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나올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는 신앙생활이란 영적 전쟁을 치르는 싸움터에서 진군하는 용사들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성도이기에, 날이면 날마다 치러야 하는 영적 전투는 참으로 치열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여서, 믿음이 좋다고 하여서, 시련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악으로 악을 갚을 수 없기에 더욱 절박하다.

물론,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십자가로 이겨놓은 싸움에 우리는 그저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마지막 승리는 이미 획득해 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까지 가는 동안, 성도의 길은 여전히 악전고투의 연속 선상이라고 하여도 결코 무리한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잘 된다.”라고 말하지만, 글쎄, 그 잘된다는 것이 어느 선에서 어떻게 잘되는 것인지, 때때로 막막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은 세상으로 변한지 오래다. 온갖 불법과 불의가 대세를 이룬다. 이런 험악한 말세를 살아가는 현대 성도들에게나 과거의 성도들에게나 당해야 하는 환란과 어려움은 세상 불신자들의 생활보다 어쩌면 성도이기에 더욱더 극심할 수가 있다. 구약의 요셉이 그랬고, 신약의 바울 사도가 그랬고, 초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러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때로는 나의 실수로, 때로는 전혀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오해를 사거나 이런저런,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잦고, 그로 말미암아 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 속, 믿음의 용사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특히, 구약의 왕들 중 ‘여호사밧’과 그의 ‘브라가 골짜기’의 전술(?)과 막강한 전승 기록을 읽게 되었고, 그 방법을 내 삶에 적용시킨 후, 환난과 시련 앞에서, 그토록 두렵던 마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되었으며, 하늘의 평강과 축복을 누릴 수 있었기에 우리 독자님들에게도 이 브라가 골짜기의 비밀을 잠시 소개하고 싶어진다.

역대하 20장에 나오는 “브라가 골짜기”의 전쟁은 다른 말로 ‘드고아 전쟁’이라고 불리는데,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던 때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악명 높은 '아합'이 다스렸고, 남 왕국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사밧’왕이 다스리던 때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거하던 그때, 모압, 암몬, 마온 몇 사람들이 동맹을 맺었고, 시쳇말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유다 나라를 치려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 왕 ‘여호사밧’은 크게 두려워했다.(대하 20: 3) 갑자기 몰려온 연합군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떨고 있던 그는 이 문제야말로, 여호사밧 왕,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인 것을 판단했던 듯, 그는 직면한 문제를 들고 조상적부터 섬겨 오던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온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나이다 우리는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 대하 20: 3-13절)

여호사밧 왕은 이렇게 국가의 위기 앞에서 자기 자신도 기도했지만, 온 백성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선포했음을 보면서 지도자의 선이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지도자란 난제 앞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혜와 통솔력이 필요한 것이다. (작은 단체건 큰 단체건 지도자는 한 두 사람의 말만 듣고 움직이면 안된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이 전술적 지략이라고 내놓은 것이 “백성들아, 금식하며 기도하라.” 라고 하는 것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말을 현대 지도자가 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정신병자라 치부하고 말았을 법한 희안한 전술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구할 때,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유다 백성에게 기적같은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다.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어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셨느니라” (대하 20:10-17) 했다.

이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 왕은 몸을 굽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모두 다 하나님께 경배했고, 그대로 믿고 밀고 나갔다. 무기와 철갑옷과 병거 대신 찬양으로 적군 앞에 나아갔고, 여호사밧 왕은 계속해서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격려하며 앞으로 진군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대하 20:20)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두려움을 물리치고 백성들과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하여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대하 20: 21)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하셨다 (20:21-22) 왕과 백성들이 담대하게 찬송을 부르면서 드고아 전쟁터로 나아갔고, 연합군 앞에서 칼과 무기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부르며 나가자고 하는 것이 두려움의 적을 물리치는 전략과 전술이었던 것이다! 황당한가?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찬양 소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을 때, 이상한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 연합군들의 눈이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인지, 자기네들끼리 서로서로 치기 시작하는데 이건 가관치도 않다. 완전히 다 죽고 멸종할 때까지 그리했다고 기록되었다. 글자 그대로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것이 사실로 성경 말씀에 엄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찬양만으로 유다 왕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은 벌떼처럼 몰려오던 모압, 암몬, 마온, 이 세 나라 연합군들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다 물리쳤던 것이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자칫, 서로서로 미운 마음이 생기면 그때 흔들리면 안된다.)

