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 제 1 장 성령으로서의 세례 / 고재수지음(N.H Gootjes)

김완수 | 조회 23 |추천 0 |2012.10.02. 10:20 http://cafe.daum.net/wansu63/Ihqp/963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고재수지음(N.H Gootjes)

 

 

제 1 장 성령으로서의 세례

 

1. 머리말

 

교회는 언제나 오순절날의 사건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 사실이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문제에 관심이 많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석가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는 말이 나오는 본문을 다룰 때 그 표현을 설명했지만 교의학자들이 그들의 조직 신학적인 책에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많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개혁주의의 고백문에서도 그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약 150년 전부터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라는 말 그 자체도 신학적 토론에서 핵심적인 것이 되어 왔다. 신성 운동, 오순절 운동과 신오순절 운동에서 그 표현은 그들의 신앙의 핵심적인 체험을 묘사하는 말이 되고 있다. 그 결과로 그 체험뿐만 아니라 그 표현도 이 운동의 안과 밖에서 관심이 대상이 되었다. ‘성령으로서의 세례’ 라는 주제로 쓰여진 책도 많이 출판되었고, 그 중 광범위하게 성령론을 다루는 책도 있다.

 

이 글은 오순절이나 신오순절의 성령의로의 세례에 대한 견해를 완전하게 다루고자 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이 표현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에 근거하여 여러 견해를 살펴보고 거기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을 다루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으로부터 성경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교리를 찾고자 한다.

 

2. 칼빈의 견해

 

먼저 칼빈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가 칼빈을 읽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오순절파나 신오순절파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성례전의 의미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 3:11,12 주석에서 칼빈은, 교회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일치시키고, 요한의 세례가 교회의 세례와 다르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는 오늘날 목사가 성령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칼빈에 의하면 세레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서 요한은 신호를 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호가 제시하는 내용을 주신다는 것이다. “주된 일은 그(세례 요한)가 그리스도를 영적 세례의 주체로 만들면서, 그 자신을 단지 외적(세례) 수종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요한의 세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세례에도 적용된다. “이것으로부터 세례에 있어서 사람의 역할이 무엇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에게 특이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 교훈이 생겨난다. 사람에게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신호의 집행이 맡겨져 있을 뿐이고 진리 자체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마 3:11 이하에 대한 주석에서 한 구절 더 인용해 보자. “그 의미는 분명한데, 곧 그리스도만이 외적 세례가 나타내고자 하는 어떠한 은혜라도 베푸신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피로써 양심을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옛 사람을 죽게 하고 중생의 영을 주신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통하여 인간에게 행하시는 전체 구원 사역, 곧 죄를 씻음, 옛 사람의 죽임, 중생 등을 의미한다. 그때 중생은 믿음의 시작 순간이나 또는 사람이 거듭나는 그 순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를 변화시켜 가는 그리스도의 영이 계속적 사역이라는 의미이다.

 

칼빈은 행 1:5을 따라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오순절날에 성령의 오심과 연관된다는 반대를 답해야만 한다. 오순절 이전에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겠는가? 칼빈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회개와 중생의 영을 주심을 의미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나의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불러 혀 모양으로 그 자신을 주시던 바로 그때에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 일 이전에 사도들에게 이 세례를 주셨고 또 그는 모든 택한 자를 매일 그같이 세례 주신다.”

 

그러면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오순절에 주어졌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칼빈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것 같다.

 

첫째, 오순절 사건은 매일 일어나는 일을 장엄한 방식으로 가시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장엄한 방식으로 성령을 보내심이 주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감추어진 은혜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요한의 증거를 그것에다 결착시킨 것은 마땅한 일이다.

 

둘째, 성령 선물은 오순절날에 완전해졌다. “사도들이 그 자신들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도 거기에는 그가 그의 성령 선물들을 충만한 정도로 부어 주심으로써 그의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우주적 은혜의 반영되었다.”

