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조명 /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

 
제 5장   성령과 조명(照明)

앞 장에서 우리는 계시가 모든 지식의 근원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두 가지 종류의 계시를 주셨다. 일반 계시는 창조된 세상의 모든 부문에서 볼 수 있고, 특별 계시는 성경이다. 이 두 계시가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일반 계시가 한 근원이긴 하지만 성경 없이는 올바로 분별하기 어렵다.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포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속적인 음성이요, 오류가 없다는 사실까지 밝혔다. 만일 누구나 참 지식 가지기를 원한다면 이 두 계시에 가야 하고, 거기서 그는 그 마음에 확실한 것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진리가 정확하게 기록된 외적, 객관적 계시를 가지는 것으로 충분치 않음을 암시한 적이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이전, 아담과 하와의 무죄 시에는 이것으로 충족하였다. 그러나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일반·특별 두 계시로도 참 지식을 주기에 미흡하게 되었다. 이 두 계시가 자체로서 불충분함도 아니요, 어떤 점에 모자람이 있어서도 아니다. 일반 계시에 관한 한,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히 보인다(롬1:20). 특별 계시에 관한 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원어에 있어서 모든 말이 일점일획까지 정확한 성경을 주셨다. 계시들은 완전하고, 분명하고, 평이하다. 결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절대적 지식을 제공하기에 온전히 충족하다.

그러나 결함은 사람에게 있다. 본 장에서는 사람이 성경을 바로 읽을 수 있도록 눈을 주시고 마음을 조명하심이 어떻게 성령의 일인지를 보겠다.

처음에 인간의 영적 조명의 필요성을 살피고, 다음에 성령께서 그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임을 살펴야겠다.


1. 인간의 암매(暗昧)

신약 성경은 자연인이 두더지처럼 암매하여서 그 크고 분명한 진리가 사도에 의하여 제시되어도 깨닫지 못함을 암시한다. 누가는 루디아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강가에서 바울의 전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시사 바울의 말한 것을 청종케 하셨다(행16:14)고 말한다. 여기에 분명히 내포된 것은 그가 처음에 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마음은 영적으로 무디었다. 이방 에베소 인에 대한 바울의 묘사를 빌린다면 그 여자의 총명은 어두워져 있었다(엡4:18). 그가 그 말하는 헬라어는 알아들었으나 그 말의 참 의미는 몰랐다. 그러나 주께서 그 마음을 여시매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주 없이는 그에게 영적 총명이 없었다. 그 여인은 소경이었다.

바울은 영혼의 암매를 마음에 드리운 베일로 묘사한다(고호3:12-18). 회개치 아니한 유대인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하였다. 모세의 기록들이 그들에게 읽혀질 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모세의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요,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수건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바울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16절)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리라는 의미이다.

자연인에게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음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성경 말씀은 아마도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일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버림받은 자들은 복음을 들어도 그것을 헛소리로 여긴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1:18) 자연인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지혜 있는 자와 문벌 좋은 자와 능한 자가 많이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영리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IQ에 상관없이 거듭나지 않고는 모든 마음이 어두워진 때문이다. 바울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2:14)라고 분명한 말로 밝힌다. 그는 지둔(遲鈍)한 자연인 혹은 무식한 또는 교양 없는 자연인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연인이라고 말했다. 타고난 지능에 상관없이 육에 속한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창조의 기사를 분명한 과학적 사실과 모순된다 하여 저버리며 아담과 하와 및 뱀의 역사를 한낱 동화로 생각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신약 성경의 주장도 후대 교회의 미련한 저자가 좀 더 알지 못하여서 그렇다고 판단해 버린다. 대속의 역사도 그에겐 어리석게 보인다. 예정과 인간의 책임은 분명한 모순이다. 전능하시며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예상하신 것은 그에게 불합리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여기므로(고전2:14)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은 자가 된다(롬1:22). 바울은 이 가르침을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강력히 재 확언했다. 그가 그런 것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일은 영적으로 분변(分辨)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이 자연인은 전적으로 암매하다고 말한다 해서 거듭난 자는 그 반대로 완전히 밝은 눈을 가졌다고 추단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하였다. 구약에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시편 기자 앞에 있었다. 그는 율법에 더하여 어떤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그것을 볼 수가 없어서 이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요컨대 다윗은 거듭났을지라도 영적으로 일부분 암매하였다.

