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서론 / 아더 핑크

 

서론적 고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의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식에 부응하는 양심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빛나는 소망은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순종에 대한 확실한 방법도 모를 것이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는 있어도 지식이 없는 행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원래 우리 마음속에 기록된 본성의 율법을 우리가 더럽힘으로써 그 계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십계명에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십계명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십계명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던 모습은 엄숙했고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으로 가득 찼다.
먼저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 전에 외부적인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갖기 위해 이틀 동안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출 19:10,11).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기다리게 되거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기 전에 몸과 마음의 신중한 준비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자신들을 성결하게 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하늘에 계신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강림하셨던 산은 지경이 정해져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거룩한 산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금령이 있었다. (출 19:12,13)
이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최상의 존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그의 율법의 엄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여호와께서 그의 율법을 전수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던 두려운 현현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출 19:18,19).
여호와의 현현의 그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의 전수에서도 그렇게 무서운데 율법을 어김으로 우리에게 심판하러 오신다면 그 무서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의미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전달하셨을 때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와 통역자로 일해 달라고 간청했다. (출 20:18,19)
이는 율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직접 전달된다면 그것은 정죄와 죽음의 역할을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이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달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고 지키게 된 것이다. (고전 3:19, 갈 9:21, 갈 6:2)
따라서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서 두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율법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래가 악하여 하나님의 손가락 외에는 누구도 그의 율법의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돌판들은 모세의 거룩한 분노로 말미암아 깨뜨려져서(출 32:19) 하나님이 다시 기록하신 것이다.(출 34:1)
이것은 자연의 율법 창조시 우리 마음에 기록 되었으나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을 때 깨뜨려졌고 중생 시 우리 마음에 다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10:16).
그러나 혹자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아무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속박의 멍에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십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주셨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는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십계명의 권위를 인간의 양심에 부과하려는 시도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질문에 우리는 흔히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마 5:17,18).
진실로 그리스도인은 행위언약이나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활의 법도와 거룩케 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십계명의 독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는 이 독특성이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 두렵고도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내산 하나님의 계시는 오는 모든 시대에 섬겨야 할 인간 의무를 집대성하였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에 특별하신 중요성을 부과하셨는데 그 공포 모습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십계명은 구름과 어두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의 무시무시한 부대현상과 함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 왔으며 그렇게 들려진 신적 계시는 유일무이한 부분들이었다. 어떠한 의식법이나 시민법도 이렇게 독특할 수 없었다.
그 열 가지 말씀들, 그것만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판 위에 쓰여 졌으며 그것만이 보호되기 위해 언약궤에 넣어졌다. 이와 같이 십계명에 부여된 유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우리는 극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십계명의 원천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십계명의 서두에 아주 보잘것없는 관심을 가져 왔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아무리 웅장한 권위가 율법의 공포 때에 수반되었다 해도 율법의 원천은 사랑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율법은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운 구속자이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즉, 그의 성품)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분명히 이해함으로 얻어지는 결론이자, 원리는 다음과 같다. 즉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일치하는 생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심은 사랑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기초로 자기 백성에게서 사랑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함을 받는 백성들 사이에 일치와 동일함이 있게 된다.
제 2 계명 후반부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순종이란 오직 사랑하는 데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필요조건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요약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

넷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십계명이 모든 세대를 거쳐 각 사람들을 얽매고 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밝혀진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해 확고부동한 표현이 있지만 모든 도덕적 행위(moral agent)위에 십계명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율법(다스리시는 법도)이 폐지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특성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하며 그로부터 인간은 계속적으로 율법에서 떠남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피조물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도덕적 율법이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방인들에게 바울 사도가 특별히 “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는 의문을 제기하고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는 율법을 세우느니라.”라고 자문자답했다(롬 3:31).

마지막으로 율법의 영속성은 그의 백성들이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심으로 유지된다. (렘 31:33, 겔 36:26,27)

다섯째, 도덕률이 십계명의 숫자에 있어서 열 가지가 완전할 수가 있겠는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성경상에서 “십계(十戒)”(출 34:28)라고 언급되었는데 열이란 숫자는 전체가 필요한 것들로서 완전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이 그렇게도 여러 번 계속되었다는 점은(10번 재앙이 내림) 하나님 심판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숫자의 상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의 범죄가 열 번에 이르도록 허용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열 번이나 죄를 범했기 때문에(민 14:21) 죄악의 모든 분량을 채웠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십일조, 혹은 십분의 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며 모든 소산은 십이라는 숫자로 표현되고, 이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있다는 표시로 주께 바쳐진다.