 

 칼빈의 견해는 그 직후의 시대의 매우 영향력이 있었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스쿨데투스(A. Scultetus, 1566-1625) 라는 신학자는 당대의 일반적 인식이, 세례 요한이 자신과 다른 교사들의 외적 세례나 사역을 그리스도의 내적 사역과 구분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쿨데투스(A. Scultetus, 1566-1625)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두 종류의 세례, 즉 물세례와 불세례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세례는 사람이 물 속에 담가지고 또 건져내어짐으로써 성령을 통하여 죽음과 살아남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불세례는 성령의 불같은 은사들이 사람들 속에 기적적으로 부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례는 오순절에 있었던 특별한 은사들을 설명해 주고 이후로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세례는 복음의 권위가 충분히 확정되었을 때 멈추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쿨테투스 자신도 그가 대다수의 견해를 거슬러 가고 있음을 알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칼빈과 같이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 대조를 두는 신학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둔(J.D.G.Dunn)은 이렇게 말한다. “그 두 세례 사이의 대조는 요한과 예수 사이의 대조, 예비와 완성, 또는 그림자와 실체 사이의 반명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둔과 칼빈 사이의 견해차에도 주목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표현 속에 지시되고 있는 성령의 사역은 믿음의 시작에서부터 계속적인 성화 사역에 이르기까지 전체 사역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둔의 견해는 이 세례가 특별히 믿음 생활의 시작을 의미한다. “성령의 선물 즉 성령 세례는 회심의 도입 단계의 특징적 요소인데, 실상 신약에서는 그것이 회심 돌입의 가장 의미 깊은 요소이며 그 핵심점이다. 이것은 사람이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경험과 생활에, 또 새 언약 속으로, 또 교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구원하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되게 만드는 요소이다.

 

3. 오순절파의 견해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오순절파의 견해쪽으로 차츰 기울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들의 입장의 배경에는 청교도적 사상이 깔려 있다. 구원을 두 단계로 체험하게 된다는 사상이다. 첫째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단계이고 후에 두 번째 단계가 따라오는데, 이는 보통 확신의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은 이같은 확신을 받는 것을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는 것과 일치시켰다. 그러나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확신의 체험 대신 자주 사용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순절파 견해로서의 그다음의 발전 단계가 웨슬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이었던 청교도들과 알미니안적인 웨슬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웨슬리도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두 단계로 구분한다. 하나는 칭의의 단계로서 성화는 이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뒤에 완전의 단계가 오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전적인 성화가 주어진다.

 

웨슬리 계열인 플랫처(John Fletcher)는 종종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말을 사용한다.

 

이 두 단계의 구분은 신성 운동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성화를 이끌어 오는 둘째 체험을 보통 성령 세례로 지칭하였다.

 

이어서 오순절파 운동이 뒤따라온다. 여기서 다시 신자의 삶에 있어서 두 가지 단계가 구분되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제 2 단계는 청교도들의 경우와 같이 확신의 단계가 아니며, 또 웨슬리의 추종자들의 경우처럼 성화의 단계도 아니다. 그들에게 와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말은 이전보다 더 자신감 있게 사용되어진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언급은 능력의 약속과 짝을 이루며, 또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던 오순절을 지적하기 때문이다(행 1:5-8, 2:4).

 

이렇게 성령을 통한 성화란 개념으로부터, 성령을 통한 능력이란 개념으로 옮겨가는데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사람은 특히 토레이(R. A. Torrey) 였다. 그의 세 번째 제안을 인용해 보자. “성령으로의 세례”는 성령의 중생케 하는 사역과는 구분되며 그것에 뒤따라오며 또 첨가적인 성령의 작용이다. ...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더라도 아직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생에는 생명의 부여가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은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오순절파 그룹에서는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이런 가르침이 그들의 교리적 기초에 속한 디 기(D. Gee)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신약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서 중생시에 성령이 처음 들어온 이후 신자들이 성령을 그 분의 원래적이고 유일한 인격으로서 특별하고도 인격적으로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체험을 ‘성령으로의 세례’라 부르며 그 목적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부여하는 데 있다. 그것에 특징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은사들이다.”

 

이 두 단계를 때로는 용어상 구별해서 “성령의 세례”와 “성령으로의 세례”로 나누기도 한다. “중생에서는 성령이 주체요 대속의 피가 수단이며 중생이 그 결과”이다. 성령으로서의 세례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체요(“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성령의 수단이며 능력의 부여가 그 결과이다.

 

칼빈과 이들 오순절파 신학자들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칼빈에게는 성령으로의 세례란 말이 신자의 마음과 생활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지속적 사역을 의미하는데 반해, 기(Gee) 와 윌리암스(Williams)에 있어서는 이 세례가 신자의 생활에 나타나는 두 번째 체험으로서 이를 통해 능력을 받고 보통 방언을 수반하는 체험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4. 바빙크의 견해

 

그러면 개혁 신학에서는 20세기 초반 이후로 되살아난 성령의 부음에 대한 관심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논의할 계획은 없고 다만 한 신학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는 화란 신학자인 바빙크(H. Bavinck)이다. 재미있는 점은 바빙크가 웨슬리 신학의 전개와 오순절과 신학의 시발에 대하여 매우 앞서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을 우리는 그의 책의 몇몇 긴 각주에서 볼 수 있다.