신약 성경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부분적인 암매를 암시한다. 누가는 승천 전의 사건을 얘기하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의 예언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기 전에는 그들이 성경을 백 번을 읽었을지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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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성경의 틀림없는 교훈은 하나님의 이중의 계시 곧 창조된 세계와 성경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시들은 명백하다. 그러나 죄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성령이 그 안에서 성화의 역사를 시작하심으로써 거듭난 자는 최소한 이 진리들의 근본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연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이 진리들을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할터인데 그러지 못한다. 구름 없는 한낮에 한 사람을 밖으로 데려 나가서 빛나는 해를 보게 한 다음 그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보라. 만일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는 틀림없이 시각 장애인이어서 안과의에게 갈 필요가 있다. 같은 이치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죄,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심을 쉽게 증거해 주는 명쾌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사람 앞에 내놓고 그 진리들을 보는지 물어보라. 만일 그가 “그것들은 진리로 볼 수 없소. 옛날 얘기요. 사람의 상상으로 지어낸 다만 무식자만이 믿는 뻔한 헛소리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도 역시 전적으로 소경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가지도 볼 수 없다. 성경은 그 이상 쉬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마치 해처럼 빛나기 때문에,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함에도 만일 그 진리를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반드시 그가 영적 소경인 탓이다. 성경이 말한 대로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한다. 베일이 그의 마음을 가리고 그의 눈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조명

그러므로 참 지식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가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람이 또한 볼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이 개입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다. 그는 사람에게 오류 없는 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눈도 주신다.

이미 언급한 몇 구절은 사람의 영안(靈眼)을 여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행위임을 명시한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 자기 눈을 열 수 없는 무능력을 느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르기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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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4,5)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 일에 있어서는 바울이나 그 누가 신앙이나 신앙에 필요한 지식을 수사나, 웅변, 논리 등으로써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오는 것이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런 방법으로 마음에 찾아 오시며 복음의 진리를 저항할 수 없이 확신시키어서 믿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와 같이 속절없는 것 위에 서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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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를 종합하면 성령께서 사람들의 생명 속에 오실 때 그는 그들을 조명하며, 지식을 주고 가르치며, 그들의 눈을 여시고 가려진 마음의 수건을 벗기시며 마음을 유화(柔和)시키사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알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없이는 사람은 계시의 진리에 암매하며, 오직 성령과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이 은밀한 계시, 새 계시를 사람에게 줌으로써 그를 조명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완성된 후로는 계시가 더 없었다. 특별계시는 신약으로 종결되었다. 더구나 새 계시를 주는 일은 마치 하늘에 태양 둘을 둠으로써 소경으로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처럼 무익하다. 성령께서는 지식의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사람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에 신비하게 역사하여 이미 주어진 계시를 볼 수 있게 하신다. 시편 기자는 또 다른 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앞에 이미 있는 율법을 보도록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을 구하였다. 회개치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계시 위에 다른 계시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요 다만 그들의 마음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 필요하였다. 에베소인들에게는 다른 복음이 필요치 않고 바울이 이미 그들에게 가르쳤던 복음을 보지 못하게 막는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고 쓸 때 그가 새로운 메시지를 주었다 하지 않고 옛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주었다고 말한다. 같은 모양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지혜 있는 자도 이해 못한 복음을 깨달은 것은 어떤 새 계시를 받은 때문이 아니고 이전의 계시가 “성령과 능력이 나타남”으로 임하였기 때문이다.