여섯째, 십계명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 행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신 것에는 특별한 뜻이 계셨다. 이러한 의도는 표면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를 한 데 묶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후자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대해, 후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주관자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한다면 우리 이웃에게 아무리 예의바르다 해도 그러한 의는 철저히 무가치하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처럼 된다 해도 이는 역시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 내가 음행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위안 받으면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거부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의무가 첫 돌판에 기록된 것은 칼빈이 일컫는 바와 같이 그 계명들이 ‘종교의 제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활기’를 이루는, 즉 ‘종교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경배함이 없이는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평등도, 사랑도 무익한 것이다. 경건치 않은 인간들이 제 아무리 자기들끼리 실시하는 정의가, 자비가, 인내가 있다 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우리가 옳고 그름의 주관자로 그를 공경한다면 우리는 이웃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5계명이 첫 돌판에서 끝났는지 둘째 돌판에서 시작되었는지 하는 십계명 구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대는 부모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고 성경상에서도 부모를 이웃과 동등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첫 돌판의 다섯 계명이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으나 나머지 계명들에게서는 그 어디에도 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율법이 신령하다”(롬 7:14)는 것은 율법이 신령한 입법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단순히 외부적인 복종보다 더한 것 즉, 인간 마음의 순종을 가장 철저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가 십계명을 얼마나 지키지 않는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에서”(시 51:6) 진실을 요구하신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조그만 탈선해위도 금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가장 은밀한 성향과 의도를 감찰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성과 사랑과 의지를 거룩한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율법의 기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까지 인간의 영을 주장한다고 장담한 법은 없었으나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의 깊은 마음속을 감찰한다. 이러한 율법의 영적인 면은 예수께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분노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관계로 명백해졌다.

“여덟째, 우리는 십계명의 임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오직 의(義)이지만 우리에게는 불의(不義)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죄는 우리의 판단을 어둡게 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고, 잘못된 자신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율법의 높고 거룩한 요구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더러움과 허물과 오만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능력의 부족을 의식하게 된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2권, 7장 7절) “이와 같이 율법은 일종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얼굴에 묻어 있는 오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속에서 우리는 첫째 우리의 무능을, 둘째 우리의 허물을, 셋째 이상 두 결과로 인하여 저주를 알게 된다.”라고 잘 표현했다.
율법의 두 번째 임무는 악인들을 경고한다. 악인들이 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지라도 형벌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악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사회에 유익이 된다. 세 번째,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되는 것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지켜주는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십계명의 상벌에 대해 생각하자. 여호와는 우리를 죄의 예속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의무를 감당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엄숙한 광경을 보여줌으로 그들 마음속에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셨다.
그 다음에 그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약속과 경고의 말씀을 후반부에 추가시키셨다. 이는 우리가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기쁘게 순복하며 그가 금하신 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헛되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반역자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 번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계명의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 119:96)라고 했다. 도덕적 율법은 대단히 넓어서 그 권위가 우리 생활의 모든 도덕적 행위에까지 미친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십계명에 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우리를 경고함으로 자극하고, 약속함으로 우리를 달래며, 경고함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실례들을 취하여 전자는 고무시키고 후자는 금지시킨다.
신약의 명령들은 단지 십계명에 대한 설명, 확충 그리고 적용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자. 특별히 명령되거나 혹은 금지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이는 형식적으로 말하는 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나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각각의 계명들에 있어서 주요한 의무나 죄악은 그보다 사소한 것들의 전형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타난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관련된 원인까지도 포함된다. 어떤 죄가 거론된다 해도 그러한 죄의 원인과 결과와 동일한 종류의 모든 죄는 금지된다. 그리스도께서도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분노도 육 계명에 저촉된다고 설명하셨다.
둘째 어떠한 악이 금지되면 그 반대로 선이 요청되며, 어떠한 선이 명령되면 악은 정죄 받는다. 이를테면 제 3계명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망녕되이 일컫게 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 결과로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시는 것이다.
제 8계명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금했던 것은 그 반대의 의무, 즉 우리가 일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는 대가를 주신다는 것이다(엡 4:28).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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