 

바빙크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이 갖게 된 새로운 의미를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핵심이 어떤 것이냐는 점은 감리교식으로 성화의 둘째 단계에 대한 강조와 오순절 사건의 성도에 대한 논의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바빙크는 전통에 따라 인간의 신분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무흠 상태, 부패 상태, 은혜 상태, 그리고 영광 상태이다. 이 마지막 영광 상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날에 무덤으로부터 일어난 후의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빙크가 말하는 은혜의 상태에는 두 부분이 있어서, 그 중 하나는 신자가 바빙크가 말하는 의롭다 함을 받을 때 주어지고, 다른 하나는 성화에서 주어지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바빙크의 대답은 매우 강조적으로 “아니오”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한 순간도 분리된 것은 아니다.” 성화는 윤리적 행위로서 전 삶을 통하여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의를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을 통해 점차적으로 우리의 인격적, 윤리적 자질이 되도록 만든다.

 

우리가 이것을 신분 이론과 맞추기 원한다면이 세 번째 단계 곧 은혜의 단계는 “칭의와 성화의 단계”라 해야만 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신자는 의롭게 되었고 계속 성화되어 간다.

 

조금 뒤에서 바빙크는 감리교 이론을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감리교가 성화와 인침을, 칭의와 믿음과 분리하고 앞의 것을 받지 않고서도 뒤의 것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일성과 불가분리성이라는 이 중요한 진리를 간과하는 주장이다.” “이 감리교 이론은 그 분리된 선물이 칭의 이후 조만감에 특별한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갑자기, 그리고 충만히 나눌 수 있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더욱 실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감리교 교리는 성화의 성격뿐만 아니라, 믿음의 본질도 오해하기 때문이다.” 바빙크의 생각에는 감리교도와 오순절파가 믿는 대로의 둘째 단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그러면 바빙크는 오순절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Magnalia Dei〕 제 19장은 성령 선물에 관한 장인에 이 장을 분해 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된다.

 

첫째로, 바빙크는 성령을 부어 주신 사건을 논의하고(p 368-372).

둘째로, 그는 이 성령의 부음에 수반된 특별한 능력과 사역들을 논의하며(p. 372-377).

셋째로, 그는 이 성령이 회중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정상적이고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사역에 대해서 말한다(p. 377-385). 이 마지막 부분은 현재로서는 우리의 관심 밖이다.

 

성령의 특수한 사역에 대한 두 번째 부분에서 바빙크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관해 논의하고, 나아가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특수 사건들, 가령 사도들이 담대히 말하는 일이나, 믿음의 특별한 힘, 기쁨, 지혜, 방언, 예언, 신유 등을 논의한다. 그러나 바빙크는 이 모든 특수 사역들의 그 첫 사도 시대에 제한된 것으로 본다. “성령을 부으심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첫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특수한 능력과 사역들을 수반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주된 관심은 바빙크가 오순절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차영배 교수에 따르면 바빙크는 오순절 사건을 구원 순서의 한 부분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차 교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빙크가 Magnalia Dei에서나 G.D. (교의학)에서 한결같이 말한 것처럼 구원 서정의 첫사역이라고 함이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이유는 바빙크가 19장에 이 구절을 “첫째의 사역”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 자체는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그 문장 자체를 보자면 이렇다. “높아지신 후에 성부의 우편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사역은 성령을 보내신 일이다. ” 이 문장 자체로서는 바빙크가 여기서 구원 순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전혀 명시하지는 못한다.

 

차 교수는 Ger. Dog에서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논의가 구원의 순서라는 장의 한 부분이 되고 있는 것을 들어서 그의 견해의 더 굳은 기반을 다지고 있는 거으로 보인다. 이것을 볼 때 바빙크가 성령 선물을 구원의 첫째 부분으로 생각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차 교수는 벌써 바빙크가 오순절을 유일한 사실로 보았다는 인상을 주는 몇 가지 표현들을 인용한 바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문단 전체를 인용해 보자. “오순절날에 일어난 이 성령을 보내심은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다. 창조와 성육신이 그러한 것처럼 이 일은 단 한 번만 일어났다. 중요성에 있어서 이 사건과 동일하게 성령을 주신 일이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결코 반복되어질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잉태시에 인간성을 취하시고 그것을 다시 벗어 놓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도 오순절날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였고 결코 다시 그것과 분리되지 못한다. 성경은 오순절에 일어난 이 사건들과 특유한 의미를 명백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말한다(행 2:17, 18, 33, 10:45, 딛 3:6).

