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시키시는 성령 / A.W. 핑크 ('성령론'에서 발췌)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가 완전히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거룩한 행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어떤 올바른 기질이나 성향이 조금도 없다. 그렇다. 그는 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올바로 마음을 쓰는 것이 없고 그의 모든 의지활동은 부패하고 죄된 것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만일 죄인이 전적으로 부패한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이 없이도 그가 그리스도에게 굴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참으로 완전히 타락 가운데 빠져 있으므로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열망이 조금도 없이 오히려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롬(8:7).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에 대해 표현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엡2: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뒷 구절이 앞 구절을 해석해 주고 있다. 아담의 타락한 자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게 하여 구원얻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후반부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은혜가 혈통을 통하여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경건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도 본성적으로는 악인의 자식과 똑같이 부패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자연적인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란 말은 자연적이고 부패한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어떤 본능이나 선택이나 노력으로 중생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또한 거듭나는 일에 대해서 무언가를 공헌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노력으로도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를 중생시키시는 동인(動因)과 협력하여 중생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의 마음의 경향이나 그의 의지적인 활동은 오히려 중생하는 일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셋째로, 새로운 탄생은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나 기타 사역자들의 설득이나 노력의 결과로 죄인이 거듭나게 되는 예는 결코 없다. 그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지혜롭다 할지라도,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거룩한 자들로 만들기 위해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들이 그런 결과를 산출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 그리고 이 땅 위의 모든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뜻과 노력을 합하여 죄인 한 사람을 중생시키는 데 온 정력을 쏟는다 하더라도, 그를 중생시킬 수 없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지혜와 유한한 능력의 범주를 무한히 넘어서는 일인 것이다.”(고전3:6,7 S.홉킨스)

 

설교자에 가서 들으라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보리라

그러나 더 큰 선생이 네게 있으니

곧 영원한 보좌에 게신 분이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라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택한 사람은 피중생자요(‘중생함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역주), 하나님의 영은 유일한 동인(動因)이다. 새로운 탄생은 완전히 수동적이다. 곧 그가 탄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탄생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영혼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모든 마음의 거룩한 행사들 -예컨대 죄에 대한 슬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 등- 보다 앞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연적인 마음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변화는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이 위대한 변화는 점진적이거나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이다. 즉, 일순간에 택한 자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중생시에 성령은 참되고 새로우며 영원히 멸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하신다. 곧 ‘산 영’이었던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에게서 비롯된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이다(고전15:45). 이 새로운 창조는 최초의 창조와 똑같이 실제적인(real) 것이면서도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최초의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원초적인, 또는 근본적인 창조였으나, 반면에 이 새로운 창조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 -합리적이며 책임질 줄 알면서도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을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받을 자로 중생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새 사람’이 된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 단지 ‘새로와 졌을’ 뿐이다.

 

