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구원론의 기본사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은 처참한 죄인이라 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예 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결론하기 위해서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 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구원론을 시작합니다.

< 죄의 종 >

바울은 '죄(하말티아, )'라는 용어를 64회 사용하는데 로마서에서만 48회 사용합니
다. 그리고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롬 6:17,20).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 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롬 3:23).

< 육신 >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147회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바 울이 91회를 썼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육체라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군터 보른캄에 의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에 대립되고 모순되는 인간의 존재와 태도'라는 의미 로 바울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육신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문은 로마서 8장 1-17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육신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여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육신을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 율법 >

바울이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 율법이라는 단어를 119회 사용하는데 신약성경 전체 191회의 62퍼센트 정도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말할 때는 대개 모세의 율법을 말하며, 바울은 그 율법을 하나님의 좋은 선 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헬라어 단어 '칼로스( )'는 '아름다운'이라는 뜻 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데이비스(W. D. Davi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즉 바울은 율법의 목적이 그것을 지킴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죄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레온 모리스는 여기서 '범죄'가 원어를 보면 단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더 많은 범죄(범죄들)를 일으켰다는 말이 아니라 범죄에 대해서 더 밝히 드러냈다는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있음으로 범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여부가 더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명확하게 보여줌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필요를 보여줌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갈 3:24)
그러므로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이 이용되면 율법은 오히려 구원의 방해꾼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죄를 깨달음으로 구원의 필요를 느끼고, 구원의 필요를 율법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선까지 나아가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죽음 >

바울이 생각하는 죽음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죽음은 모든 인간을 쓸어버리는 잔인한 정복자이나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내세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 >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 2:3).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철저히 거부권을 행사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죄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구원론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더 살펴볼까요?

< 심판 >

심판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현재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진행되고 있다.
2. 미래의 종말에 가장 큰 심판이 있다.
3.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딤후 4:1).
4.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딤후 4:8).
5.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구원과는 별도로 행위심판이 있다(고전 3장).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보응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서 건축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고 어떤 사람은 나무, 풀, 짚으로 건축한다는 것입니다(12절). 심판의 날에 그 문제가 그냥 눈감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공덕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불 가운데서 심판하는데 나무, 풀, 짚과 같은 것으로 건축한 사람은 그 공력이 타버려서 구원을 받기는 받지만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이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12절).
이런 사상을 바울이 말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교회의 교인의 파당문제와 관련되어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파당 문제로 바울이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1장과 2장에서 분파의 원인에 대해서 원론적인 언급을 했다면 3장에서는 분파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육신의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가 무엇이고,
바울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합니다. 다 사람일뿐이라고 하면서 그는 말합니다. 자기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9절).
그래서 계속되는 바울의 말을 설명하면 이런 말입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인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진 견고한 성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추악한 분열을 일삼아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워진 성전이 되려고 하는가? 그러면 심판의 날 너희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 즉 시커먼 숯과 타버린 재처럼 되어서 창피한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일이 없도록 더 이상 분파행동을 하지 말고 거룩하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않는가?(16절)"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잘못된 행위도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참한 업적들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심판 날에 안타까운 처지에 처할 것입니다.

< 이 악한 세대 >

바욿은 '이 악한 세대(갈 1:4)'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환경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환경적 요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첫째, 인간의 범죄가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고, 둘째, 악한 영들의 활동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들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도 말하지만 거대한 악의 세력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십자가 >

바울의 삶과 사상에 있어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처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 2:2). 아덴에서의 선교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십자가는 다른 성경 기자와는 다른 바울의 탁월한 사상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무수히 역설했지만 바울 서신 외에서는 복음서에서의 십자가 사건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에서만 십자가와 관련한 언급이 한 번 나옵니다(히 12:2).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라는 개념이 얼마나 '바울적인 개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 중의 한 축입니다. 또 다른 한 축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는 논란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논란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혹은 한 축이 더 길면 절름발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은 분리된 개념이 아닙니다.

< 구속 >

구속이란 말은 '속전(대가)을 지불하고 구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말보다 더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속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속을 가져다 준다고 바울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셔서(롬 3:25)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신 것입니다.

< 칭의 >

'의롭다고 여김 받는다'라는 뜻을 가진 칭의라는 개념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의로운 재판장으로부터 어떻게 '무죄!'라는 선언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3:24)

< 속죄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 다양한 범주 >

구속(롬 3:24; 고전 1:30; 갈 1:13; 4:4; 엡 1:7; 골 1:14).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의미입니다. 무슨 값을 치르셨습니까?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피'라는 값입니다.
새 언약(고전 11:25).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
운 하나님과의 약속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사죄'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유대교를 조금 변형시킨 것이 아닙니다. 율법보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화목(롬 5:10-11; 고후 5:18-20; 엡 2:11-16; 골 1:19-22). 바울의 글에서 앞에 열거한 4구절에서만 '화목'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화목은 분쟁이나 적의를 지니고 있다가 다시 화평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원수였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것입니다.
제물(엡 5:2; 고전 5:7). 동물의 피를 바치면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확신을 얻는 제사의식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한 희생 제물입니다.
용서(골 3:13; 엡 4:32). 우리는 죄의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양자됨(롬 8:15; 갈 4:5; 엡 1:5). 양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가족에 속하지 않던 한 사람이 그 가족의 완전한 일원이 되는 것이며, 권리와 동시에 의무도 주어집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입양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사랑 >

이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믿음!"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나서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목회서신에는 사랑이 10번 언급되어 있는데, 그 중에 9번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바울은 수많은 글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수많은 축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바울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롬 8:35-39). 바울이 수없이 쓰고 있는 '은혜'라는 단어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랑 없이 은혜가 어떻게 온전히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은 '융통성 없는 심판자'요, 그리스도는 '그 심판자로부터 구출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상한 그림은 바울의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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