 

우리는 여기 나오는 “유일한” 그리고 “단 한 번만” 이란 말을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그러함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만 한다. 창조와 성육신이 되풀이 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의 오심도 반복될 수 없다. 동시에 창조물 자체가 지속적으로 조속하고(이 점은 바빙크가 여기서 강조하지는 않는다.) 또 그리스도가 지속적으로 사람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오순절날에 특유하게 오신 일의 결과도 그러하다. 곧 그는 회중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신다는 것이다.

 

바빙크에게 있어서 이 성령의 첫 번 오심은 구원 순서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일은 구원과 적용에 큰 영향을 준다. 이제 우리는 왜 바빙크가 그의 Ger. Dog에서 오순절에 성령 부어 주심을 구원의 순서를 다루는 단락 속에서 논의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사실이 신약의 구원 순서에 있어서는 기본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5 방법론적 요점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관한 사상들의 발전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고도 불완전하게나마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그 교리 자체에로 돌아가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을 위한 확실한 규법이다.

 

몇 가지 논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방법론적 문제를 이야기하겠다. 성령으로의 세례의 의미를 논하고자 할 때 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네 가지 사건이 특별한 자리를 가진다. 오순절 사건과 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에서 성령을 부어 주신 사실과, 10, 11장에 나오는 고넬료 집안에 성령이 오신 사건, 그리고 19장에 에베소에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사건 이 네 가지이다. 이어서 따라오는 논의의 핵심은 그 각각의 경우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믿는 사람들이었느냐, 아니면 그때에 성령의 오심과 함께 그들의 믿음이 시작되었느냐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2차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건들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라고 불리우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언급들은(마 3:11 등) 어떤 특별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세례가 미래의 어떤 일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행 1:5에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킴이 확실하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전 8장에서 그 세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넬료 집안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종종 간과되는 점이지만, 베드로가 한 말은 고넬료와 그 집안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베드로 자신이 그 집안에 일어난 사건을 보고서, 주님께서 오순절에 임할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관하여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다는 말이다. 행 11: 16은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되어 있다. 이 사건이 바로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지, 그 사건을 가리켜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라 부른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행 19장에서도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행 11:16 이후에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은 고전 12:13인데 여기서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오순절과 같은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쓰여진 문맥과 그리고 오순절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행전에 기록되 다른 사건들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6.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중생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령으로서 세례가 두 가지 방식으로 중생과 동일시된 것을 보았다. 칼빈은 이를 회심의 첫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회개의 전 삶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중생이란 말은 한 사람의 믿음의 시작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 성령의 세례라 불리워지는 형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이란 말을 보다 현대적 의미로 사용하겠다. 이때 우리가 대답해야 할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과연 중생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둔은 Ch.1에서 밝힌 대로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중생사역(믿음 생활의 시작)이 같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 주장의 근거로서 다루는 세례의 요한의 세례와 메시야 세례를 비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두 세례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둔((Dunn)은 요한의 세례가 보다 크신 이의 세례를 위한 준비라고 말한다. 그런데 뒤에 가서 그는 아무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표현을 다르게 바꾸고 있다.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가지 구절들을 논의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 세례의 목적은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고자 함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준비일 뿐이다(1:31).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로써가 아니라 성령으로써일 것이다(1:33). 여기에 의도된 뜻은 요한의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의 그림자요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준비이며 상징이라고 하는 표현도 가끔 그의 책에서 찿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준비와 상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요한의 세례를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준비라 부른다면 이 두 세례의 내용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를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상징이라 할 때, 그 때 두 세례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그때에는 성령으로서의 세례의 내용이 물세례 속에 미리 제시되었다는 말이 된다.

 

첫째 이유는, 요한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세례의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다. 이것은 막 1:4이 말하는 것처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였다. 이는 그 세례가 요한이 선도한 회개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요한의 세례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하면 오순절날에 성령이 오시기전까지는 요한의 세례는 다만 공허한 외적 형식일 뿐이라는 말이 된다.

