주안에서 기뻐할”것이다(빌 4:4).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인정된 것에 주의하여 보기로 하자. 그것은 경건과 전적 순종과 온전한 순종과 깊은 감사와 기쁨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최고로 또 온전히 예시된 것을 주의해 보자. 모든 일에 있어서 주 예수님은 우리가 좇아가야 될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처음에 말한 제목과 관련하여서도 사실로 그러한가? 경건이라는 말이 그의 비할 수 없는 이름에 관련된 일이 있는가? 경건은 노예적 공포가 아니라 친속적(親屬的) 순종과 존경을 의미하며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 지혜가 육신으로 탄생하신 분과 관련함에서 경건에 대하여 하등의 언급된 것이 없다면 라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고 하였다. 예수로 하여금 그의 소년 시절에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케 한 것이 경건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 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라는 말씀에서 그가 행하신 것이 경건이 아니었는가?(하나님에게 친속적 복종과 존경).

사단이 예수를 시험하여 자기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할 때에 “기록하였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하게 한 것이 경건이 아닌가?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마 8:4)고 말씀하게 한 것이 경건이 아니었는가? 그러면 왜 실례를 더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사 11:1,2).

예수께서는 성부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였다. 바로 하나님의 형체이신 그로 하여금 심히 낮아져서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순종하실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온전한 종으로서 그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셨다. 얼마나 온전하고 전적인 순종이었는지는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고 한 말씀에서 알게 된다. 이 순종의 태도에 대해서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성자가 성부의 뜻을 절대로 순종하신 일에 대하여는 두 분은 온전히 일치하신다는 것 이외에 할 말이 없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고 하셨다. 또 그가 어떻게 그 주장을 충분히 실천하신 것은 성경에 지시된 대로 그의 자취를 주의 깊게 따르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그의 모습을 보면 성부의 손에 들려 있는 그 쓴 잔은 그의 생각을 보여 준다. 그의 태도에 잘 주의하여 보자. 마음이 겸비하신 그를 배우라.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육신 즉 온전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심을 기억하라. 그는 전신을 떨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육체적 수난을 정관하고 계시며, 그의 거룩한 성품과 육감적 성품은 그를 압박하고 있는 무서운 모욕 때문에 위축되고 있으며 그의 마음은 그에게 임할 무서운 비난 때문에 고통스러우며, 그의 생각은 어두움의 권세와 일대 충돌을 예측하므로 심히 괴로웠고 무엇보다도 최고로 그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공포에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부에게 자기의 영으로 크게 외치며, 말하자면 피땀을 흘리셨다). 오히려 벅찬 마음으로 그의 복된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들어보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복종이 실천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순종하신 것이 최고로 예시되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반드시 좇아야 할 모본을 남겨 주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범하시지 않고 사람의 성품을 지니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위에서 물어본 대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뜻에 절대로 순종하신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더 대답한다면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고귀하심이 비할 데 없다.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탁월하시다. 주 예수님에게는 꺾어야 될 반역적 의지가 없으시고 그의 마음에는 복속시켜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언적 언사에 있어서 그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벌레에는 반발하는 힘이 없다).

그가 이르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이다”(요 11:34)라고 하실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반발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하신 것은 그가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와 온전히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의 비할 데 없는 탁월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법을 우리 생각에 두시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셨으나(히 8:10 참고) 그의 법이 벌써 그리스도의 심중에 있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감사하고 기뻐하심에 대한 실례가 마태 11장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관찰하는 요점들은 첫째로 그의 선구자의 신앙이 약함과(12,13) 다음으로 백성의 불만 즉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나 요한의 장엄한 소식에도 만족하지 않았다(16,20). 셋째로 우리 주님이 가장 많이 역사하신 성읍들이 회개하지 않았다(21-24).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니이다”(25)라고 하셨다.

눅 10장에 있는 병행 구절은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 하사 가라사대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된 점에 주의하라. 여기에 순수하게 순복하신 것이 있다. 여기에 천지를 지으신 분이 있는데 그가 오히려 그의 낮아지신 시대와 또 버림을 받은 마당에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천지의 주재의 뜻에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로 한다.

5. 숭경(崇敬)하는 태도

“참된 경배는 위대성을 인정한 경배이며 위대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그런고로 이외의 다른 형식으로 사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J.B. Moody)고 한 것은 바로 말한 것이다. 거룩하신 왕이 당신의 보좌에 앉아 있을 때에 스랍들도 “그 얼굴을 가리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잔인하게 독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의로우시므로 불의하게 행하시지 않는다. 여기에 이 진리의 고귀성이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뜻은 배격할 수 없고 번복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만도 우리에게 경외심을 채워 주시나 하나님의 뜻은 다만 착한 것만을 원하신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내 마음에는 기쁨이 차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질문한 것에 마지막으로 대답할 것이 있다. 그 질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의 태도다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맞게 취해야 된 태도는 경건과 전적 순종과 무조건 복종과 부속함이다. 그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과 주권 자체가 내 성부라고 하는 생각이 내 마음에 충만해서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려 숭경하게 한다. 언제나 우리는 "아버지여 그래도 당신이 보시기에 이것이 합당하나이다"고 해야 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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