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필요성(아더 핑크)



중생의 필요성(아더 핑크)


 인간은 본래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것에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시 51:5),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사 48:8)이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자들이다.(딛 1:16)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것에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시 51:5),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이다.(사 48:8)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다.(딛 1:16)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일을 자발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타락한 상태에서의 모든 의지의 동기는 

올바른 원리를 따르지 못하고 올바른 목적을 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죄악일 뿐이다. 

인간을 제멋대로 놔두고 율법과 질서가 부여한 모든 제한을 풀어놓는다면,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급속히 짐승보다 못한 수준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는 선한 일에는 부적당하고, 기꺼이 하려고 들지도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자신의 이상에 들어맞는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아래로 잡아끌고 악으로 향하게 하는, 

즉 그것을 이기려고 애써 대항한다 해도 

여러 형태를 취해, 다소간에 자신을 정복하고 마는 이상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친구들의 친절한 경고와 하나님의 종들의 충성스러운 경고,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엄숙한 실례들, 여기저기 놓여 있는 질병과 죽음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호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굴복해 버리고 만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기 전에 

그 사람 안에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 땅에는 저주가 내려져 있기 때문에 

땅이 인간의 타락 이전의 상태와 같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일반적인 죄악에 붙잡혀 있는 인간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는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롬 7:4) 

그는 다른 줄기에 접붙여지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도 그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아니다. 

영적인 행동의 원리를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겠는가? 

영적인 생명을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겠는가? 

잔인하고 악마같은 본성을 가진 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전적 부패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그의 마음은 사탄에 의해 혼미케 되었고(고후 4:4)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창 6:5) 

그의 성향은 변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이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 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와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 안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 

근본적이라는 단어는 ‘뿌리’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왔으므로, 

우리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인간 안에는 그의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죄가 흘러나오는 뿌리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높은 곳으로부터의 능력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만이 인간을 재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 3:7)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고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전능하신 능력이 그를 살릴 수 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던 날에 그는 영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소유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후손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로 태어나게 되며(엡 4:18)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 

이것은 단순한 말의 비유가 아니라 엄숙한 사실이다. 

모든 아이는 영적인 생명의 불꽃을 단 한 줄도 받지 못하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왕국(롬 14:17)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그곳에 맞는 상태로 태어나야 한다. 

만일 주님의 백성과 이 세상사람 사이에 아주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니신 영광을 어떻게 상상이나 하며 

어떤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두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즉 양과 염소가 본성이 서로 다른 것처럼 

모든 차이가 생기게 하는 원천인 본성이나 기질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그들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중보적인 사역은 이 한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는 

그의 백성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또한 하나님께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의 예언자로서의 임무는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그의 왕으로서의 임무는 

그들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과 거룩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기에 합당하게 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격들을 주고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나눠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다.”(딛 2:14)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고전 6:9) 

그러나 많은 이들이 미혹받았고 

특히 바로 이점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문제에 있어서 미혹을 받았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에 신앙을 고백하는 수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헛되고 거만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제멋대로의 그리고 자신만을 즐겁게 하는 삶을 계속하면서, 

자비를 기대하며 미혹당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매일 지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는 환상에 빠진다. 

그가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서(in)가 아니라 

그들의 죄로부터(from)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마 1:21), 

이것은 그들을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도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시 36:2)라는 이 엄숙한 말씀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고 있는가? 

사단이 주로 사용하는 책략은, 

사람들이 세상과 하나님을 성공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고 

성령에 따르면서도 육적인 일을 허용하여 ‘두 세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다는 상상에 

사람들을 빠뜨려 미혹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마 6:24)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찌르는 이 말씀의 참된 뜻을 오해한다. 

즉 정말로 강조된 점은 ‘둘’이 아니라 

‘섬긴다’는 데에, 즉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섬김을 받기를”, 즉 두려워하고 복종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감찰하신다.(삼상 12:24-25을 보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인간이 하나님께 부적합하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인간이 영적인 본성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영적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 

이 영적 본성만이 영적 세계에 속한 일들을 즐길 수 있는 적성과 자격을 부여해 준다. 

그런데 자연인은 이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깨닫지”도 못한다.(고전 2:14) 

그는 그것들을 사랑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요 3:19) 

또한 의지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노예가 되었으므로(엡 2:2,3) 

그것들을 바랄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지식이 초자연적으로 계몽되고 

그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그의 의지는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죄인이 중생하기 전까지는 

그 죄인과 함께 한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접촉점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중요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 않은 두 개의 집단은 법적으로 서로 연합할 수 없다. 