 

칼빈은 이런 반론이 나올 것을 미리 예견한 것 같고, 그래서 오순절 전에 벌써 성령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오순절날에 성령을 보내심은 그 전에 이미 숨겨진 채로 행해진 일을 시각화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구약의 택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까? 또 이 주석은 행 1:5-8과도 분명히 대치된다. 거기서 성령님의 오심은 교회에의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지 이미 일어날 일을 단순히 가시화한 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물로의 세례와 성령으로의 세례는 연관성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관계가 상징과 실체의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령으로의 세례가 중생을 의미한다는 견해는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예언에 근거될 수 없다.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중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신학자 플루르는 그 근거로서 성령으로서 세례에 죄 사함의 요소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든다. 그에 의하면, 세례라는 말 자체가, 성령으로서 세례에 죄 사함의 깨끗케 함이란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도록 말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 주다” 라는 말 자체가 깨끗케 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말은 “담그다” 라는 뜻이고, 요한의 의식과 그리스도인 성례에 사용되긴 했지만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막 10:39, 눅 12:50, 고전 15:29). 깨끗케 함의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맥이 결정할 일이다.

 

플르르(Floor)는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 위해 요한복음으로부터 두 구절을 인용해서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깨끗케 함 사이에 연관성을 세울 수 있겠다고 한다. 그 하나는 요 1:29-34인데, 여기서 구조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 본문의 교차 대칭 구조로부터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 모두가 서로 상통한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사역, 곧 죄를 제거함과 성령으로 세례 주심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평이하게 읽어볼 때에,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예수님의 이름과 죄의 제거 사이에 관계가 있음은 분명하다(29절). 또한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사이에도 관계가 있다(33절). 그러나 죄의 제거와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는 연관성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물론 두 가지 동일 인물의 사역이기 때문에 서로 관련된 것임은 틀임없다. 그러나 그 관계는 죄의 용서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그런 관계는 결코 아니다.

 

플루르가 제시하는 다른 본문은 요 20:22이다. 여기서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말이 나오지 않고 오순절 사건도 언급되지 않는다. 또 본문은 성령을 받는 것이 죄 사함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그 결과로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둘 권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행전 1-2장에 기록된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본문이 중생과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동일시하고 있을까? 오순절날에 성령이 그리스도의 제자들 위에 부어졌다는 사실은 오순절파의 편에서는 하나의 강한 논증의 무기가 되어 왔다. 물론 제자들이 이 경험 이전에도 중생한 신자들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런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적어도 중생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Dunn은 이런 오순절파의 논증을 반박하면서 그는 오순절 사건이 다른 차원의 사건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이유들을 제시한다. 그 사건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클라이막스이며, 새 시대의 계시이며, 새 언약의 시작이며, 교회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Dunn은 여기서 갑자기 그의 어조를 바꾼다. 행 11:17,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를 인용하면서 결론짓기를 오순절에 가서야 제자들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믿음의 위탁의 순간에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위탁의 수준에 이르게 된 오순절에야, 그들이 신약의 의미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야 이루어졌다.”

 

이 본문의 주석적 문제도 있다. ‘믿을 때에’ 란 분사가 어떤 단어와 관련시키면 되겠느냐는 문제이다. 문법적으로 볼 때 ‘믿을 때에’ 란 ‘우리’나 ‘그들’과 연관될 수 있다. 보통 주석서들에는 그 분사가 ‘그들’과 ‘우리’ 모두에 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여기서 이 말은 ‘그들’에만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설혹 우리가 행 11:17이 오순절에 가서야 제자들이 믿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성령의 오심은 그들의 믿음과 결과이지 그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우리가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 즉 믿음과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신약에 사용된 대로의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람을 믿도록 중생시키는 성령 사역과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7.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제 2 단계의 시작인 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둘째 국면의 시작이라는 주장은 오순절파가 믿고 있는 생각이다. 그 파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자르비스(E J Jarvis)를 인용해 보면, “때로 그것(성령으로서의 세례)을 기다림 후에 받았다. 때로는 안수하는 중에 받았다. 때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항상 그 일은 회심 후에 일어났는데 이는 그것이 독특하고 분리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성령으로서의 세례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복음서들을 볼 때는 이 세례와 믿음의 순간 사이에 아무 직접적인 언급도 없다. 행전 2장의 사건에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회심 후에 얼마 지나서 따라온 일임이 일반적으로 지적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너희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당시에 믿는 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마 16:16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해 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자신의 삶과 고난에 관하여 성경을 설명하시고 그들로 이해하게 하셨다(눅 24:36-47). 또한 행 1:15-26에 나오는 베드로와 120 문도들의 행동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보여 준다(22, 24절).

