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개혁파 정통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제27장 교회'에서 발췌 


11. 개인이 교회에 소속하는 것은 성령을 통한 그들의 소명에 근거한다. 그러나 성령의 소명이 외적인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에, 즉 선택받은 자의 마음에는 유효하게 하고 유기된 에게는 전적으로 무효하게 하기 때문에, (1) 오로지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고 오로지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통하여 신자 개인에게 보증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가시적인 교회 공동체는 또한 가시적 측면, 즉 선포와 말씀의 외적 주재권이라는 가시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2) 교회가 외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한 은혜 언약의 공동체에는 속하지 않은 외식자와 죽은 교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전투적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나눈다. 불가시적 교회는 말씀과 성령에 의해 유효적으로 소명된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며, 가시적 교회는 말씀에 의해 소명된 자들의 공동체이다.


마레시우스는 말한다.(XVI.51-52): "가시성과 불가시성이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교황파가 비방하는 대로 우리가 교회를 두 개로 분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다른 측면에서 교회에 속하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형식적 요소인 선택과 신앙과 사랑은 불가시적이다. 따라서, 분명히 구별하고 확정할 수 있는 교회의 판별 기준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런 증표는 단지 혼돈과 가정을 조장하는 지역화의 암시를 부과할 뿐이다. 그러나 개교회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구별되었는데, 교회를 볼 수 있는 것과 그것이 참된 교회인지를 볼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반틸은 말한다.(Hypotyposis, 218): "불가시적 교회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가시적 교회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시행을 받는 외적 연합체에 가입한 자들의 모임이다.“ 다른 교의학자들도 유사하다.


12. 그러나 이 둘은 두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한 교회이며,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교제의 측면에서는” 불가시적이라 불리고, “외적인 고백이나 신성한 규칙과 정치의 측면에서는” 가시적이라고 불린다(픽테트, XIII.i.7).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두 종류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주체를 그 구성의 다른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것일 뿐이다. 리쎈은 말한다(XVI.9.1): "우리가 교회를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으로 구별할 때, 우리의 적대자들이 마치 우리가 두 개의 상호 대립되는 종류의 교회를 만들어 낸다고 비방하는 대로 이 구분이 종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다양한 상태에 따라 주체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러 면에서 가시적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여기서 그 내적인 형태, 즉 참된 신앙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 생각되는 한 불가시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하다.“


13. 가시적 교회 외적인 말씀과 성례의 사용, 그리고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하나의 외적인 몸과 사회에 가입된 사람들의 회집이다“(레이든 신학통론, XL.32). 가시적 교회는 외적인 다스림과 예배의 통일성을 가진 지역적 교회나 외적인 고백의 통일성을 가진 고백적 교회의 형태를 가진다. 후자는 지역적 교회들과 복합될 수도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33): "이 가시적 교회는 두 방식으로 인정된다. 하나는 신앙과 성례뿐 아니라 외적인 통치와 교회의식의 형태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로 상호 연합된 사람들이 한 부락이나 도시나 지역 단위로 모이는 특정한 회집으로, 다른 하나는 비록 흔히 외적인 정치의 실제적 형태와 의식의 구체적 방식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성례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전 세계에 걸쳐 다른 장소에 흩어져 있는 연합적이고 우주적인 회집으로 나타난다.”


14.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불신자와 위선자들이 당연히 발견되지만, 그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비록 외적으로는 그들이 교회의 신앙고백을 표현하며 성례에 참여하고 교회법에 형식적으로 순응하지만, 그들의 불신은 결정적이어서, 그들은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아니라 단지 외적 조직의 연관자일 뿐이다. 리쎈은 말한다(XVI.8.1): “우리는 유기된 자가 교회의 외적 상태에 속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외적인 교회는 단지 신앙 고백과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성례 참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씀과 성령을 통한 내면적이고 유효적인 소명으로 구성되는 교회의 내적 상태에 속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교회의 본질적 형태가 오로지 외적 신앙고백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신앙의 내적 진정성에서 발견되어야 하는가? 만일 불경하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단지 외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백하는 교제에 연합되어 있다면, 비록 그들이 신앙과 성결을 결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는가? 교인이라고 불리고 그 특권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참으로 믿고 중생한 신자와 경건한 자만이 아닌가? 여기서 교황파와 우리는 견해를 달리 한다.”


벤델린은 말한다(Coll,308): "불경한 자가 참된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이 아닌 이유는 바로 실제적인 불경 때문이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교회에 머리와 분리되어 있어서, 비록 그들이 간혹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외적인 신조의 고백과 성례의 사용을 통해 신앙을 연출하는 한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고 성령에 의해 신앙으로 그에게 연결될 수 없다.“ 마레시우스는 말한다(XV.12): "선택받은 자만이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이라고 하는 말이 가장 참되다.” 투레틴은 말한다(XVIII.iii.1): "소명된 선택받은 자들 외에 유기된 자나 불신자도, 그 사실이 숨겨져 있든 분명히 알 수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될 수 있는가? 교황파들은 긍정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


15. 그러므로, 교회에는 권징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여 공동체로부터 그렇게 확인된 불경자와 위선자를 제거함으로써 자기를 정화해야 될 의무가 주어져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36): "비록 이 교회가 위선자와 불경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위선자들을 적발하고 그리스도의 처방에 따라 그가 위엄된 열쇠들을 사용하여 자기 집단에서 불경한 자들을 제거할 책임이 있다. 마18: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계2: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 14(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실제적인 신자의 경우에는, 바울이 권고하는 대로, 삶이나 신앙에서 결함이 발생할 때 동일한 권징을 통해 진지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고전5: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16. 불가시적 교회는 유효적 소명을 통하여 중생하고 회심한 선택받은 자들의 교제이다. 이 공동체를 불가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 속하는 내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와 성령 안에서의 진정한 신앙과 생명이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효과와 외적 신앙고백과 선행은 불신자에 의해서도 기만적으로 모방될 수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만이 오류 없이 중생자와 위선자를 구별하여 볼 수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27): "우리는 이 전투적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별한다. 불가시적 교회는 특정한 교회이든 전 세계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회중이든 신자 그리고 선택된 자의 모임에 주어진 이름이다. 이 교회를 불가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실제적인 내적이고 본질적인 형태, 말하자면 참된 신앙과 성결이 신앙고백과 선행을 통해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선자들이 이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단지 이와 같은 것들을 근거로 하여 타인에 대해 무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볼레비우스는 말한다(111): "불가시적 교회는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것을 불가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 속한 자들이 사람 처럼 보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받은 자인지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누가 자기 것인지를 인지할 수 있다. 딤후2:19(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17.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별이 일차적으로는 전체 교회에 해당되지만, 그것은 또한 그 지체인 개교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브라운은 말한다(II.iv.24.22.7): "동일한 교회가 가시적이러고 불릴 수도 있고 불가시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나,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가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사람이 사람으로서 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합법적 용법을 통하여 외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고백하고 성례를 거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불가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마음속에 존재하여 아무 인간도 볼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 볼 수 있는 성령과 참된 신앙 때문이다.“



[개혁파 정통 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제27장 교회‘ 940~944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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