본성에 있어서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은 함께 연합되어질 수도 있지만 

서로 다른 본성은 연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아담’과는 같은 본성을 가지고 서로 연합되어 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과는 새로운 본성이나 원리가 없이 

어찌 그와 연합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살아있는 혼으로 첫 번째 아담과 연합되어 있으므로 

살려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마지막 아담과 연합되어야 한다. 

하늘의 형상이 없이는 하늘의 아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전 15:48,49) 

우리 주님의 지체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머리에게 전하여진 것과 꼭 같은 

거룩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눅 1:35) 

이 둘 속에는 한 ‘영’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쓰여 있다.(고전 6:17)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롬 8:9) 

생명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다른 것과 생명의 연합을 이룰 수 없다. 

머리는 살아있는데 몸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새로워진 영이 없이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자신의 율법과 거룩함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같은 피조물과 교제를 나눌 수 없으며, 

인간도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 뿌리박힌 반감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본성의 철저한 변화를 겪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빛과 어두움이, 그리고 살아있는 하나님과 죽은 심령이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인간은 죄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사랑하시나 인간은 그것을 미워한다. 

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다.(엡 4:18)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생명이 회복되어져야 한다.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하고 이제 모두 새로워져야 한다.(고후 5:17) 

복음적 의무는 중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첫째 내용은 자아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기”(딤후 3:2) 때문에 

타락한 인간본성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영이 새로워지기 전까지는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언약은 

“내가 그들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겔 11:19)

모든 복음적 의무는 마음의 유연성과 부드러움을 요구한다. 

교만은 마귀를 정죄하는 정죄(딤전 3:6)이며 

우리의 첫 조상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창 3:5) 부푼 욕망 때문에 타락하였다. 

그 때 이후로 인간은 

더욱 높아지고 싶어 하고 너무나 고집이 세고 

복음이 요구하고 있는 요소들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복음적 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 


복음이 주요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영광되이 하는 것을 다 물리치고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게 하는 것이다.(고전 1:29-31) 

그러나 이것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녹아지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다시 만들어질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본성이 없이는 우리는 복음이 요구하는 의무를 계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롬 8:5) 

그런 마음은 영적인 일에 오랫동안 종사할 수 없다. 

양심의 가책, 지옥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시적으로는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그것들이 지속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돌밭도 싹을 낼 수는 있으나 뿌리가 없으므로 곧 말라 버린다.(마 13장) 

돌을 하늘 높이 던질 수도 있으나 결국 그것은 땅에 떨어진다. 
자연인은 한동안 종교적인 열정에서 높게까지 올라갈지도 모르지만 

이스라엘에 대해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이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7)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에 대해서도 조만간 그런 평가가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육으로 끝나고 만다.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만 그 일은 지속될 것이다.(전 3:14, 빌1:6) 

중생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것과 같이 

하늘의 영광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도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힘과 신선함은 바로 그 중생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노쇠하였거나 연약한 사람은 그 약속된 땅에 한 사람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즉 애굽의 본성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과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고통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양파와 마늘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오직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을 때 그들을 격려하던 두 첩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옛사람을 보유하고 있고 종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지만 

오직 새로 태어난 피조물만은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다. 

하늘은 불결한 자가 아니라 거룩하게 된 자가 받을 기업이다. 

“그들이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되리라”(행 26:18) 

율법 아래 있었던 제사장은 자신을 성결케 하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사람들 또한 성결케 되어지지 않고는 예배하는 무리 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예수님의 피로 뿌려지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지성소에 접근할 수가 없다.(히 10:22) 

천국은 준비된 자에게 예비된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다.(요 14:2) 

누구를 위해서인가? 

주를 좇기 위해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이다.(마 19:27)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고전 2:9)를 위해서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영적인 일들의 무한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그리고 영적인 일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크게 여기지 않는다.(빌 3:8) 

하나님은 그의 가장 큰 행복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그 자신의 유일한 규칙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일이 그의 주요 목적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기질 그 자체가 변한 것이다. 

인간이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중생한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고 쓰여 있다. 