 

이것들을 볼 때 쉽게 이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다. 곧 제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회심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세례가 따라 왔다면 이는 어느 곳에서나 신자들을 위한 일반 규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오순절 사건이 특별한 사건임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① 구약에서 오순절 성령 부어 주심은 결정적 사건으로 미리 예언 되었다(예, 사 44:3, 겔 39:29, 2:28 이하).

 

② 베드로는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 일이 마지막 날에 있는 일임을 덧붙인다(행 2:170. 즉 교회의 마지막 시대가 오순절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③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못할 줄 알았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약속되었다(요 14, 16장).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기간에 속한 것이다.

 

④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인 사건이었던지 누가는 바로 이를 기점으로 그의 두 책을 나누었다. 행 1:1,2에서 그가 그의 앞의 책을 말하면서,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그의 두 번째 책이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일에 대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 중에 그의 성령 보내심은 가장 첫 번째의 일이다.

 

오순절은 베드로가 행전 2장의 그의 설교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점진적인 구속 역사에 속하는 사건이다. 그가 설명하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사람으로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 어떻게 둘째 축복을 받게 되었느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집중된 것으로서 그 분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시고(22절), 죽임을 당하시고(23절),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신 것을(23-32절) 말한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고 성령을 받아(33절) 마침내 이 성령을 부어 주셨다. 이것을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 사건들의 계열에 속하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성령을 부어 주심이 중심이다.

 

물론 이 말은 성령을 부어 주심이 개별적 신자의 신앙과 생활에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모든 사건들이 다 개별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다시 죽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바로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물론 되풀이 될 필요는 없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으심도 우리 신앙과 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오순절의 이 사건이 되풀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행 2:1-4에 묘사된 일들을 오늘날 성령의 반복적인 부으심의 모델로 삼을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순절의 사건을 오늘날 신자들이 생활에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행 1:5에 따르면 오순절날에 성령을 부으심은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도 있다. 즉 어떻게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오늘날 신자들의 생활에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베드로 자신이 그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오순절날에 그의 말을 듣는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바로 다음 절에서 베드로는 이것이 약속이라 하고 그 약속은 유대인들과 그 자녀들과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먼데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라 한다.

 

때때로 이 본문은 무리들이 성령을 그리스도께로부터 회심 후에 두 번째 단계로 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말한다.

 

그렇다면 신자 한 사람이 그 약속된 성령을 받고 다른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이다.

 

하지만 그 약속이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 그런 주석은 행 2:38과 잘 맞지 않는다. 베드로는 회개와 세례를 명령했다가 성령을 약속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성령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행 2:17, 18에서 인용된 요엘의 에언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예언의 말씀대로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행 2:38, 39은 오순절날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우리는 행전 2장의 동일한 본문 속에서 성령의 처음 오심이라는 구속적 사건과(2:1-4) 더불어 그 사건의 결과로서 개개인의 개별적 구원 역사에 대해 동시에 말하는 것을(2:38, 39) 보게 된다.

 

우리는 이를 고전 12:13과 연관시킬 수 있다.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제시하는 것의 근거로서 회중 속에 있는 동일성, 곧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 본문이 주는 의미처럼 모든 성도들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과거에 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을 회피하기 위하여 몇 가지 시도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토레이(R. A. Torrey)는 이런 일이 교회의 가장 정상적 상태이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가 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잊어버린 이후로는 이 일이 더 이상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 온갖 분열과 약점이 있었서 모델 교회로 불리워질 수 없다. 또 성경은 성령의 이런 사역이 신자의 과실 때문에 없어지리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또 다른 회피의 방식은 여기서 의미하는 세례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인 반면, 행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문법적 근거가 없다. 여기 사용된 표현은 행 1:5에 사용된 것과 똑같다. 만일 구분이 있다면 행 1:5의 말이 첫 번째요 결정적이며 구속사적인 성령을 부으심에 적용된 반면, 고전 12:13에서는 그 동일한 성령을 구원사적으로 받음을 말한다.

 

모든 신자가 성령을 가진다는 사실은 롬 8:9, 15이하, 고전 12:13, 엡 2:22 등과 같은 본문에서 확실해진다. 그리고 이 성령이 믿음의 순간에 온다는 사실이 행 11:17, 갈 3:14, 엡 1:13 등에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개개인 신자가 그의 신앙과 생활의 제 2 단계를 시작하는 표시적 체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세례의 결과로서 교회가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행 1:5-8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세례는 사람 속에 믿음이 생기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그 말이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가 복음의 부름에 부응하도록 하는 그런 성령의 사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세례 주다란 말은 오순절날부터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선물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거주시켜 주심을 의미한다. 이 일은 믿음의 즉각적인 결과인 것이다.