그뿐이 아니다. 적군들이 가지고 왔던 수많은 재물. 의복, 보물을 전리품으로 거두었는데, 전리품이 얼마나 많았던지 유다 백성들이 그 전리품을 거두는 데만 사흘 동안이나 거두어 들였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대하 20: 22-25) 전리품을 모두 거둔 후에 그 골짜기의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송축의 골짜기” 란 뜻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어려움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을 때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어디에서 건져 주시는가?.

(1)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신다

본문의 암몬 자손, 모압 자손 그리고 마온 사람들, 이 연합군은 영적으로 사탄의 군대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연합군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집어 삼키려고 달려든 것 같이 사단 마귀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침범하는 것이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구세주이심을 믿지 못하게 도전해 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사단을 대적하며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 아군을 향해 총칼을 겨누는 촌극을 벌리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도처에서 보게 된다. 자칫 서로서로를 향해서 총칼을 겨누는 것은 이미 사단의 조종으로 말미암아서 영안이 멀어진 것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이런 사악한 사단의 장난을 인간인 우리가 능히 대적하고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다. 그렇다. 인간은 마귀와 싸워 이길 능력이 없다. 착각하지 마라. 사람이 제 아무리 학술적으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여도 마귀의 요술을 당해 낼 수가 없다. 죽이려고 모함하며 덤비는 데 이길 자가 없는 것이다.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마귀를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화가 나서 달려가면 저쪽에 있던 사탄이 피해 버리면 나만 벽에 부딪혀서 상하게 된다. 영적 전쟁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듯,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수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내게는 없다. 예수님께서도 막 9:20에서 제자들이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보시고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말씀하셨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 권고하신다.

우리는 이미 사탄을 이겼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승리케 하셨음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요 16:33)

(2)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다.
사실상 인간의 근본 문제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 문제이다. 인간이 죄에서 해방을 받고 온전히 변화되기 이전에는 언제나 어두운 생활일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택하는 성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눈을 들어 세상을 한 번 바라보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마귀의 세력이 판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의식주만 해결되고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의를 따라,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가 해결 받지 못해서 그렇다. 내 죄 문제도 주님께 들고 나가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사밧 왕은 자기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겼더니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이다. 우리의 죄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3) 어려운 역경에서도 우리를 지켜 보호하신다.
세상에서 어려움이 없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어려움이란 대개 자기의 잘못을 통해서 오기도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 때도 심한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여호사밧 왕이 그러한 경우이다. 구약 성경에 요셉이 그런 경우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당하는 어려움, 이런 때에는 정말 괴롭다.

그렇지만 염려할 것도 없고 분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전조임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오늘 여호사밧이 당한 어려움은 곧 브라가 골짜기의 축복을 받기 전에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었다. 요셉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후, 극심한 환난과 고통을 모두 통과한 이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이다!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재난이 찾아 왔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 환난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환난은 큰 축복의 장소에 들어가게 하는 충실한 안내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모두 그렇게 된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그렇다. 내가 실수하여 당하는 어려움이건, 모함에 빠져서 당하는 억울한 시련과 환난이건, 그 모든 고난과 환난을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내게 환난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대항하거나 육신적인 싸움을 싸우지 말아야 한다.

이런 때를 당했을 때, 곧 죽고 망할 것 같이 몰려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나간다면, 그때 주님께서 준비해 두셨던 복병을 풀어내 주시고 환난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 도우시면, 환난과 두려움의 골짜기가 ‘축복의 골짜기’, ‘브라가 골짜기’, ‘송축의 골짜기’로 변하게 되는 환희의 순간을 내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좁은 길을 지나가고 십자가의 길을 지났더니 광명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시험의 길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지 않았더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된 것이다. 시험은 힘들고 전쟁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아름다운 송축의 골짜기가 내 앞에 좌~악 펼쳐지게 되는 것, 이것이 ‘브라가 골짜기의 비밀’인 것이다. No cross, no glory라고 했던가…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역대하 20: 20 하반절)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 15)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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