이 조명은 주의 천사가 발람의 길 앞에 섰을 때 그의 눈에 열린 것에 비할 수 있으니 천사는 거기 있었고 나귀는 그를 볼 수 있었으나 발람은 볼 수 없었다. 발람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또 다른 천사를 보내야 했던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눈을 열어 줌으로써 그는 이미 거기 있던 천사를 보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또한 이 조명은 망원경의 효과에 비할 수도 있겠다. 사람은 이것 없이는 무한의 거리에 있는 저 별들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별들은 거기에 있다. 그가 필요한 것은 곧장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새 눈인 망원경이다. 망원경은 그 앞에 새로운 물체를 놓아 주는 것이 아니요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도 이와 같다. 성령은 사람의 영안을 열어 이미 그 앞에 있는 계시를 보게 한다. 만일 그가 단 한 계시도 볼 수 없다면 천의 계시로도 그로 보게 하는 데는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조명은 어떤 새 지식의 부여가 아니라 사람 앞에 분명히 놓여진 것을 볼 수 있도록 그 눈을 열어 주는 것이다.


결론

이 사실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수수께끼로 남았을 것을 설명하여 준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만일 기독교가 그처럼 좋고 이 세상과 내세에 최대의 유익을 끼치며 그처럼 논리적이요, 그것이 모든 참 지식의 근원이라면 왜 더 많은 사람이 믿지 않는가? 왜 교회가 대학 출신과 전문가들로 구성되지 않았는가? 왜 높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 교회로 많이 모여들지 않는가?

몰론 대답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에 달려 있지 않고 영적 맹목자로 하여금 보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데 있다.

같은 이유로 때로는 어떤 엉뚱한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적인 견지에서 사람을 보고 속으로 판단하기를 “저 사람은 소망이 없어, 너무 완고해서 신자가 되지 못할 거야, 그는 무관심하고 죄 중에 빠져 냉담할 뿐이야, 욕지거리를 지독히 하고 생활은 추문투성인 걸”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사람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생전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완악한 죄인이 눈에 눈물이 어리어 그리스도에게 나온다. 들국화가 코끼리 발에 짓눌려지지 않을 수 없듯이 그가 복음의 부름에 귀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사람에게가 아니고 성령께 의존하는 까닭이다. 천재든지 강퍅한 죄수든지 차이가 없다. 오직 성령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하시면 그의 마음은 부드럽게 녹아지고, 혹은 에스겔이 말한 대로 돌 같은 마음이 살같이 된다(겔11:19).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가 상대할 사람을 조명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은 무효하다. 우리가 회개치 않은 친구를 가장 웅변적이고 인기 있는 설교자의 말을 듣게 할 수도 있고, 그와 함께 논리적인 변론을 할 수도 있으며(기독교는 찬란한 논리를 가졌다.) 아주 교묘하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 요령 있는 방법으로 그에게 접근할 수도 있으며 또 한 숨이 다할 때까지 담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성령께서 그의 눈을 열어 그의 마음에서 수건을 벗기고 그로 진리를 보고 믿게 하시지 않으면 이 모두가 수포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영혼을 얻는 데 첫째 조건은, 성령께서 그 회개치 않는 자의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일이다. 한번 그것이 일어나기만 하면 비록 우리가 서툴고 미련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해치 못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영혼을 얻으려다 낙심하게 되는 대부분의 원인은 우리가 전도지를 전해 주며 복음을 증거할 때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의 생명 안에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실에 있다.

우리 자신의 지식에 관해서도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한다. 바울이 편지한 에베소인들이 이미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들은 바울이 그 영광스러운 제 1장을 써서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터가 영원하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전달받아 이를 아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는 같은 장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시사 그들의 깨닫는 눈이 밝아져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알도록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다(엡1:17-19).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 우리 눈에 상당한 몽롱함이 있고(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많이), 아직도 암매로부터 자유치 못하며, 마땅히 보아야 할 때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사 우리로 계시의 큰 진리들을 더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조명하시기를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전장과 본 장의 결론으로, 기독교는 모든 참 지식의 비결을 가지고 있다. 이 비결은 성령의 이중(二重)의 역사에 달려 있다. 그것은 성경, 곧 모든 지식의 근원이며, 또한 자연 계시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 데 근원이 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달려 있으며, 또한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조명해 주심에 달려 있다. 만일 사람이 성령의 이런 역사에 의지하면 그는 철인(哲人)들이 만대에 걸쳐 탐구한 것 이상의 참 지식을 얻을 것이며 그래서 그는 만족할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91~104p)/믿음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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