 

8.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능력

 

이 성령이 오신 결과가 여러 가지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를 들면 성령의 내주를 말할 수 있고, 그때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 사이에 거하시던 방법과는 다름을 지적할 수 있다. 또는 성령을 보증, 곧 미래의 선물들에 대한 보증이라 강조할 수도 있다(고전 1:22, 5:5, 엡 1:14). 아브라함에게 대해서는 그의 아들로, 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는 그 땅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성령이, 그들이 장차 받을 유업에 대한 보증이 된다. 또는 성령 사역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공동체를 강조할 수 있겠다. 이러한 통일에 대한 강조는 고전 12-14장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바로 이 통일의 근거로 작용한다(고전 12:13, 참고, 엡 4:3).

 

또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계명 중 많은 부분이 신약 시대에는 폐하여졌다. 여러 나라에서 사는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성령님의 인도 아래서 살아야 한다(롬 14:17, 18; 엡 5:18). 위에서 언급된 주제들은 사실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성령 오심의 결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받을 것이라는 행 1:5-8의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때때로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나약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다. 성경은 이 세례가 능력을 준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그 신앙이나 활동에서 나약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는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지 못함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그것을 받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두 가지 실수가 생긴다. 첫째는 오순절 사건을 하나님의 점진적 구속 사역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사건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전 1, 2장을 올바로 주석하면, 오순절 이후로 교회는 단 한 순간도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없이 존재했던 적이 없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실수는 위와 같은 추론의 전제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교회가 오순절 전에는 약한 교회요 무질서하고 능력도 없고 방향도 잃어 버린 교회였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오순절이 되기까지 교회의 사정을 보여 주는 본문들을 읽어 보면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찾아보지 못한다. 눅 24:52, 53을 보면, 그리스도의 승천을 보고 제자들이 돌아올 때 기쁨이 충만했다고 한다. 또 그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기쁨이나 찬양은 약함의 증거들이 아니다. 행 1:14은 또 그들이 그동안에 기도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는 사이에 제자들이 취한 한 행동을 기록한다. 곧 유다를 대신할 한 사람을 뽑는 일이다. 이 일은 사도들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고 성경을 좇아 행해졌다. 그 사건은 행전 1장의 교회가 미래를 위해 준비하였음을 나타낸다. 그 어디에도 신앙이나 활동의 면에서 연약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성령이 왜 능력을 주는 사역과 함께 보내어졌을까? 본문 자체가 이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에과 모든 유대와 사마리아와 세상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행 1:8). 선교의 범위가 넓혀져야 하고,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계를 깨고 나와야 했다. 이는 아브라함 이래로 한 나라에 제한 되어 왔던 교회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인 것이다. 민족 교회로부터 온 세상 나라들에서 모인 교회로의 전이(轉移)가 바로 행전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실수를 지적할 것이 있다. 본문은 제자들의 말이 능력있게 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또 그들 자신이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리라는 의미도 아니다. 행 1:5-8에 나타난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으로 능력을 줌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증인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점은 요엘의 예언에도 강조되었고 오순절에서 성취되었다. 그 예언의 내용은 여러 권능의 사람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듣고 또 그가 많은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예언의 의미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나이나 성별이나 사회적 신분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점은 우연히도 요 7:38, 39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생수의 강이 그의 속에서 흘러나리라.”는 말씀과 일치한다. 이 말씀은 생수가 신자의 속에 있을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흘러 나올 것을 강조한다. 오순절 이후로는 믿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된다.

 

행전 1, 2장에 강조된 대로 오순절 사건의 새로운 면은 그 때 이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 시대처럼 예언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은 결과로서 복음은 구라파와 미국과 아시아에 전달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100년 전부터 복음을 전해 왔던 사실도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은 일의 구체적 증명이다.