“중생이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새롭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며 본질적인 원리나 은혜의 성질이 영혼이나, 마음, 의지, 또는 사랑에 부어져서 그것을 가진 자로 하여금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본질적인 활동과 영적인 순종을 실행할 마음이 일어나서 그렇게 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J. Owen). 새로운 기능(faculty)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혼의 능력들이 영적으로 변모되어서(spiritualized) 하나님에 대하여 살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며 그와 교제를 유지하게 되는 것뿐이다. 중생이란 마음의 급진적인 변화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거룩한 일들을 도모하고자 하는 새로운 성향(disposition)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곧 마음이 새롭게 되고 사랑이 고양되며, 의지가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듭난 사람은 영적인 일들을 영적인 것으로 사랑하며, 영적인 축복을 순수하게 영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 가운데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학파의 견해와 같이 어떤 독자들은, 중생시에 새로운 어떤 기능들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은 중생 이전이나 이후나 본질적으로 똑같은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 우리의 논거에 대해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심지어 그가 영화의 상태(glorified state)에 들어갈 때에 있어서도, 결코 무엇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때에는 다만 기능들이 완전히 자유로와지고 더 확대되고 고양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열왕기하 6:17에 기록된 뚜렷한 경우를 살펴보면 더욱 쉽사리 파악하게 될 것이다. “[엘리사가]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의 사환에게 새로운 기능이 전달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시각기관의 능력이 확대되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된 것뿐이다. 중생시의 우리의 이해력도 이와 같다. 지성(추상적인 의미의 지성)은 중생하기 이전이나 그 이후나 똑같으며, 다만 후자의 경우 성령께서 그 지성을 되살리셔서 이제 영적인 것들을 분간하고 그것들을 향해서 활동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새로이 거듭날 때에 부여되는 이 새로운 영적 시력은 원래의 기능에 부가적으로 덧붙여지는 하나의 특질 것이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문제를 조금 더 다루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성도들의 육신의 눈은 부활 후에는 천사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므로(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 눈을 새로운 눈이라고, 신령한 눈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과 똑같다(고전15:44).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에 새로운 영적인 특질을 첨가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의 전 존재 역시 ‘영’을 부여받아서(요3:6) ‘새 사람’, 또는 ‘신령한’ 사람의 모습이 되지만, 그 모습은 어떤 새로운 존재가 창조되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원래의 사람이 ‘새롭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중생하게 되면 사물들을 모두 새로운 빛 속에서 보게 되며, 또한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심령이 작용한다. 이제 하나님은 무한히 우수한 존재로 보여지게 된다. 그의 율법에 대하여는 지당함과 영적인 면을 지각하게 되어서 중심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또한 죄가 무한히 악하다는 사실을 분별하게 된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면서, 자신이 오래 전에 지옥에 가지 않은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러한 버려진 자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죄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거듭났는지 그렇지 못한 지를 판정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그들 마음의 행사와 그것이 그들의 행실에 미치는 영향 및 결과로써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생시에 사람의 기능들이 영적으로 생기를 얻게 되고, 은혜로 그 기능들에 새로운 능력이 부여 되어서 영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중생시에 성령께서 영적 생명의 원리들을 전해 주시므로 그것에 의하여 중생한 사람은 하나의 영적 동인으로써 활동하고 초자연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복음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연적인 기능과 능력의 편에서 볼 때는 초자연적인 대상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햇빛과 박쥐의 눈이, 또한 햇빛과 소경의 눈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창조시에 가졌던 본래적인 행위보다 거룩하게, 그리고 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와 능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시에 생기는 궁극적인 주요 요소는 바로 마음의 거룩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엡1:4) 그 이후로 우리를 언제나 돌보시는(히12:10) 그 은혜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을 소유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히12:14)이기 때문이다.

전가시킨다든지(imputation), 변형시킨다든지(transubstantiation)하는 방법으로는 유한한 피조물이 도저히 하나님 속에 있는 본질적인 거룩함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입는 것 외에는 거룩함에 참예할 방도가 전연 없다- “하나님을 따라(하나님을 원형으로 하여)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으라”(엡4:24).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으라”(골3:10).

 

사람들은 중생함으로 최초로 구속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외부로 표현하게 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나실 때에”(딛3:4). 그런데 그것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나니”(5절).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은 마치 힘찬 강물과 같아서 지하수가 그런 것처럼 영원히 흘러넘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사랑은 그의 마음속을 통하여 은밀히 흘러내렸고, 그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의 이름을 등에 지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것이 감추어져 있고, 그것을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회심할 때에 그 사랑은 드디어 겉으로 솟아나며, 사람들 속에 나타나며, 또한 그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T. Goodwin)

 

우리의 중생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에 결코 못지않은 ‘지극히 크신 능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엡1:19, 20). 그런데 그 중생의 일이 자주 반복되며, 또한 죽어가던 강도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대로 순식간에 일어나며, 또한 연약한 자가 다른 사람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어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예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생의 역사 속에 있는 성령의 전능하신 사역을 간과해 버리기가 쉽다. 정말로 성령께서는 부드러운 회유적인 동기와 따뜻한 권유의 방법 -‘사람의 줄’(호11:4)로 이끄는 방법- 을 사용하셔서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크나큰 위대함을 숨기시기 때문에 그의 권능이 잘못 인식되고 잘못 숭배되는 것이다.

