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예루살렘 성지가 될 것 같습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성지를 순례하며 둘러 보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져 지난 며칠간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는 숭고한 길,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 이상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칸”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에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칸’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옷을 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  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 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  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입니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합니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최송연/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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