 

9. 몇 가지의 구체적 결과

 

이상의 이론적 논리에 이어서 이에 따른 몇 가지 실체적 결과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한국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또 고난 주간과 부활절에는 그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오순절날에 성령을 부으심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오순절날이 부활절 후 제 50일 되는 날에 기념되고 있다. 한국의 교회도 이 성령의 부으심을 특별한 기념 행사와 함께 지킨다면 좋은 발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은, 오순절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과 같은 계열에 속하고 이 모든 사건들이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서 결정적인 사건들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2. 성령을 받기 위하여 특별한 모임을 실행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찾아보게 된다(눅 24:48, 행 1: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을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주시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때와 장소에 대한 지시를 주었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몇 날을 기다려야 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오심을 신자들이 기다려야 한다는 명령을 일반화 한다면 우리가 신자들을 예루살렘에 가도록 재촉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행전 1장에서 오순절파가 실행하는 것과 같은 기다리는 모임을 찾아보지 못한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기도를 명하신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120문도)은 물론 기도했다(행 1:14). 하지만 자신을 비우라든지 안수하라는 명령은 행전 1장엔 전혀 없다. 행전 1장 이후에도 기다리는 모임과 같은 것을 찾아보지 못한다. 8:16이나 19:에서 안수하는 일을 볼 수는 있지만 기다리는 모임의 특성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성령이 모든 신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준비 모임을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들과 오늘날 목사들과의 사이에 있는 근본적 차이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모임과 같은 것에는 쐐기를 박아야 한다.

 

3. 개혁 운동은 그리스도가 그의 신약 교회를 세우실 때 고려하였던 수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격려해야 하겠다. 그 수준은 곧 성령을 받은 회중이다.

 

물론 성령의 보다 많은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엡 1:17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1:13)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한다. 또 그는 엡 3:16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으로 인해 강건해지도록 기도한다. 또 오순절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신다(눅 11:13).

 

기도뿐만 아니라 행위도 필요한데 이는 성령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일은 살전 5:19에 금지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이 말은 뒷 구절과 연결되는데,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엡 4:30에서도 금지가 나온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이는 에베소 교인들의 언어 생활(29절 : 무릇 더러운 말, 31절 :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관계된 말씀이다. 즉 신자는 나쁜 말을 통해서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성령의 지속적 사역에 대하여 적극적인 명령도 찾을 수 있다. 갈 5:16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였는데 이 말은 22절 이하에서 보여진 대로 성령의 열매를 실제상으로 의미한다. 엡 5:18은 “성령으로 충만되라” 고 명한다. 이 명령이 실제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5:22-23), 부모와 자녀 관계(6:1-4),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6:5-9) 등을 들어서 바울이 설명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우리는 능력을 주는 성령을 제 2 차적 단계로 받들고 준비하라는 명령을 찾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살펴본 금지와 명령들을 회중이 성령으로 채워진 회중의 수준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엡 1:17처럼 지식에서 자라가야 함을 의미하며 엡 3:17처럼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바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성령의 회중 속에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이야기하고 또 그 분과 그의 사역을 이해하는 일에 자라가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4. 요사이 한국에서 교회가 약화되었다는 불평이 많이 들리고 있다. 그 이유로서 성령님이 없거나 성령님이 주시는 특별한 힘이 없다는 것들이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자 개인으로서, 그리고 신자 모두가 교회로서 성령을 다시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결과는 그 해결책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님의 힘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이 완전히 안 계신다면 교회는 교회의 이름을 갖지 못한 죽은 교회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이러한 해결책은 비성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너무 쉬운 것이다. 문제의 해결책은 성령의 힘이 없기 때문에 성령을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이미 계시므로 신자로서, 또 교회로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약한 교회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이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고 완전한 사랑과 순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계 2:5-16, 24-25, 3:3,19).

 

기독교 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일상 생활에다가 그저 성경 읽고 예배 드리는 것만 첨가한 그런 생활이 아니다. 기독교 생활은 성경을 읽는 것과 예배가 생활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생활이다. 엡 5,6장에 나오는 예를 든다면, 기독교인 부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엡 5:18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또 기독교 회사가 다나지 일요일의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용주나 근로자 사이에서 또 근로자 상호간에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약화된다면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게 살지 않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사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한국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았고 굳이 표현하자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사용할 수 있다. 이제 온 세계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한국 신자의 책임은 그 성령님의 인도 아래 일상 생활에서 말과 행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 아래 살 때 직면하는 사회의 많은 반대 속에서도 이렇게 기독교적 말과 행동이 진실되게 나타난다면 성령님의 능력은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개혁 운동의 전망은 우리 태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오순절파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발전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위 말하는 제 2 의 축복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받도록 독촉하며 기대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개혁적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갈 수도 있다. 그때에는 강조점이 제 2 의 축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에 강조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에 회중은 성령으로 채워진 회중의 수준에 근거하여 믿음과 기도와 전도와 행동안에 살도록 독려를 받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개혁 운동이 이 후자의 지향점을 택하도록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첨부파일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고재수 지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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