 

중생의 놀라운 면은 영혼을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영적 생명으로 이끌어 내는데 있다. 그것은 무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내는 새로운 창조이다. 더 나아가서 그 새로운 창조는 태초에 있었던 창조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다. 옛 창조시에는 아무것도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없었으나, 이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는 죄와 사단의 모든 권세가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이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과는 다르며, 오히려 어떤 것을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굳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겔36:26), 이리를 어린 양으로(사11:6) 변화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어떠한 이적보다도 더 위대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그들이 그가 행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요14:12)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께서 한 심령을 중생시킬 때에는 그의 놀라운 능력이 행해질 뿐 아니라, 그의 복된 사랑도 함께 나타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향하여 그의 은혜로운 직임을 수행하시며, 그들 속에서 일하시는 가운데, 영광을 상속받을 자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말로 다할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곧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을 향하여 살리며, 우리로 영원하신 언약 가운데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그와 함께 지내기에 알맞도록 영적 원리들을 부어주시는 것이므로, 그것은 내적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사역이 우리들 내부에서 이루이짐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시하기가 더 쉬우며, 또한 분명히 그에게 돌려야 마땅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일에 소홀하기가 쉬우며, 또한 대단히 슬프게도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은혜로운 일에 대해서 그에게 감사와 존귀를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계신 것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나 그를 우리에게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도, 그들을 향한 성령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그의 기뻐하심에 대해서는 뜨겁게 묵상하는 예가 적다. 그러나 아들이 이루신 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즐기는 이런 모든 일이 전적으로 영원하신 성령의 내적인 가르침과 그의 초자연적인 감화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성령의 사랑을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를 성삼위 가운데 한 분으로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이시오 주이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소홀히 한다는 사실로써 너무나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9,10).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 아들의 구속은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기한이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에 타락한 죄된 상태 속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며, 죄의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의의 생명으로 살리는 일은 바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위대하고도 숭고한 일이며, 이 일을 통하여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와 그의 사역의 영원한 덕과 효능을 완전히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한 대속물로 바치실 때 그 마음이 어떠하셨으며, 그 일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얼마나 무한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기뻐하시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 성부와 성자께서 이 위대한 구원을 모든 택한 자들에게 계시하고 적용시키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므로, 성령께서는 자신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의 풍성함으로 적절한 시기에 모든 영광의 상속자들 속에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죽으신 것처럼 -그의 죽으심은 단 한 번만으로도 그것을 통하여 이루실 모든 계획을 보증하기에 충분하다- 성령께서도 단 한 번의 활동으로 심령을 거듭나게 하며, 그 상태를 완전히 변화시키므로, 중생한 사람은 그 일회적인 사역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적 탄생이 없이는 우리는 영적 사물과 하늘의 축복들을 참되게 볼 수가 없다.

 

거듭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곧 거듭난 사람이 영적 사물을 영적인 것으로 사랑하며 영적인 축복들을 그 영적인 면으로서 귀중히 여기게 되는 일이다. 생명 샘이 그리스도로부터 그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그의 모든 영적 삶의 샘이며, 그의 모든 은혜의 뿌리이며, 그의 속에 있는 모든 신적 원리들의 영원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택함을 받은 자는 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영적 세계에만 있는 것들을 즐길 능력을 얻게 되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상태가 영원히 있게 될 상태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맞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은 중생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골1:12,13). 중생이란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일어나며, 단 한 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증가시킨다거나 감소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은혜와 거룩함이 그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지는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단지 그 은혜와 거룩함을 이끌어 내어 실행하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령론] / A.W. 핑크 / '중생시키시는 성령'(83~92p) / 도서출판 엠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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