어느 누구도 거룩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자들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빛 안에 있는 기업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는 한 그 기업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후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고 

또한 우리도 죄에서 부활되지 않고서는 하늘에 들어갈 수가 없다.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와 아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과 같이 우리의 허물을 없애는 것이다.(사 44:22) 

왜냐하면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사 58:2)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요한복음 3:36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기뻐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청결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이 ‘청결한 마음’은 죄로부터 깨끗하여지고 그 앞에 거룩한 목표를 가지게 된 마음이다. 

‘청결한’ 마음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이끌리고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불완전한 거룩함을 참지 못하시며

그 불완전한 거룩함을 불필요한 “엄격함” 또는 청교도적 광신이라고 꾸짖으시는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얼굴은 의로운 중에만 볼 수 있다.(시 17:15)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어떤 사람도 그 자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 

즉 죄로부터 거룩함에로의 변화를 겪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도 없고 

영원히 하나님의 존전에서 행복할 수도 없다. 

이 변화는 타락하게 되었을 때처럼,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에까지 이르러 

우리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우리 마음의 어두움을 벗겨내고, 

양심을 일깨우고 

평화롭게 하며, 

우리의 감정을 영적이게 하고, 

의지를 변화시키며, 

우리의 전 삶을 개혁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 큰 변화는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나야 한다. 

영혼이 하늘로 옮겨진다고 해서 중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소가 하나님의 형상을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천사들이 타락하였을 때, 그들은 하늘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의 영광이 그들을 회복시키지는 않았다. 

사단은 하늘에 들어갔었지만(욥 2:1) 아무 변화도 겪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한 영혼이 하늘나라에 합당해지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셔야 한다. 

육체가 하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변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은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기”(계 21:27) 때문이다. 

그런데 사악한 자들은 주제넘게도 천국에 가기를 원하면서도 

이 땅에서는 그 거룩함을 멸시하고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주민들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함을 분명히 보게 되며 

그와 지극히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내적인 존재(외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가 

근본적이고 혁명적이며 초자연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는 

이것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여기 이 지상에서 

자신의 삶의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거처를 준비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잠 1:26)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서 찬미의 가락을 울리기에 합당하도록 

이 지상에서도 찬미로 가득차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과 행복을 (마치 죄와 비참을 그렇게 하셨듯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곳이 양심의 채찍질과 하나님의 거룩함의 고통스러운 불로부터 피할 수 있는 

은신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먼저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은 (행 26:18)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죄의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는 (미 7:19) 

하나님이 그들의 허물을 없이 하신다. 

죄를 용서하고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은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처럼(요 19:34)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하늘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 그 곳을 위한 한 자격이 되듯이, 

심령으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엡 4:23-24)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죄인은 용서함을 받음으로 

왕의 존전에 서서 그의 식탁에서 시중들 수 있는 자격은 얻을 수 있으나 

그의 악취나고 해충이 득실거리는 옷을 벗어버릴 때까지 

그에 합당한 존재는 되지 못한다.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며 위험한 가정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은 

바로 “중생의 씻음”(딛 3:5-7)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구원받은 자 안에 내주(內住)하신다.(갈 2:20) 

그러나 그가 영적으로는 

냉담하고 완고하고 생명이 없는 채로 남아 있는 마음 속에 

거하시는 일은 불가능하다. 

거룩함의 최고의 모범이신 이가 방종한 자의 후원자가 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어떤 사람이 죄책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때 

그는 또한 죄의 지배로부터도 구원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영혼이 중생하기 전까지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되어야 했던 것처럼(롬 8:3)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기 전에(고전 5:2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5:17)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전 1:4)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할 수 있기 전에 범사에 인간들과 같이 되심처럼 

실제적이고 크게 필요한 일이다.(히 2:14-17)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그는 죄의 나라로 들어올 수가 없다.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는 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즉 모든 의지의 신성한 전권대사이며 집행자인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성육신과 인간의 중생을 이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가 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의 아들들이 의롭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죄 속에서, 즉 자신만을 즐겁게 하며 소비해 버린 사람이 

어떻게 그 지극히 거룩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깜깜한 어둠만을 보아왔던 눈이 

갑자기 한낮의 밝은 빛을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이 되듯이, 

중생하지 못한 자가 빛이신 자를 바라볼 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광경을 환영하는 대신에, 

“땅에 있는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할 것이다”(계 1:17) 

실로 그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고 할 것이다.(계 6:17) 

하나님이 당신을 중생시키지 않으신다면, 

바로 당신이 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더 핑크의 ‘구원의 교리’ 중에서


 

첨부파일 중생의 필요성.hw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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