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

박영돈 목사 2013. 8. 26. 00:49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


/ 거룩한 수줍음은 성령의 얼굴을 분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심히 부끄러워하며 오직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온통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이다. 요즘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에게서 이 성령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

  성령은 얼굴 없는 인격(Person without face)이라는 말이 있다. 성령은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신비한 인격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성령에 대한 많은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한국교회에 성령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몇 십 년 전에 한국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방언 열풍이 다시 불어오며, 신유집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예언과 환상과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이들의 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일어나는 온갖 잡다한 은사집회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무질서한 현상들이 성령에 대한 오해와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어디까지 성령의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광명의 천사의 얼굴로 위장하는데 명수인 마귀는 성령의 얼굴도 모방한다. 소위 성령집회라는 모임에서 성령의 얼굴과 마귀의 얼굴이 혼재하여 나타나며, 성령의 사역자라는 이들에게서 두 얼굴이 교차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얼굴을 마귀의 얼굴과, 광신자의 얼굴 그리고 이단자의 얼굴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게 하는 성령의 특성을 바로 이해함이 절실하다.
  패커(J. I. Packer)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를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이라고 했다. 이 수줍음은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병든 자의식의 산물, 즉 자신감이 결여되거나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하는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수줍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사랑의 특성이다. 성령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전히 예수님만 드러내는 수줍음을 가지셨다. 성령님은 자신의 영광을 베일로 감추고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신다(요 16:14). 이 거룩한 수줍음은 예수님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셨다. 예수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마저 수줍어하신다. 성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지만 성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그리고 아들 안에서 우리도 영화롭게 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바로 마귀의 특성이다. 인간이 스스로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욕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을 닮은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
  이 거룩한 수줍음은 성령의 얼굴을 분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심히 부끄러워하며 오직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온통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이다. 요즘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에게서 이 성령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과시하며 자신의 영광과 명성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일그러진 마귀의 얼굴이 나타날 때가 많다. 어떤 이는 사람들을  자주 쓰러뜨림으로 은근히 자신이 능력 있는 사역자임을 과시한다. 마이크로 후 불기만 해도 사람들이 쓰러지고 마치 검불처럼 데굴데굴 구르기도 한다. 과거 영국과 미국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 간혹 말씀을 듣다가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강한 역사하심에 압도되어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설교자들은 말씀만 전했을 뿐, 전혀 그런 현상을 어떤 식으로든 유도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의도적으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안수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사람들을 안수하여 쓰러뜨리는 행위는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어떤 이들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묵시를 받을 때 땅에 엎드러진 것과 그와 비슷한 사례(다니엘)를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하는데, 어찌 두 현상이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사건들은 인간의 안수나 어떤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현현이나 계시에 의해 압도되어 일어난 현상이다.
  또 어떤 이들은 멀쩡한 이빨을 금이빨로 바뀌게 하는 해괴한 현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초능력과 기적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많은 무리들을 끌어 모아 집회가 대성황을 이루게 한다. 전에 아프리카의 어떤 선교지에서 이빨이 빠지고 잇몸이 상해 음식을 못 먹는 이들에게 새 이빨이 생기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보도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기적은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이빨을 요술과 같이 금이빨로 둔갑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 볼 수 없고 오히려 미혹케 하는 악령의 장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은 진리와 질서의 영이시기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 없이 기적을 남발하여 우리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게 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기적을 아주 경제적으로 행하신다. 분명한 경륜적 목적 없이 기적을 마구 행하지 않으신다. 이는 우리가 살도록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므로 우리의 삶을 혼돈케 하지 않기 위하심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표적을 통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들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거침돌이 될 수 있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을 단숨에 날려 버림으로 믿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회개와 사랑의 반응은 이끌어 낼 수는 없다. 죄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그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나 믿는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고전 1:23-24). 기적을 통해서는 결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사는 그 절정에 이르렀으나 유대인들은 그로인해 더욱 강퍅해졌다. 이후부터 복음서에서 기적은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지고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전면에 부각된다.
  과거 유대인들과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십자가의 메시야가 아니라 기적과 표적으로 세상을 제압하는 만능의 메시야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광야에서 사단이 제시한 유혹이자 십자가 밑에서 군중들이 원하던 것이다. “네가 메시야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의 능력을 보여 달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십자가 복음만이 아니라 마술과 같은 표적으로 사람을 끌려고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십자가의 신학에서 일탈하여 번영신학, 영광의 신학으로 경도된 메시야관이 교회에 은밀히 침투하고 있는 사인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능력보다 기적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려는 자칭 성령사역자들의 메시지와 사역이 십자가의 메시야보다 만능의 메시야를 더 선호하는 대중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다.

선지동산 51 게재 / 성령의얼굴(1)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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